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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이 짓밟지 못한 베트남의 지혜, 그들의 기억

 

베트남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날적이
 
[1일차] ‘전쟁’과 ‘여성’에 대하여

 

 
 
베트남을 향한 제국주의 침략 속에서 굳건히 그 자리를 쟁취해낸 여성들을 기억하는 남부여성박물관에서 베트남에서의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남부여성박물관은 통일 이후 전쟁 참여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모임을 해가던 중 관이 아닌 민 주도로 박물관을 만들자는 마음이 모여, 각지의 후원금을 모아 만들었습니다.
 
박물관의 첫 이야기는 베트남 역사 속 외세(중국)에 대한 첫 반란을 일으킨 코끼리를 탄 쯔엉 자매의 벽화 였습니다. 중국과 프랑스, 미국과 한국 등 수많은 억압과 침탈이 계속된 베트남의 상황 속에서 독립과 해방을 향한 얼이 한 벽면에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싸움의 이유가 정당하였기에 그들은 나가 싸웠고, 여러 어려움을 지났지만 독립과 통일을 이뤘습니다.
 
남부여성박물관 내에 전시된 사진들.
 
전쟁 참여가 총을 드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고통의 시기에 육아하고, 살림하는 여성도 결코 소외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박물관 곳곳에 담긴 사진 속 굳건하며 당당한, 때론 원통한 얼굴이 그들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성 관념으로 고착화되지 않는 생명으로서의 분투가 박물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각해보니, 여성의 역사를, 여성의 입장으로 적어놓은 박물관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간 가부장 문화 속 여성은 착취 대상으로 그려졌는데, 여성의 입장으로 전시를 꾸리니 여성은 쟁취의 주체였습니다. 긴 싸움이었지만 억압을 뚫고 여성의 언어를 찾아 써내려간 역사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생명으로서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2일차] 비무장 영세중립 생명평화의 땅
 
베트남 기도순례 길벗들.
 
구찌 땅굴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 전략인 게릴라전을 위해 파놓은 땅굴입니다. 길이가 무려 250킬로미터이며, 깊이는 8미터로 3층 규모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노력과 지혜를 결집해 만든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삶터를 순례하면서, 결집된 지혜가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잔혹하게 살해가 이뤄졌다는 생각에 미군의 고통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릴라전, 수풀이 우거진 전장에서 언제 어디에서 나올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미군들은 지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피로감은 더해갔고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주도한 전쟁과 침탈 속에서, 그 안에 군인 개개인의 사정은 지워졌습니다. 부유층이 아니란 이유로, 대학에 안 갔다는 이유로 강제 징용된 이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통로였던 이들, 거짓 선전에 선동된 이들 등 사연 없는 군인이 없었습니다. 전쟁은 생명을 고갈시켰습니다.
 
무고하고 원통한 죽음을 낳을 수밖에 없는 전쟁을 멈출 방법은 개인의 의지와 더불어 ‘국가가 지향하는 바’가 명확해야 해결될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 ‘비무장 영세중립’은 이 지점에서 꼭 필요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국가 없는 개인을 지향할 수 있지만, 실제 삶의 연관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가피한 전쟁은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지 않도록 기도순례에 마음 모읍니다.
 
비무장 영세중립 생명평화의 땅, 구체적인 기도제목으로 기도순례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깨달음, 하나된 남과 북의 비무장 영세중립을 넘어 온 국가의 비무장 영세중립으로 더 큰 소망 품게 됩니다. 기도문 중 ‘생명평화 샘물을 온누리에 전하는 땅 되게 하소서’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하루입니다.
 
 
[3, 4일차] 미안해요 베트남, 기억해요 베트남
 
하미 위령비 앞에서 가진 생명평화 기도회.
 
베트남전쟁(항미전쟁, 미국전쟁) 당시 한국군도 학살 가해자였습니다. 마을에 사는 여자와 노인, 아이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가무덤 위를 생존자가 보란듯이 불도저로 짓밟는 만행도 저질렀습니다. 부서진 뼈들을 그들은 눈물흘리며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중부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하미 위령비와 퐁니퐁넛 위령비로 순례 이어갔습니다. 죽은 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빼곡히 적힌 돌판을 먹먹히 바라보며, 향을 피워 예를 갖춰 마음 모아 사죄했습니다. 생명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기도드렸습니다. 위령비에서 학살 피해자와의 만남도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고통에 가까이 가기조차 어려웠습니다.
 
