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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신앙, 교육, 농촌에 희망 걸다
[대담] 항일민족운동의 요람 명동학교의 산 증인, 문동환 목사
          오산학교의 맥 이은 풀무학교 지킴이, 홍순명 선생

신앙과 교육으로 다음 세대를 키우고, 미래문명의 희망이 될 공동체를 일군 산 증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구한말 우리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워진 명동촌에서 성장하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목사로서의 삶에 뜻을 품은 문동환 목사와, 한국전쟁 직후 전신 오산학교의 초지를 지키려 다시 세워진 풀무학교를 50년 가까이 지켜왔던 홍순명 선생이 '신앙, 공동체, 교육, 새로운 역사와 문명'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 4년간 교목으로 지냈던 오세택 목사도 함께 토론하기로 했으나, 사정상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였다. 5월 17일 강원도 홍천에서 열린 이번 대담은 아름다운마을교육공동체 최철호 교장이 진행했으며, 아름다운마을교육공동체 학생과 교사, 학부모, 공동체지도력훈련원생 등 250명이 참석했다.


문동환/ 새 내일의 출발은 아파하는 얼이에요. 이것이 없이 참된 새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명동[각주:1]'은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입니다. 정치하러 가지 않고 학문으로 젊은이들을 깨우쳐서 새날의 주인이 되게 하겠다는 함경북도 학자 넷이 1899년 두만강 북쪽 명동으로 건너와서 농사짓고 서당을 세웠습니다. 일년 동안 학교를 이끈 정재면 목사[각주:2]가 "아이들만 예수 믿게 해서는 이 나라가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예수 믿는다면 내가 머물러 있겠소" 그랬어요. 주역과 맹자를 낭독했던 유학자들이 상투 깎고 제사 못 지낸다는 얘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요. 사흘 동안 의논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받아들였어요.

우리 외할아버지 문병규 선생[각주:3]은 "학자가, 기독교가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예수 믿어?" 이러면서 식구들이 잠자는 동안 성서를 세 번이나 읽었어요. 그러고 나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긴 하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무엇보다도 사랑과 정의, 평화가 있어" 하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명동학교 교가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한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비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덕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한뫼라는 것은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에요. 단군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명동이에요. 사실 유학, 실학, 동학이 다 이 단군 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선조들의 정신은 한님, 하느님이에요. 한님의 은덕으로 생명을 얻은 한 식구라는 그런 정신이 있습니다. 명동은 그런 정신에 살았어요. 그리고 만주에서 같이 공부한 김재준, 안병무, 문익환 목사를 통해서 한신에서 우리 민족을 아파하면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어요.

얼과 얼이 통하는 교육, 더불어 사는 평민 교육

1936년생인 홍순명 선생님은 교사를 하다가 군대에서 풀무학교 기사를 접하고 감동받아 군 제대 후 스물넷의 나이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합류, 42년 동안 재직했다. 2001년 풀뿌리 주민대학인 2년제 전공과정을 창설하여 농촌에서 우리 사회의 뿌리를 가꿀 일꾼을 길러 왔다.

홍순명/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서 어떻게 민족을 각성시키고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 고민한 선각자들과, 생각하는 민중들의 염원이 명동학교, 오산학교[각주:4], 풀무학교의 기류로 나타난 것이라고 오늘 이 자리에서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산학교의 건학이념은 교육과 기독교와 농촌을 일체화하여 한국의 이상적인 축소판 같은 곳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 초지를 지킬 수 없게 됐습니다. 오산의 정신을 내면화하신 이찬갑 선생[각주:5]과 주옥로 선생의 뜻이 합쳐져서, 1958년 충남 홍성에 풀무학교가 개교했습니다. 이찬갑 선생은 "도시문명 교육은 물질 교육, 간판 교육, 허세 교육이었다. 농촌을 중심으로 정신 교육, 실력 교육, 인격 교육을 해야 한다. 문명을 고쳐 세우는 것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둔 교육에 있다"는 웅대한 말씀을 당시 중학교 1학년생들 앞에서 말씀하셨어요.


