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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에서 인수마을까지
동무들과 통일 꿈줄기 잇던 날

통일 할아버지로 불리는 문익환 목사님의 큰딸이자 통일의집 관장, 문영금 님이 인수마을 초등배움터에 학생들을 만나러 오셨어요. 명동마을에서부터 인수마을에 닿기까지, 가족보다 더 큰 가족 일구려 애썼던 삶길, 앞날의 통일을 함께 꿈꾸고 소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말글과 역사 수업 때 자주 들어온 문익환 할아버지의 뜻과 삶 헤아린 질문을 학생들이 먼저 나누고, 받은 질문을 큰 줄기 삼아 옛이야기 보따리 풀듯 나눠주셨지요. 그날의 기운을 글과 사진으로 나눕니다<편집자 주>.



“문익환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무얼 좋아하고 잘하셨나요? 많이 바쁘셨는데 가족과 보내는 시간 엔 무엇을 하셨나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셨나요? 무슨 꽃을 좋아하셨나요? 언제부터 늦봄이라 고 부르셨나요? 문익환 할아버지가 북쪽으로 가신다고 하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평양에  가셨을 때 그때는 갈 수가 없었을텐데, 어떻게 가셨어요? 감옥에 가셨을 때는 마음이 어떠셨어 요? 언제 가장 슬퍼 보이셨나요? 문익환 목사님은 어떨 때 가장 행복해보이셨나요? 문익환 할아 버지가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무엇을 하셨을까요?”

“반갑습니다. 나도 여러분들 만할 때 여기서 살았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 와서,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영락기도원, 조금 내려오면 큰 개울 있지요. 거기서 물놀이 하고 학교도 다니고 그러고 놀았어요. 왜 여기 살았냐면 문익환 목사가 그때 여기, 한신대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다스렸을 때, 함경도에 사시던 분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에 가서 마을을 만들었어요. 그게 명동마을인데, 추운 겨울에 한 번에 간 사람이 142명이래요. 지금 만주는 중국 땅이지만, 고구려 때는 우리나라 땅이었죠. 가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던 터에 남겨진 물건들이 그대로 있더래요. 거기서 땅 일구며 마을을 만들었어요. 이렇게 마을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처럼 학교를 만들었고, 나라에 일꾼들로 키워야겠다, 생각하셨대요. 그때 문익환 목사가 태어나기 전이고, 문익환 목사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142명 중에 있었어요.”


“문익환 목사는 만주에서 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다시 되찾을까, 어떻게 독립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선생님이 될까, 음악가가 될까, 그러다가 목사가 되기로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 목사님이 많았어요. 문익환 목사 친구 중에 윤동주, 송몽규라는 분이 있었어요. 학교와 교회를 같이 다녔어요. 그런데 해방되기 전에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서 굉장히 슬퍼했어요. 문익환 목사가 일본에 신학 공부를 하러 갔을 때 장준하를 만났어요.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내 친구구나! 문익환 목사는 장준하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을 했대요.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정말 좋은 친구들이 죽으니 이제 그들이 못 살고 간 삶을 내가 대신 살아야지, 내가 그 일을 대신 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애를 썼다고 해요.”

“문익환 목사가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갔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6·25전쟁이 일어나요. 걱정이 되고 속상해서 미국에 있을 수가 없지요. 문익환 목사가 일본어, 독일어, 중국어도 잘 하고, 신학을 하니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도 했지요. 유엔군이 들어올 때 같이 한국에 들어와서 판문점에서 통역을 했어요.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한자도 많이 들어가고 일본어 투가 많이 들어와 있어요.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섞어 써야 유식한 줄 생각하고, 쉽게 해도 되는 말을 어려운 말로 쓰기도 해요. 그래서 문익환 목사는 성경을 쉬운 말로 써야겠다 해서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하고 풀이했어요.”


“문익환 목사는 우리나라가 일본 밑에 있을 때도 힘들었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도 남과 북이 갈라져서 어려움이 있고,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살기 어렵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아무도 북에 가지 못하게 하고, 만나지도 못하게 했어요. 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고, 북을 나쁘다고만 가르쳤지요. 실제로 모르면서 오해가 쌓이고 사이도 나빠졌어요. 어떤 사람이든 만나봐야 어떤 성격이고 어떤 버릇이 있는지 알잖아요. 그래서 문익환 목사가 북에 간 거예요. 만나러,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고,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러 갔어요. 그때는 정말 아무도 못 다닐 때 갔기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가 났어요. 이번에 김정일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만났을 때 사람들이 박수 치고 신나했지요? 문익환 목사가 북에 간 게 내년이면 딱 30년이에요. 30년 동안 우리나라가 그렇게 많이 바뀐 거예요. 전쟁이 1950년에 났거든요. 68년 됐지요.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전쟁을 쉬고 있는 거예요. 너무 힘드니까 쉬자 한 게 65년을 쉬고 있는 거예요. 이제 그만 끝내야겠지요?”

“문익환 목사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성경에 시가 많이 쓰여 있어서 그걸 어떻게 번역하나 하고 나도 써봐야지, 그러다가 쓰기 시작하셨어요. 처음에는 통일이니 정치니 이런 시가 없었어요. 처음에 쓴 시인데 ‘새삼스런 하루’라는 시가 있어요.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해요. 시가 생활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 생각과 삶이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잘난 척 하려고 일부러 어렵게 쓰기도 하던데, 다 쉬운 말로 써요. 시는 삶이고, 사는 것과 같아요.”

천다연 | 인수마을배움터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며 지내요. 발 딛고 손닿는 곳에서 깊게 뿌리내리는 삶 살고 싶은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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