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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힘에 대한 도덕적 압력은 비무장입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 인터뷰

밝은누리는, 가치(신앙)와 삶이 모순되지 않고 가치를 삶으로 살아내는 생활영성수련, 그리고 농촌과 도시가 서로 살리는 농도상생마을공동체를 일구어왔습니다. 밝은누리가 그동안 해왔던 사역이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요?

통일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영세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주제로 꿈꾸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농촌으로 분립을 준비할 때였어요. 생명평화, 통일이라는 주제는 매우 큰 담론이기 때문에 자칫 관념화 될 수 있어요.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자기가 품고 있는 관념을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명평화’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에서 시작해요. 생활영성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 되고, 이를 토대로 나와 네가 더불어 사는 생명살림터가 ‘마을’입니다. 농촌과 도시를 오가는 마을공동체 삶을 실제로 살아가면서, 소외되고 단절된 농촌과 도시가 상생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구나,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의 양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남북이 하나 되는 것에 대한 훈련으로서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사는 삶을 먼저 경험한 것이지요.

10년이 지나 2017년 가을 밝은누리 한마당잔치를 하면서 우리의 꿈과 바람으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2017년 가을, 곧 전쟁 날 것처럼 위기가 심화되었을 때 전혀 다른 평화의 바람이 시작된 것이라 생각해요.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남과 북의 통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우리 사회 갈등과 대립을 야기하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폭넓게 짚어주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제와 전쟁, 분단독재를 거치며 주인 된 역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일제 청산 없이 이뤄진 현대사는 기회주의를 삶의 결정적 처세로 정착시켰고, 왜곡된 역사는 식민사관과 사대주의라는 얼빠진 병을 양산했습니다. 역사와 문화, 생활양식 곳곳에서 얼빠진 삶이 구조화되었습니다. 주인 된 성찰 없이 이뤄진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는 문명과 삶의 총체적 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 생명까지도 상품화시키는 반생명 문화는 생명감수성을 잃게 만들고, 더불어 사는 삶, 가족과 마을을 파괴시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 전쟁과 생태계 파괴라는 20세기 비극을 아직도 우리는 짊어지고 살고 있어요.

우리 통일이 20세기 끝자락을 잡는 통일이 된다면 너무 서글픈 일입니다. 역사는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이 땅에 담긴 역사의 큰 뜻은, 20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을 짊어진 이 땅이 새로운 생명평화를 증언하는 땅으로 부활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남북이 정치사회적으로 하나되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마을,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생태라는 주제가 맞물리는 통일이 될 때, 21세기 새로운 생명평화 문명을 잉태하는 씨알이 될 거라 생각해요.

우리 근현대사 100년을 돌아보면 가슴 아프고 해결되지 못한 원통함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기도순례는 한라에서 백두 넘어 만주와 연해주, 중앙아시아 곳곳 원통함이 서려있는 현장을 순례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치유하셔서 하나 된 대한민국과 조선이 생명평화를 전하는 땅으로 다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함께 하는 길벗들이 각 지역에서 개인 순례일정을 정해 기도하고, 지역의 큰 아픔과 원통함과 한이 서려있는 묘지들과 그 땅 생명들의 꿈과 한이 서려있는 산과 바다와 강에서 모두 모여 기도해요. ‘생명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읽고, 기도문으로 만든 노래를 부르며 기도해요.

분단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통해 어떻게 차이와 갈등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오래된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는 게 새로운 것의 출발입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이 합의했던 선언문의 통일원칙을 살펴보면, ‘자주’와 ‘평화’ 원칙을 견지해왔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 노태우의 7·7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과 김정일이 합의한 6·15남북공동선언, 노무현과 김정일이 합의한 10·4남북공동선언까지 일관되게 ‘자주, 평화’라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어요. ‘군사적인 대립을 종식하자’, ‘상호체제를 인정하자’, ‘자주적으로 평화롭게 통일하자’는 원칙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통일을 책임 있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모두 합의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엄청난 이념적 차이 때문에 통일정책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고, 보수가 되었든 진보가 되었든 이 땅 역사 속에서 공통의 상처와 아픔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주4·3사건에서 백성들을 탄압했던 사람들이나, 한국전쟁에서 평화를 위한 마음으로 먼 이국땅에 와서 전쟁에 참여해 유엔기념묘지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 전쟁과 분단체제 속에서 이편이나 저편을 다 통틀어서 가지고 있는 공통의 원통함, 공통의 풀어야 할 한이 있습니다.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전문가나 학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만이 풀 수 있습니다. 공통의 원통함과 상처가 만들어내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방어하기 위해 더 강력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식의 왜곡들, 거짓과 기만의 재생산이 있습니다. 해원을 통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사람들에게 이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총 쏘는 사람이냐 저기서 총 쏘는 사람이냐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념의 도구가 되어 죽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죽음은 이념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순례에서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고쳐주소서 라고 해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이 현안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서는 비핵화와 동시에 비무장 영세중립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무장 영세중립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와 구상을 설명해주세요.

