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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시대를 깨우는 스승의 외침

"하나님, 일평생 현장 떠나지 않겠습니다"
평생 노동운동하고 땅 살리는 현장에 간 조화순 목사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상록수>에 감동받아 농촌계몽운동을 하겠다 마음먹고 학교 선생을 했어요. 그렇게 간 시골이, 내가 생각했던 시골이 아닌 거예요. 남자들이 농사는 쬐끔 지어가지고 다 노름으로 탕진하고, 여자들 패고…. 근본적인 게 바뀌지 않으면 문제가 너무 많은 거예요. 거기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다가 오명걸(본명 조지 오글, 1962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개척)이라는 미국 선교사를 만났어요. 이분이, 산업사회 속에서 노동자들이 희생당하는데 이들을 선교하려면 젊은 여자목사가 꼭 필요하다고 저를 설득하는 거예요. 나는 부잣집 딸이었어요. 대접만 받았고, 한 번도 설거지를 해본 적이 없었어요. "미쳤냐? 내가 왜 공장에 가느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그 양반이 "노동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안 하겠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제가 갈게요" 했어요. 예수 믿으면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서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이라고 1,200명이 있는 섬유회사예요. 1966년에 신분을 감추고 공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오명걸 선교사 말이, "당신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공장에 하나님이 오셔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입 다물고 겸손하게 일만 열심히 하라는 거예요. 나는 반박하기 싫어서 "알았다"고 해놓고는 속으로는 '아니야' 그랬어요. 전도를 하려면 옆사람하고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몰래몰래 말을 거는데, 누가 호루라기를 '삐' 부는 거예요. 반장이 "저 여자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건방지게 말이 많아!"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내가 대학교 나오고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산업선교고 뭐고…. 그런데 별안간 '네가 목사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때 내가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 되기에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리고 콧물, 눈물이 범벅이 돼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 나도 모르게 약속을 했어요. '하나님, 이 가난한 노동자가 아픔 당하는 이 현장을 내 일생 동안 떠나지 않겠습니다.' 나도 몰라.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조화순 목사는 1966년부터 산업선교 현장에 뛰어들어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예수 정신으로 운동했고, 1983년 인천 달월교회로 돌아와 13년간 목회를 했다. 정년을 8년 남긴 1996년 은퇴를 선언하고 강원도 평창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현장에, 마구간에서 하나님이 태어났어요. 나는 노동자들에게 "예수는 노동자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하고 가르쳤어요.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억울한 현장에 있어요. 자기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 살 수가 없는 그런 현장.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십자가를 같이 지는 분이 오늘의 예수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요새도 문제 많잖아요. 난 새벽마다 신문 보면서 우는 게 일이에요. 전에는 막 분해서 욕을 했어요. 그런데 이젠 욕이 안 나와요. 가슴이 타요. 여기가 이렇게 타는데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다리로 가야 되는 거예요. 현장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현장에 가면 뭐합니까? 기도하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자 그러고 거기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힘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가 뭔지 알아요? 위에서부터 아래, 만나는 거 이게 십자가예요.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하면 별안간에 풍덩 빠지는 거 같아요. 그럼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나는 간 곳이 없어요. 기도는 버리는 거예요. 자기에 대한 욕망, 그걸 버리는 게 기도라고 생각해요. 난 일생 동안 한 번도 뭘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차도 없고 컴퓨터도 안 해요. 조화순 하나만이라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상한 똥고집이 있어요. 내가 재작년부터 독거노인으로 확정 받았는데, 한 번도 돈이 없어서 못 살아본 적이 없어요. 진짜 재미있어요, 하나님 정말 믿으면….

내가 예순한 살 되던 해에 은퇴를 했어요. 감리교 신학대학원 나와서 자리 없는 목사가 3천 명이래요. 나라도 빨리 관둬야지 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내가 결단을 잘해요. 운동을 18년 하다가 시골 교회로 돌아가니까, 다들 되리라 생각을 안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 거예요. 일생 동안 농사만 지어서 허리가 꼬부라진 할아버지들 보면 난 가슴이 미어져요. 길 가다가 괜히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런데 진심은 다 통해요.

한 번은, 내가 요시찰 인물이니까 교회를 하는데도 안기부에서 이놈들이 와요. 뭘 또 조사할 게 있으니 연행해 가겠다고. 내가 "미쳤냐? 안 가!"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부목사가 얘기해서 장로님 다섯 분이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까지 데려가쇼" 그러는 거예요. 조금 있으니까, 교회 마당에 동네 사람들과 교인들이 꽉 차서 "우리 목사님 데려가려면 우리 다 데려가라"고…. 그때 그 뿌듯함은 아, 이게 목회하는 맛이구나 싶었어요.

내가 시골을 왔잖아요. 해방신학 한다, 여성신학 한다, 통일신학자다 그러는데,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이제 마지막 남은 게 땅을 살리는 운동, 생명신학이에요. 이 땅이 다 죽어가고 기후가 바뀌는데, 땅을 살려놓아야 되잖아요. 교회가 그걸 해야 해요. 살아서 천당을 살지 않는데 죽어서 어떻게 천당 갑니까? 삶이 따라오지 않고 입으로 하면 설득력도 없고 감동을 주지 않아요. 예수처럼 살자. 예수가 고난의 현장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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