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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 역동적 변화와 희망 떠오르는 곳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참가자들은, 달마다 순례지에 자연스레 모여 온누리 생명평화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생명평화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로 연구 발표도 하고, 여러 모습으로 생명평화를 일구는 이들도 찾아가 만납니다. 이번 호 〈밝은누리〉에는 ‘만남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탐방ㆍ연구 모둠을 이룬 청년들이 제주 가장자리농원을 찾아가 만난 이야기를 싣습니다(편집자 주).

3월 기도순례 지역은 제주. 제주에서 누구를 만나지? 좋은 분들을 만나고 싶은데, 마땅히 아는 사람이 없다. 모둠을 기획한 형이 ‘가장자리 농원’에 방문하자고 한다. 어떻게 거길 알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 형은 귤 먹을 때 껍질도 함께 먹는데, 귤 껍질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자연재배 귤을 우연히 찾았다고 한다. 생산자 분과 전화 주문하다가 좋은 인상을 받았고,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이번 제주 순례 때 만나기로 했단다.


그분이 ‘자연친구 생태텃밭’을 하시는 오연숙 님이다. 오연숙 님은 4년 전부터 ‘청정제주농업’이라는 이름으로 10여 명이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씨앗도 나누며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농약이나 화학비료 뿐 아니라 비닐도 안 쓰고, 기계까지도 최소화하여 하늘땅살이(농사)하는 자연재배 모임이다. 모임 위원장인 박성인 님과 함께 만나기로 했다.

가장자리농원은 노형동에 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시내다. 시내에 어떻게 이런 농원이 있는지 의아하게 느끼며 찾아갔다. 눈에 잘 띄지 않아 좀 헤매기도 했다. 커다란 송전탑을 끼고 들어가니 넓은 밭이 보였다. 어렵게 찾아간 농원에서 오연숙 님과 박성인 님 두 분이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셨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제주가 고향인 박성인 님은 1982년 여름, 제주를 도보여행하면서 4.3사건에 대해 눈뜨게 되셨다. 당시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자료가 없었고, 번역해가며 4.3 알리기에 참여하셨다. 생존자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와 그 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모습을 인식하게 된 게 계기가 되어 그 이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셨다. 자녀를 키우며 대안교육공동체에도 함께 하고,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도 8년간 운영하다가 6년 전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시작하셨다.

자연농법, 하지 않아야 할 것 하지 않는 것


밭을 둘러보며 농사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박성인 님이 하는 농법의 핵심은 ‘안 하는 것’에 있다.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해야 할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안 하려고 하면 먼저 자연을 잘 알아야 하는데, 자연을 안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어서 배우고 겪어야 할 일이 많다고 한다. 계속해서 농원에 적합한 작물을 중심으로 작부체계를 짜가고 있고, 이제야 풀과 병해충에 속수무책 당하지 않는 6년차 초보농부라고 소개하신다.

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방치와 다르다.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작물에 대해, 땅에 대해, 검질(잡초)과 버렝이(벌레)에 대해 이해하고 그 관계성을 깊이 파악할 때, 자연 그대로 생태계를 이루며 작물 스스로 자라가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이 작물이 가지고 있는 자기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자라나는 아이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마찬가지다. 밭생명과 마찬가지로 아이 역시 무엇을 해줄지가 아니라 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그렇게 자기 잠재력과 문제 해결의 능력을 믿고 기다려줄 때 성장과정 속에서 내적 힘을 길러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각자의 생명이 가진 자기 고유의 잠재력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생명을 생명답게 대하는 첫 출발이겠다. 대화를 나눌수록 생명을 깊이 이해하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밭 한 켠에는 여러 해 묵히고 있는 오줌이 있었다. 그 옆에는 음식 부산물을 모으는 통도 있었다. 오줌과 음식부산물을 퇴비로 활용하고, 비닐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 토박이씨앗을 나누고 채종하는 건 사실 밝은누리에서는 늘 보는 모습이다. 아이를 기르듯이 농작물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며 정성껏 대하는 자세도 낯설지 않다. 다만 이러한 모습을 그동안 교류 없이 처음 만나는 분에게서 마주했다는 데에서,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제주, 변방을 넘어 가장자리로


‘가장자리’ 철학에 대해서도 들었다. 변방은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그래서 중앙에 의해 억압당하고 수탈당하고 고통당하는 곳이라면, 가장자리는 두개의 면이 만나는 자리다. 생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 가장자리에서 창조와 변화가 생겨났다. 서로 다른 생태계가 교차하는 지점, 두 세력, 두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늘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제주 역시 중앙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한반도의 변방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가장자리의 관점에서 보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만나는 곳, 중국과 미국이라는 제국의 힘이 대립하는 곳, 자본의 욕망과 대안적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다. 가장자리 이야기를 들으며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 위치한 가장자리농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지금 제주에는 강정마을, 제2공항, 난개발 등 자본이 위협적으로 몰려오고 있다. 가장자리농원은 그 이름처럼 가장자리에서 치열하게 생명을 만나며 대안과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해가고 있다.

학생심, 세대를 뛰어넘는 배움의 자세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밝은누리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다. 우리가 미리 전해드린 소개글을 다 읽고, 관련된 질문을 하셨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어떻게 이어져올 수 있었냐면서 그 힘을 무척 궁금해 하셨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의견 조율해가는지, 갈등은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으셨다. 이야기를 나누며, 밝은누리 역시 가장자리에 서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와 감동이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앞으로 더 깊은 만남이 기대된다.

예순의 세월을 보내셨음에도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에 진지한 배움의 자세로 경청해주신 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상대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듣고, 들은 이야기를 자기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다시 질문하는 모습 속에서, 청년 같은 뜨거운 학생심을 느낄 수 있었다. 청년시절부터 이어온 4.3 관련 활동과 노동운동, 대안교육운동, 그리고 오늘의 자연농은 바로 이 학생심을 바탕으로 생명과 깊이 소통하며 관계를 맺어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4.3, 순이삼촌과 송령이골

한편 4.3사건을 해석하고 접근하는 관점이 남다르셨다. “이제는 순이삼촌을 넘어 송령이골을 기억하자” 하셨는데, 송령이골은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4.3을 피해와 고통으로서만 기억할 게 아니라 민중항쟁으로써 재평가하자는 말씀이다. 해방 직후 제주에서는 자치와 자립의 삶, 통일된 나라를 만들자는 열망이 있었다. 하지만 4.3으로 인해 그 꿈은 아스라이 흩날려졌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그 꿈을 오늘 되살리기 위해 4.3을 새롭게 바라보자고 강조하셨다.

4.3은 7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잘 풀리지 않는 질곡이다. 수천 명이 행방불명되고, 수만 명이 죽은 엄청난 참사다.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고, 갈등이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만약 남과 북이 총부리를 내려놓고(비무장 영세중립), 하나되어(통일) 서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열리면, 그렇다면 이 뒤엉킨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4.3은 분단된 우리 현실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참담한 역사다. 그 반목과 원통함을 풀어가는 길이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의 걸음과 맞닿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자리농원에서의 만남은 기도순례의 의미를 분명히 새기고, 반가운 길벗도 만나는 소중한 사건이었다.

만남과 연대(동술, 두영, 재원, 준석, 혁락) | 각 지역에서 생명평화 일구는 분들 만나며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하는 모임입니다. 순례 때마다 다섯 명이 함께 먹고 자고, 공부+토론+글쓰기합니다. 만남과 모임을 통해 관계를 더 넓고 깊게 맺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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