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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발길에 채여 여기까지 왔지요"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버팀목, 박형규 목사

1973년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을 주도해서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던 박형규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유신반대투쟁에 앞장서고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을 보호해줘 ‘길 위의 목사’로 불린다.

1973년 남산 부활절연합예배사건을 주도해서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던 박형규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유신반대투쟁에 앞장서고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을 보호해줘 '길 위의 목사'로 불린다.

한국사회 민주화운동 과정에 '연루되지' 않은 사건이 없다고 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고, 또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분, 박형규 목사님. 목사님은 올해 아흔한 살이시다. "손자뻘들 많이 왔네. 아니, 증손자뻘." 강원도 홍천에 있는 생동중학교와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학부모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박형규 목사님이 진실되게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목사님은 1923년에 태어나 일제시대에 성장기를 보내셨다. 열 살 때 집이 망해서 일본 오사카로 갔고, 거기서 소학교 3학년에 편입을 했다. 호주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기에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고, 일본에서 일본말을 모르기에 “영 바보가 되어버렸”단다. 일본 친구들은 목사님을 ‘조센징’이라고 놀렸다. “다른 과목은 다 빵점이었는데” 산수는 백점을 받으셨단다. 산수는, 일본어를 몰라도 풀 수 있는 ‘만국 공통어’인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니까. 피식민지 국가의 한 소년이 겪은 시련을 유쾌한 에피소드로 승화시켜 들려주셨다.

중학교 들어갔을 때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1931년), 중국까지 침략하려 하고(1937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일본 정부는 학교에 천황폐하 사진을 학교에 걸어놓고 등하교 시 90도로 절을 하게 했다. 그때부터 '007작전'이 시작되었다. "신앙인으로서 우상숭배는 치욕적이거든요. 안 하기로 하고 그래서 방법으로는 상급생이 오기 전에 새벽 일찍 학교 가서, 퇴교할 때도 상급생들 나간 뒤에 퇴교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상급생에게 들켜버렸다. 절을 하라는 상급생의 명령에 목사님은 끝까지 버텼고, 급기야 가족들 몰래 그 다음날부터 학교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사실을 어머님이 알게 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절을 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시며 두 모자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아픈 역사 속에서 아들을 아끼는 어머니의 사랑과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결혼을 하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우리 집에서는 군대 가야 하고 폐병으로 일찍 죽을 테니까 씨나 하나 받아두자는 의미로 장가를 보냈고, 신부 집에서는 열여덟 살 넘어가면 군대 가서 정신대 해야 하는데, 폐병쟁이라도 좋으니까 시집을 일단 보내자, 그렇게 해서 저쪽은 시집 오고 난 장가를 간 거예요." 일본의 전시체제가 강화되며 남자는 군대에, 여자는 정신대에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목사님은 군대에 끌려가진 않았다. 폐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전 한글을 가르치다 감옥을 가게 되고, 그 일로 감시를 받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된 대목은 토지개혁이었다. 목사님 아버지는 한의사로 돈을 버셔서 꽤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땅을 부쳐먹고 사는 소작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따라갔다가, "지주라는 자가 얼마나 죄가 큰지 느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자로 살지 않겠다. 될 수 있는 대로 가난하게, 일부러 가난하게 살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목사님의 인생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우리 근현대사였다. 우리 일상은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그만큼 매일의 일상은 ‘역사’를 머금고 있는 소중한 것이다. 90년 인생을 살아오시며 후회되는 것이 없냐는 질문에, 목사님은 "후회되는 게 참 많죠"라고 답하신다. 그중 "교회에 충실하지 못하고 가족들 고생시킨 게 참 미안하고 후회된다"고 하셨다. 목사님의 뼈아프고 정직한 답변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잘 되새겨야 할 것 같다.

목사님은 자신이 굉장히 약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함석헌 선생님 말씀을 빌려, "자기가 원해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모두 도망가지. 발길에 채여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내가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발길에 채여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라고 하셨다. 자기 의지, 자기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누군가의 발길에 차이는 것. 결국 그런 관계 가운데 내가 있느냐? 우리 시대의 아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내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연에 이어 박형규 목사님은 넓은 마당으로 나가서 우리에게 춤을 선보이셨다. 보통 때는 지팡이를 들고 걸으셨지만, 춤출 때 지팡이를 내려놓고 장구 장단에 몸을 맡기셨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은 동작 하나 하나에 깃든 묘한 멋이 가슴을 촉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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