풀무학교를 졸업하고 현실적으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전공부(대학과정)를 시작한 지 13년이 됐습니다. 전공부는 한 해 졸업자가 10명 미만인데, 그 중 4~5명이 농촌으로 들어갑니다. 전공부는 오전에 인문, 오후에 실습을 합니다. 인문교양은 '기도의 정신'입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농사짓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전공부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첫째, 학생들이 시험을 안 봅니다. 대신 이후에 자기가 뭘 하겠다는 논문을 씁니다. 또 하나는 선생님과 학생들 간에 계급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학교하고 마을 사이에 담이 없습니다. 지역은 몸이고 학교는 지역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의 마을 속에서 교과서에서 얻지 못하는 생활풍습, 5천 년 농경생활, 계절의 리듬 같은 온전한 교양을 배웁니다. 모든 지역이 살아 움직이는 거예요.

최철호/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 선생을 비롯한 당대 선각자들에게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향하는 가치를 현재화할 수 있는 삶의 관계들, 터전인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도 땅까지 물색했는데, 감옥에 잡혀가는 바람에 못하셨죠. 지금 지식인들이 철학을 책과 머릿속에서만 다루며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과 굉장히 다른 모습입니다. 끊임없이 꿈꾸는 것을 현재화하기 위해 그런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관계, 조직,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명동학교와 오산학교, 풀무학교가 가지고 있는 교육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교육과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1921년 태어난 문동환 목사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함께 자라온 문익환, 안병무, 김재준 등과 한신대를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이끌었으며, 교회 청년들과 공동체 '새벽의 집'을 만들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수감되었다가 1992년 미국으로 가서 활동해왔다.

문동환/ 교육은 얼과 얼이 통하게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선배들은 철저히 배우고 시작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선배들과 얼이 통하지 않아요. 왜냐면 산업문화가 막 밀고 나가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머리를 잘 써서 좋은 기계를 만들어서 남을 잘 이용해서 부자가 되고 힘을 가지느냐 이것이 산업문화예요. 경쟁, 경쟁, 경쟁이에요. 자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비참한 것을 보고도 아파하지 않아요. 산업문화라는 게 얼마나 지독하게 우리 모두를 세뇌하는지 몰라요. 이것에서 탈피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교회에 가봐도, 인권 얘기는 해도 산업문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어요. 교육은, 이렇다는 것을 철저히 보게 하는 일, 이것을 본 예수나 모세, 이런 선배들하고 철저하게 기가 통하는 일이에요. 지식은 도구일 뿐이에요. 요즘 교육은 도구만 가르쳐줘요. 역사를 얘기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하는 얼을 얘기하지 않아요. 새 문화를 만들려면 역사에서 우리 선조들의 얼, 더불어 사는 얼을 봐야 해요.


홍순명/ '더불어 사는 평민'이 풀무학교의 교훈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잔치를 하는 겁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목표로 보면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나 경제적 수단으로 보는 것도 바뀝니다.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자연에서 일하는 건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농업은 이제 농민의 생업만은 아니고, 생활농업이 돼야 한다고 봅니다.

