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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없어도, 농사꾼 없으면 안 되겠더라고"
농사지으며 장애인들이 함께 사는 시골집 임락경 목사

국민학교 4학년 때 꼴찌를 하고서, 앞으로 무슨 직업으로 살까 고민했어요. 공무원이 안정된 직업이라 공무원을 하려고 보니까 공무원은 사회에 없어도 살겠더라고요. 교회 가니까 목사가 훌륭한 직업으로 보였는데, 목사가 없으면 더 잘 살 것 같더라고요. 공무원은 없어도 살고, 목사 없으면 더 잘 사는데, 농사짓는 사람 없으면 다 죽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평생 농사를 짓자고 4학년 때 결정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학교문제가 앞으로 우리나라에 큰 문제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중학교는 가지 말자, 그것도 4학년 때 결정했어요.

열두 살 때 미국인 선교사한테 세례를 받았어요. 열 살 때부터 세례 문답하는 것을 들어봐서 줄줄 외웠거든요. 교회 장로님들이 설교하면서 이현필·유영모·함석헌 선생이 훌륭하다 이런 이야기를 늘 하셨는데, 만날 수가 있어야죠. 훌륭한 분들 얼굴이라도 봐두면 내가 평생 재산이 되겠다 생각하고 국민학교 졸업하고 1년 있다가 찾아갔어요. 이현필 선생을 찾아갔더니 폐결핵 때문에 전염된다고 안 만나주는 거예요. 그래서 한 2km 떨어진 무등산에서 선생을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 어느 노인 목사님이 계시더라고요. 결핵환자들과 같이 사는 최흥종 목사였어요. 그분을 만난 게 내 일생에 큰 행운이었어요.

그분은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 잘 안 알아주지만, 내가 증언을 해야 할 목사님이세요. 최흥종 목사는 상속받은 땅을 내놓고 나병환자들을 광주시내에서 생활하도록 했어요. 그러다가 나병환자들과 총독부를 찾아가 소록도 시설을 확충하도록 하고, 육지에 요양원 하나를 더 얻어내셨어요. 그래서 여수요양원이 생긴 거예요. 나중에 손양원 목사가 후임으로 오시게 되었죠. 그리고 나병환자 문제를 해결한 다음 폐결핵 환자들하고 사시는 거예요. 저도 거기서 일하면서 이러다 전염되고 때 되면 죽겠구나 하며 살았죠.

임락경 목사는 국민학교 졸업 후 이현필, 최흥종, 유영모 선생 등을 따르며 환자들을 돌보았고, 지금껏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강원도 화천 시골집에서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며 농사지은 콩으로 만든 된장과 간장, 직접 딴 벌꿀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집회 때 설교를 통해 이현필 선생을 만났죠. "참말로 행복한 사람은 집이 없습니다. 참말로 행복한 사람은 소지품이 없습니다. 참말로 행복한 사람은 두벌 옷이 없습니다. 참말로 행복한 사람은 속옷이 없습니다." 실제 그분은 메리야스 하나 하고 파자마 바람에 돌아가셨어요. 말씀대로 딱 실천하고 가신 분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들 생각이 나요. '아, 최흥종 목사님은 이렇게 했었다. 이현필 선생님은 이렇게 했었다.'


여수 애양원교회에 설교를 다닌 지 오래되었어요.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우리도 어디다 십일조를 내야 하는데, 저기 나병환자촌에서 선교비를 주겠다고 하면 다 싫어한다고 시골교회에 보내주면 받겠냐고 하셔서, 내가 받는다고 그랬죠. 받겠다는 생각이 쉽게 나온 거 같지만, '야, 이제는 나병환자들보다 내가 비참하게 살아야 되는데 이걸 내가 할 수 있겠나?' 그걸 받은 뒤로는 휴게소 비빔밥보다 비싼 밥은 안 사 먹어봤어요. 유영모 선생, 이현필 선생, 최흥종 선생 하신 것 다 따라서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 한 시간을 해야 한다, 내가 중학교 안 갔으니까 잠자기 전에 꼭 책을 봐야 한다, 앉을 때는 무릎 꿇고 앉자, 하루 한 끼 먹자, 이발소 가지 말자, 새 옷 사 입지 말자…, 전체 서른 가지가 넘었어요. 내가 지금까지 그대로만 했으면 이건 동양에 철인이 아니고 기인 하나 생겼을 거예요.

그러고 있는데 서른 살 때 백춘성 장로란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분 하는 말이 "나보다 젊은 사람은 무조건 선생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딱 무릎 끓고 앉아서,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적고 계셔요. 그분이 어떤 분이냐면, 어머님이 광주시내 부자였는데, 이현필 선생에게 감화를 받아서 유산을 이현필 선생님에게 양보하셨어요. 그 유산이 동광원이 된 것이죠. 그러고선 그 겨울에 숟가락도 안 들고 빈손으로 나간 거죠. 그리고 서울에서 한국공업소라는 회사를 20년간 운영했어요. 그 무렵에 저를 찾아오신 거죠. 그렇게 훌륭한 분이 무릎 꿇고 내 얘기를 적는다고…. 그 때 장로님을 만나고는, 내가 서른 가지 이상 정해놓은 그걸 그 자리에서 깼어요. 물론 다 깬 건 아닌데, '아, 이걸 밖으로 내세워서는 안 되겠구나' 했지요. 백춘성 장로를 안 만났더라면 나는 아마 어디 깊은 산속에서 기도하고 있으면서 '하루 네 시간 잔다, 절대 고기 안 먹는다…', 이러고 있을 거예요. 그 장로님 만난 게 내 일생에 큰 행복입니다.

오늘도 모내기를 하다 왔어요. 천 평이 넘는데 1년 농사지은 것이 재작년에 소 두 마리 길러서 판 돈보다 적어요. 내가 복이 없는 사람이죠. 4학년 때, '고기는 없어도 사는데 곡식 없으면 죽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쪽으로 가야 한다' 이 생각을 한 거예요. 저는 예수 직업이 농사꾼이라 생각해요. 예수가 비유를 들 때 자기 경험이 아니면 비유를 못 들어요. 씨 뿌리는 비유가 아주 적실했는데, 돌밭에 나온 씨는 말라비틀어지고, 가시떨기에 나온 건 크다가 죽고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혹 100배 맺는다는 뭔 얘긴가 하고 4학년 때 논에서 새를 쫓다가 벼 이삭을 세어봤어요. 그랬더니 정말 아주 못 된 건 30개, 중간 건 한 60개, 잘된 건 100개…. 예수가 밀 이삭을 세어봤나 봐요. 대충 숫자놀음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벼 이삭을 세어보고서 확실히 알았어요. 농사꾼 예수의 직업을 따라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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