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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우리학교
흩어진 겨레 생명평화의 땅으로 하나되길

일제강점기 구조적인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 모진 역경과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재일조선인 1세대.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해방될 조국을 생각하며 시절을 견디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1945년, 조국 해방의 날을 맞이했지만 그들은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해방조국은 곧바로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연합군사령부의 무관심과 일본의 방해 속에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일단 국어강습소를 세워 2세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재일조선학교의 원형은 그 국어강습소에 있습니다.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재일조선인 4, 5세들은 여전히 조선학교에서 민족의 말과 글, 민족의 얼을 전수받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북아 생명평화운동을 공부하는 이들이, 일본 지바조선학교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두 분이 밝은누리까지 먼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5월 28일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 님이 홍천 밝은누리움터 학생들에게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아래는 두 분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여러 가지 이유로 탄광이나 터널을 파는 힘든 일을 할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도 못 드리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트럭에 탔다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탄광에 오게 된 이들이 적지 않다. 남편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와 자녀들이 먼 이국땅까지 따라온 경우도 있다. 이들은 새벽 4시 반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도망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잡혀 갖가지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재일조선인 1세들은 나라가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해방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45년 8월 24일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항구로 모여들었고, 조선으로 가는 일본 군함대에 오른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배가 항구를 떠나고 이틀 뒤 폭발사고로 침몰해버린 것이다. 3700여명의 조선사람이 탔던 배가 한 순간에 침몰한 것이다. 그래서 조국에서 귀국선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쳐야겠다 생각하고, 국어강습소부터 시작했다.

재일조선인들은 우리 말과 글, 우리의 얼을 배울 학교를 스스로 세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교를 ‘조선학교’ 또는 ‘우리학교’(이하 우리학교)라 부른다. 사실 일본으로 끌려온 이들의 98%가 남한지역 사람들이었다. 경상도가 가장 많았고,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 순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서는 재일조선인들에게 무관심했고, 오히려 ‘북’에서는 원조금, 교과서, 예술분야, 교육분야에서 많은 지원이 왔다. 1세대 2세대들은 ‘남’쪽에 서운한 심정도 들었지만, 우리학교를 ‘북한 학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 된 조국의 학교로 생각했다.


64년생인 김박미 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쓰는 ‘우리학교’에 다녔다. 일본에서 생활하며 ‘김’이라는 성을 쓰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학교를 가면 ‘김’이란 성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모두가 우리 이름으로 쓰고,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한글을 배웠다. 우리학교에서 배운 중요한 가치는 ‘조국’이었고, ‘통일 조국의 역군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남’도, ‘북’도 우리 조국으로 배웠다.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받고 살고 있지만, ‘우리학교’를 통해 이들은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며 “동무들, 이제 우리는 통일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을 들려주셨다. 그런 정서와 정신을 배우고 우리 얼을 지켜오려 노력했다.

재일조선인 중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경제, 교육, 문화, 복지,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차별’은 재일조선인들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 북한 ‘미사일’, ‘핵’ 보도가 뉴스에 나오면, 일본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미사일, 미사일’ ‘대포동 대포동’ 하며 놀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나라의 학교를 세금을 써가며 왜 지원하느냐 생각한다. 현재 ‘우리학교’는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달마다 내는 학비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일본은 모든 외국인학교에 대해 무상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우리학교’만 제외하고 있다. 일본 전역에 7개의 고급부 ‘우리학교’가 있는데, 금요일에 학생들이 수업을 끝나면 도쿄 문부과학성에 가서 고교무상화를 위한 시위를 7년 째 이어오고 있다. 일본인 중에서도 양심에 따라 아이들 교육에 똑같이 지원해야 한다며 함께 목소리를 내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고 한다.

김박미 님과 김행대 님은,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부당한 차별과 눈초리가, 갈라진 조국 현실 때문임을 알기에, 남한 내에서도 편견과 오해에 사로잡혀 적대시하는 이들,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안타까워한다. 분단의 비극을 끝내고, 흩어진 이들과 이 세대가 함께 만나고, 교류하며 새 역사를 써갈 준비를 해가길 바란다.

고영준 | 갈라진 땅의 아픔과 슬픔이 치유되길 바라며, 이 땅 곳곳에서 생명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길 기도하며, 홍천에서 좋은 이들과 마을을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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