개교할 때 선생님이 두 분이셨는데, 두 분이 "우리 학교는 교장도 없고, 사원도 없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게 학교의 좋은 전통이 됐습니다. 훌륭한 지도력이란 "남을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남보다 학교의 방향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 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든지 간에 서로 좋은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중심이 됩니다. 각기 다 은사들이 있고, 자기가 받은 은사의 선한 관리자가 돼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데 쓰는 것,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학교에는 큰 분도 있고 작은 분도 있고, 다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랬어요. "풀무학교가 풀무학교가 된 것은 사람들이 어줍지 않으니까 풀무학교가 됐다"고. 똑똑하면 올라가서 위에서 지시하는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습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은 다 도시로 가버리고 좋은 대학에 가고, 못하는 사람은 능력도 없겠다 시골을 지키다 보니까, 전국친환경농민연합회장에 어줍지 않은 사람인 저희 학교 졸업생이 만장일치로 선출됐어요. 크고 훌륭한 것보다도 어떤 태도를 갖고 사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최철호/ 해방운동을 했던 초기 한국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인 신앙은 지금의 기독교와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훨씬 폭넓고 깊이 있었습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 오산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 이런 분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세는 엄격한 자기수련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삶 자체에서 '다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이죠. 《대학》은, 자기를 교육하는 것, 자녀를 교육하는 것, 부부가 상호 간에 교육되어 가는 것, 이 모든 교육의 삶을 도를 닦는 것, 수도로 보고 있습니다(修道之謂敎). 그런데 이런 삶의 전통과 가치들이 사장되고, 외워서 진학을 위해 공부하는 교육의 패턴이 자리 잡게 되면서, 교육에서 자기 수련을 잃어버렸습니다. 풀무학교처럼 일관되게 그 길을 걸어가는 학교는 참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었을 때 주어지게 되는 혜택들, 여러 이해관계들 앞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게 중요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홍순명 오산학교는 식민통치 끝 무렵에 더 많은 인재를 키우고 싶다는 좋은 교육적 동기로 대학 승격을 추진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쉽게 조건 없이 허가해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교장선생님을 당시 조만식 선생님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조건, 일본 사람들이 일본 역사를 가르치는 조건, 학생들이 일본 요배하는 조건으로 승격을 해줬습니다. 자꾸 이래 가지고 안 되겠다 싶어서 양심적인 분들은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 타협도 필요할 것 같지만, 한 걸음 타협이 몇 걸음 퇴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찬갑 선생님이 뼈아프게 경험하셨기에 물질적 지원에 대해 이찬갑 선생님이 단호하셨습니다. 학교도 어려울 때보다 어느 단계에서 돈이 조금 생길 때 더 조심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풀무학교에도 뜻밖에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움직여서 돈이 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이걸 좀 잘해서 정규인가를 받고, 좋은 학생들도 모집하고, 교육 내용도 충실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사회, 교사회, 학생회, 지역사람들이 모두 심오한 토론을 했습니다. 결국 학교를 크게 하고 국가에서 지원받는 것은 정신을 더 충실히 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사를 잘 지으시는 할머니인데 자격증이 없다고 해서 강사로 서지 못하게 돼요. 우리는 얼마든지 마을 어른들을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거든요. 제도라는 건 우리 몸에 맞아야지 옷에 우리 몸을 맞출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일반 학교에 비해 조금 못 받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자급하면 됩니다. 우리 뜻대로 하면 됩니다. 오산학교는 대학을 하려고 했다가 못했지만, 우리는 어쨌든 전공부라는 것을 우리 수준에서 하고 있고, 오산은 마을을 만들다가 중단되었지만 우리는 어쨌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농업은 직업이 아니라 의무


최철호/ 홍순명 선생님은 풀무학교 전공부를 계획하면서 온전한 마을공동체, 학교를 통한 마을공동체 구현을 위해서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이 빨리 공감을 얻지 못하고 상당 기간 시간이 가고 준비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전공부를 시작하실 때, 풀무고등학교에서 훈련받았던 학생들이 전공부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겠다 이런 기대를 당연히 하셨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홍순명/ 따끔한 질문인데요. 올해 풀무학교에서 전공부로 한 학생이 왔어요. 작년에는 안 왔고요. 고등학교는 한 학급 25명 중에 금년에 농업을 선택한 사람이 6명이었습니다. 신앙이나 진로에 대해서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현명한 소비자도 필요하기에, 농업을 하지 않는다고 잘못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어떤 농업전문학교는 학비를 국가에서 대주고 외국에 나갈 기회도 주선해주는 데 비해서, 전공부는 학비도 본인이 내야 하고 외국 나갈 기회도 없고 하니, 꼭 전공부가 최선의 선택지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올해 한 학생이 들어와서, 어떻게 전공부를 들어왔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학교에 들어가면 교육과정에 짜여진 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전공부에 오면 그 학생에 맞게 선생님이 구체적인 조언을 주고 도와준다고, 나를 위해서 학교가 도와주는 것과 학교를 위해 나를 맞추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들어오기 시작하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 전공부에 오는 학생이 있으면, 그 지역에서 '전공부에 들어가도 괜찮네' 이럴 수도 있겠지요. 지금 전공부 1/3은 대학교 졸업생들이 들어와서 이 지역에 남기도 합니다.