하미 마을 피해자분께서 학살 당시 당신은 발을, 자녀 몇을 잃었다고 하시면서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국가가 한국과 교역을 시작하고, 한국인들과 현재와 미래를 지향하는 친구가 되었는데 원한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이야기하셨습니다. 나이가 먹는다고, 누군가가 사죄한다고 쉽게 치유될 상처가 아닌 것을 알기에 마음에 꼭꼭 숨겨져 있는 원통함을 만나는 것 같아 더 미안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위령비에 새겨진 아들의 이름을 어루만지셨습니다.
 
퐁니 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님.
 
퐁니 마을 피해자 분은 당시 여덟 살이셨는데 수류탄으로 인해 당신의 창자가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동생의 고통에 대처하지 못해 떠나보낸 그때 생각에 미안함의 눈물 보이셨습니다. 평화 기행을 오는 한국인들에게 당시 상황을 여러번 회고하지만 매번 고통스럽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에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퐁니 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님.
 
하미 마을 고 팜티호아 할머니 집에서는 준비해온 평화를 향한 노래들로 작은 소리 꾸렸습니다. 작은 소리를 잠잠히 들으시던 팜티호아 할머니의 아드님께서는 고마운 마음 전해주시며 전쟁 당시 불리던 그리움의 노래 두 곡을 우리에게, 또 지금은 하늘에 있는 어머니에게 불렀습니다. 아드님은 전쟁 이후 불발탄 사고로 시력과 손가락을 잃으셨습니다.
 
베트남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하면서 그들의 기억하는 방식을 계속 만납니다. 전쟁을 마치고 수개월 만에 만든 전쟁 박물관은 전쟁 승리기념관이 아닌 그저 피해의 사실과 고통을 고스란히 담아둔 곳이었습니다. 학살이 이뤄진 마을에는 증오비를 마을 중앙에 세웠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위령비로 기억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자장가로 불러주면서 자신들의 마음을 다잡고, 아이들에게 역사를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해방과 통일, 새로운 시대을 살아가는 베트남인들은 이전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닌 오히려 더 철저히 기억하여 새 시대의 토대를 우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기억을 숨기고 부정하며 왜곡하는(분단으로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상황을 떠올리며, 정성껏 기억하는 일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일임을 베트남인들의 지혜로움을 통해 배워가고 있습니다.
 
 
[5일차] 베트남, 온 생명, 마을
 
베트남 기도순례에 함께한 아기들.
 
베트남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첫날, 마을에서 함께 지내는 세 살 조카가 공항에 있는 전광판을 보고 “저 삼촌은 누구예요?” 묻길래 보니 베트남 사람이었습니다. 두 살 조카는 입국심사 줄에서 베트남 친구를 만나 마주보고 웃으면서 어울려 놀았습니다. 민족이라는 상을 깨트려 보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도순례 마지막날 버스에서 아침 열며 함께 마음 모으는 시간에 기도순례 길벗이 “베트남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과 자연, 역사가 민족을 넘어선 한 생명임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민족과 국가 경계가 생명들의 살아 있는 삶을 만날수록 무의미해졌습니다. 온 생명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성서의 구절이 경계없이 사귐을 갖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 땅에 온 예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된 예수, 죽음과 부활의 그 삶을 돌아보면 경계없는 삶이었습니다. ‘온 생명’이란 말이 관념으로 남지 않도록 ‘나’라는 경계를 넘어선 사귐을 정성껏 해가는 것임을 베트남에서 마지막 날 함께 기도순례하는 길벗들 통해 알아갑니다.
 
베트남 비무장지대 안에서 땅을 지키며 살았던 이들의 터전인 빈목터널로 걸음 향했습니다. 비무장지대에 가한 무차별 폭격하에서 3년에 걸쳐 이들은 땅굴을 파서 삶의 터전-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의 지혜는 생각을 끝까지 하며, 정성을 다하는 삶에 있었습니다.
 
폭격에 대한 가장 큰 대응은 식의주락과 교육을 할 수 있는 대안적 삶터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성을 갖고 긴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밥상과 옷 수선소, 인쇄소와 수술실 등을 지었고, 아이들을 교육하며 어른들도 생활기술 등을 공부했습니다. 땅 위에서는 폭격을 피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루를 마칠 땐 함께 모여 노래하며 춤추었습니다. 낙관을 잃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마을에 터한 삶은 무엇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주었습니다. 삶의 기반이 있으니 긴 싸움을 넉넉하게 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의 삶터인 마을로 향합니다.
 
문영주 | 아름다운 사람들과 일상을 보내며, 흙을 조사하는 직장에 다니는 20대 청년. 길벗들과 기도순례 다니며 생명평화 노래하고, 깨달은 바 삶으로 녹여내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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