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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 ‘뜻’ 만나 생명평화 ‘얼’ 세우는
생동중학교 들살이

5월 16~22일 6박7일 동안 광주와 남원지역으로 생동중학교 들살이를 다녀왔다. 특별히 5·18광주민주항쟁 전개과정에 대해 공부한 뒤 유적들을 따라 길을 걸었고, 그 역사를 온 몸으로 겪어낸 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더 오래 전 온 몸 바쳐 우리 땅과 얼을 지키다 역사의 뒤꼍으로 잊힌 고려인동포와 후손들이 조국을 찾아와 터 잡은 광주 고려인마을을 찾아갔다. 5·18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과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

떳떳하게, 부끄럽지 않게 살다간 이들


5·18광주민주항쟁의 유적을 따라 길을 걷는 ‘오월길’ 가운데 우리는 ‘오월여성길’과 ‘윤상원길’을 걸었다. ‘오월여성길’에 있는 ‘오월어머니집’은 5·18 당시 사랑하는 가족이 희생되었거나 본인이 피해를 당하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서로 아픔을 치유하고 보살피는 공간으로 마련됐다. 우리는 오월어머니집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현애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현애 선생님은 청년학생들이 자주 모였던 ‘녹두서점’을 남편 김상윤 님과 함께 운영한 분이다. <화려한 휴가> 같은 5·18 관련 영화나 책에 대해 선생님은, 그 당시 아픔과 고통을 잘 담아내려 애쓰긴 했지만, 시민군만 너무 크게 보여주고 그때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하셨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여쭤봤다. “힘들어. 내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더 크게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은, 과연 이번에는 제대로 진상규명이 될까? 5·18특별법이 만들어질까? 하는 우려”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남는 물음을 던져주셨다. “그때 만약 통일이 되었더라면 우리를 빨갱이로, 북한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결국 분단으로 인해 벌어질 수밖에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현애 선생님은 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두 번째로 양림동에 있는 ‘소심당 조아라기념관’에 갔다. 조아라 선생님은 1912년 태어나 평생 여성운동,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셔서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는 분이다. 유품들(특히 신발)이 굉장히 낡고 소박했다. 5·18 당시에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6개월 옥고를 치르셨다고 한다. 티 없이 결백하다는 뜻인 ‘소심당’처럼 조아라 선생님은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그 다음으로 광주기독병원과 구 광주적십자병원을 둘러보았다. 5·18 당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긴박하게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줄지어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여학생(박금희)이 헌혈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총에 맞아 주검으로 실려 오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고, 유흥업소 여성들이 자신들의 피도 깨끗하다며 헌혈을 하러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동지를 잃고 살아남은 이들의 사명


‘윤상원길’을 걷다가,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열사들 기념비가 있는 5·18자유공원에서 전용호 선생님을 만났다. 전용호 선생님은 윤상원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하셨다.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진압될 때, 당신은 광주YWCA에서 <투사회보>를 만들고 계셨단다. <투사회보>는 함께 싸우는 시민들을 독려하고 서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적어 광주시내 질서를 잡아나간 숨은 공신이었다. 그렇게 형제 같은 동지들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전용호 선생님이, 어떻게 그 슬픔을 극복하셨고, 그 사건이 당신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 드렸다. 전용호 선생님은, 신군부세력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민주화를 이뤄야한다는 일념 때문에 절망할 겨를 없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고 하셨다.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구 전남도청에도 가보았다. 처참했던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적인 건물인데, 권력은 무자비한 폭력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한다. 5·18민주평화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한달 동안 시민에게 개방을 했지만,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흔적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다. 전남도청을 원형대로 복원하자고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 당시 도청 모습을 남겨둘 필요가 있다.

민주묘지 앞에서 생명평화 노래하다


5·18민주항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5·18민주묘지에 갔다. 5·18민주묘지는 5·18 당시 운명하신 분들이 잠들어있는 신묘역, 그리고 5·18 이후 이 땅 민주화를 위해 힘쓴 분들이 잠들어있는 망월동 구묘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묘역 입구에서 굳세게 서 있는 탑은 그 크기에 저절로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 5·18민주묘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탑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가니 넓은 무덤이 펼쳐져 있었다. 파란 하늘에 거대한 탑, 봉긋봉긋 솟은 무덤들과 뒤에 보이는 초원이 조화를 이루며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묘 중엔 이름 없는 묘, 사진 없는 묘도 있었다. 뜨겁게 싸워 억울하게, 눈부시게 운명하셨음에도 이름 하나, 사진 하나 남지 않았던 분들도 계셨다. 구묘역 앞에서 진행된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모임에도 함께했다. 우리 노래와 기도가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풀고 이 땅 생명평화를 일구는 작은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사는 고려인마을


5월 19일 흙날. 우리는 광주 월곡동에 있는 고려인마을로 갔다. 고려인이란 19~20세기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분의 후손들을 말하는데, 1937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면서 해방과 분단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잊힌 동포들이다. 고려인 1세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고 자란 이 땅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부르며 입국해서 살아가는 동포가 4만 명에 이르는데, 고려인동포 4~5세대 자녀들은 재외동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해 강제추방의 위기를 맞았으나, 지난해 정부는 내년 6월까지 강제추방을 유보했다. 그 사이 법 개정이 이뤄지길 요청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들을 지나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라는 곳으로 가서, 고려인동포들, 고려인 4~5세대 청소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천영 목사님을 만났다. 예전부터 외국인이주노동자와 새터민들에게 관심 갖고 일해오다가, 2001년 고려인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들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후에 고려인마을을 일구셨다. 고려인마을에 다문화가정 학생을 대상으로 세운 ‘새날학교’ 교장이기도 한데, 본인은 허드렛일을 거들 뿐이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고려인마을 대표이신 신조야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뜻을 품고 열심히 활동해온 이야기들과 고려인들이 겪는 어려운 점도 들었다. 고려인마을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고려인진료소, 고려인 역사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이천영 목사님은 우리 만남이 ‘관광’하며 지나치듯 마을에 오는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면서 나중에 새날학교 학생들과 같이 홍천에 놀러오겠다고 했다. 우리도 고려인들이 우리 땅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타인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기

이천영 목사님 본인도 5·.18 유공자라고 하셨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공자는 아니지만 자신 역시 5·18민주항쟁 시위에 참여했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자신도 5·18 유공자라 할 수 있단다. 고려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은 이름을 날리며 독립군을 이끈 분들이다. 그분들과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 용사들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천영 목사님은 많은 고려인들이 독립운동을 함께 했는데, 우리는 독립유공자들의 자손을 천대하는 나라라 이야기하셨다.

윤상원은 항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5·18민주항쟁은 이런 상징적 인물들과 시민군들의 희생으로 빛났다. 하지만 당시 밥을 짓고 화약병을 만든 어머니들, 목 터지게 구호 외치던 광주시민들, 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혈한 이들, 다친 이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고친 의료진들, 목숨 바쳐 끝까지 싸우는 이들을 기억하자고 가두방송을 한 이들. 이런 생명살림의 토대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5·18의 뜻을 온전히 새기기 어렵다. 우리는 5·18의 참 모습을 보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의 뜻과 얼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생명살림의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 살리는 밥이 되는 삶을 살며, 용기와 헌신으로 타인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 5·18민주항쟁의 뜻과 얼 마음에 새기며 지금 홍천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을 더 정성스럽게 살아내자 다짐했다.

글쓴이 | 강원 홍천 밝은누리움터에서 함께 공부하며 살아가는 생동중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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