최철호/ 풀무학교가 지금의 모습으로 세워진 데에는,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농촌을 수호하며 유기농사를 복원하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이 세 가지 축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농사를 지켜낸다',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간다'고 하는 데서는 뚜렷한 성과를 보여줬는데, '신앙공동체', '신앙교육'이라는 맥락에서 풀무학교를 평가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단순히 '기독교 종교인'을 양산하는 기독교교육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종의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 힘이 되었는데, 그러한 운동의 재생산을 학교가 어떤 역할로 받아들였는지 듣고 싶습니다.


홍순명/ 풀무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우리는 성경을 배웁니다. 학생들이 하루 한 시간씩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고 발표합니다. 그래도 좋으면 자녀를 보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이 성경을 정해서 아침에 한 장씩 쭉 읽으면 3년 동안 성경 1독을 합니다. 또 조를 짜서 한 사람이 복음서 한 권씩 요약하고 공감하는 부분을 발표하고, 질문 내지 반박을 하고, 그러면 제가 10분 코멘트를 해줍니다. 성경은 직접 읽어야 하고, 날마다 읽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학교를 나간 다음에 어떤 종교를 만나거나 어떤 교파를 만나는 건, 본인들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기독교라는 큰 공통기반이 있기에 조금 다른 건 얼마든지 관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의 신앙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생활과 결부되어야 하고 또 역사와도 결부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기초가 될 때 바른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랍비'라 부릅니다. 선생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외워서 창조적으로 새로운 말씀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고전 경전에 숙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민이셨고, 물질과 경쟁에서 마음을 돌려 하나님나라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개인을 발견하고, 사회공동체에 기여하도록 하는 교육의 목적은, '우리의 참모습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받은 은사를 잘 관리해서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성경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말씀이 교육에 있어서 대헌장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사람을 욕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되어 있어요. 사람을 재능으로 평가한다든지, 일등만 인정하다든지 그러면 안 됩니다. 성적이나 가정경제, 장애 여부에 의해 차별받지 않도록 사회가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농업이라는 건, 하나의 기술이나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의무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농업은 깊이가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농민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창조질서의 파괴로 신음하고 있는 자연을 돌보는 것입니다. 단지 돈 벌려고 항생제 먹이고 공장식으로 키우다보니, 조류독감이 퍼지고, 불쌍한 동물을 죽이게 되고…, 이건 아니라고 하는 걸 알려주는 근거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교육과 농업을 살리는 동시에, 농업을 통해서 교육과 신앙을 배울 수 있고, 교육을 통해서 신앙과 농업을 살릴 수 있다, 이런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 나라가 망해가던 때 민족의 힘을 길러 독립의 미래를 준비하고자 1899년 2월 함경도에서 일시에 140여 명의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백두산 북쪽 만주 북간도에 이룬 마을공동체. 농사를 지으며 개간한 땅이 600만 평에 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1907년 독립운동단체 '신민회'에서 북간도 용정으로 파견된 정재면 선생은 명동학교의 요청으로 교사로 부임했다. 교장 김약연을 전도해 성경과 예배를 정규과목으로 설치했다. [본문으로]
  3. 1899년 다른 네 가문과 함께 일가족 40명을 이끌고 북간도로 집단 이주해 명동마을을 만들었다. [본문으로]
  4.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남강 이승훈 선생이 1907년에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한 학교. [본문으로]
  5. 이찬갑 선생은 증조부의 동생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후 오산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1958년 풀무학교를 세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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