‘중립’이란,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 충돌과 분쟁이 생길 때, 어느 한 편에 서서 분쟁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를 영구적으로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것이 ‘영세중립’인 거죠. 중립국 중에는 군대를 갖는 나라도 있고, 상비군을 없애고 중립을 지키는 나라도 있습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군대가 있는 중립국입니다. 스위스는 200년 이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영세중립국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치에게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나치가 망하자 전범국가 중 하나가 돼 버립니다. 2차 대전 승전국가인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처럼 분단시키려 할 때,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마음을 모아 중립을 선언하고 4개 국가가 인준하는 방식으로 된 사례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국가인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분단된 것은 철저하게 주변 제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독일에 합병되었던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위기를 영세중립으로 넘어섰던 것은 우리가 참조할만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선례입니다.

또 주목해야 할 나라는 코스타리카입니다. 300년 이상 식민지배를 받았고 독립이 되고 나서도 수차례 내전이 벌어지다가 내전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이 군대를 해산하겠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고 그걸 의회가 인준했어요. “우리는 나라를 다시 세우고 제대로 된 독립을 하기 위해 사람을 키워야 하고 복지와 교육에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국방비에 지출할 여력이 없다”는 거예요. 주변 국가들의 내전도 많았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비무장이라는 도덕적 힘을 토대로 영세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이후 벌어진 중남미 분쟁들에서 코스타리카는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평화를 이끌고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해요. 강력한 군사력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거의 대부분 나라가 전제하는 안보논리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안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와 남북 간 무력 대치가 심각한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각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군사력, 군비경쟁을 통한 안보와 평화라는 전략은 지금껏 온갖 거짓과 비리, 더욱 격해진 갈등과 불신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남북이 함께 군대를 축소 폐지하는 비무장 비핵 영세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조선 통일방안이 추진되어야 합니다. 한겨레 모두 마음을 모아 비무장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경험한 나라들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함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국제협약에 따라 대한조선 영세중립국의 정치적 자립과 통합을 영구히 인정하고, 동북아 평화를 약속해야 합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이를 보증하고 유엔평화기구를 판문점에 설치하여 한반도 평화를 함께 지켜갑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서 영세중립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세중립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상적인 게 아니고, 가장 현실적인 겁니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리 미래를 자주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종전선언을 하고, 북미수교를 하고나면, 미국이 동북아에 있을 명분이 없어요. 미국이 분단체제 극복에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미국 입장에서는 명분 있게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어떤 ‘평화체제’가 필요해요. 대립과 갈등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역할로서 ‘주변국들이 함께 지켜갈 어떤 평화체제’가 필요한 겁니다. 물론 우리의 자주성과 미국, 중국의 이해관계, 일본의 불안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이 되겠죠. 그 ‘평화체제’가 결국 ‘영세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인 겁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유일한 길입니다.

거기에다 ‘비무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이유는,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라는 제국의 거짓 평화에 대해 도덕적 압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정치현실을 지배하는 부당한 힘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 선택 가능한 것을 체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압박하는 기도입니다. ‘영세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가 전 지구적인 반핵, 반전, 군대감축을 추동하도록 하는 겁니다.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곳곳에서 전쟁하고 있는 제국들이 돌이키고, 참 평화가 넘쳐나길 구하는 기도입니다.

지역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바이칼호수 등 요하문명 유적지를 탐방하고, 동북아 생명평화공동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명의 뿌리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일제와 분단, 전쟁과 냉전으로 우리 근현대사는 심각한 왜곡과 갈등을 겪었기에, 이 시기에 형성된 어느 한 쪽의 생각과 체제로는 참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참혹한 폭력과 전쟁을 토대로 둘 중 하나를 없애고 이루려는 평화는 끔찍한 ‘제국평화’입니다.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처와 불신이 너무도 깊기 때문입니다. 일제로 인해 왜곡되기 이전의 역사에서 희망의 씨알을 다시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쟁과 분단갈등으로 깊어진 상처와 불신이 구조화되기 이전 역사 속에서 희망의 물줄기를 샘솟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담은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깝게는 일제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조선 말기, 멀게는 고려와 백제, 가야와 통일신라, 발해와 부여, 고구려, 단군조선과 환웅배달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물길을 길어 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모두 현재 극단적인 대립 속에 빠져 있는 양 진영이 모두 공유하는 역사이며, 함께 지켜가고자 하는 문명의 유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고대문명을 개척하고, 인류문화를 선도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잊은 채 뿌리 깊은 식민사관과 사대주의문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배층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사대주의 역사관과 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뿌리 깊은 정신 질병이 되었습니다. 주체로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제국의 영향 속에서 분단과 전쟁, 냉전을 겪어온 우리는 아직도 얼빠진 고통과 허망한 갈등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기회주의 처신이 삶의 현실적 지혜로 강력히 자리 잡았습니다.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줏대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주체적 자각, 지조와 정절로 겨레 역사와 얼을 지키고 인류와 온생명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삶과 얼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양학문 중심의 과도한 사대문화와 사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안이 아니라, 그들이 앞서 만들어낸 산업문명과 자본지배 문화의 폐해를 분석하는 정교함과 정직한 반성입니다. 제국주의시대를 거치며 그들이 전 세계에 강요했던 문명이 생명평화를 담보할 수 없고 죽임을 앞당기는 문명이라는 양심 있는 고백입니다. 주체로서 성찰하지 못하고 헛된 환상으로 조급하게 내몰렸던 우리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냉철함과 정교함이 필요합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진행되는 동안, 공동체지도력훈련원과 삼일학림 청년학생들과 함께 <묵자>를 공부하고 있는데, 동북아 생명평화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계승하려고 하는 사상적 토대, 교육운동은 무엇입니까?

중화사대문화와 일제식민사관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 겨레 고대역사와 사상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늘땅 생명이 창조되었던 태곳적 기억을 간직한 겨레 문화와 말글에 담긴 얼을 소중하게 배우고 이어갑니다. 지배윤리로 전락하거나 관념화 되어버린 유학 본래 가르침을 분별하고, 노장과 묵가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배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때 대륙의 다양한 사상을 합류시켜 새로운 사상을 창조했던 송대 신유학은 조선왕조 500년 운명과 함께 그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 거대한 문명 전환기에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매우 강력한 창조적 영감과 실천윤리를 제시하며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유불선의 본류를 회복하고, 서학의 문제의식을 주체적 자각과 창진성으로 꽃피운 동학을 비롯한 다양한 실천적 사상운동들도 망국의 아픔을 변혁의 희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문명을 개벽하는 웅장한 전망을 품고 신음하는 백성과 뭇 생명을 구하는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만주를 중심으로 끈질기게 전개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은 잊을 수 없는 현대사의 근간입니다. 교육을 통해 겨레를 구하려 했던 명동학교는 명동마을을 토대로 가능했고, 오산학교는 용동마을에 터해 가능했습니다. 농민을 역사 주체로 일깨우는 농군학교는 가나안이상촌 운동을 뿌리로 합니다. 명동학교 김약연은 윤동주와 문익환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은 짙은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습니다. 오산학교 유영모의 창조적 지성은 이현필의 동광원 영성과 만났고, 여운형의 못다 이룬 자주독립의 꿈은 김용기의 가나안이상촌 운동이라는 씨알을 남겼습니다. 용정에서 꿈을 키운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꽃피우고, 여성숙과 만나 디아코니아자매회를 잉태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농과 생명살림, 노동과 기도, 지성과 영성, 자기 규율과 자유, 마을과 겨레, 사랑과 평화를 하나로 구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육 해방 평화라는 것은 메마른 제도나 추상 관념이 아니라 몸이 속한 구체적 현실, 더불어 사는 마을에서 선취되고 증언되는 살아 있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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