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아픔과 상처 보듬는 순례 걸음
5·18민주묘지와 지리산 등지, 목포신항까지 광주·전라지역에 울려퍼진 고운울림
“아아, 광주여!”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1면에는 무등산자락 광주시내 사진 아래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진실을 증언하는 글 한 편조차 검열 당하던 시절부터, 시대의 격랑을 견디며 원통한 생명들을 품어온 무등산과 광주땅. 국가권력의 폭주를 온 몸으로 막아내다 스러진 분들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진 마음과 동시에 묵직한 과제를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생명평화 일구는 삶이다. 오월 광주의 정신으로,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에 비무장 영세중립이 실현되길 염원하는 노랫소리가 광주·전라지역에서 울려 퍼졌다.
5월 20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있을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 함께하고자 서울에서, 홍천에서, 군포에서, 남양주에서, 광주에서 온 생명평화순례 길벗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며칠 전부터 와서 국가가 38주년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념하는지 참여한 이들도 있고, 광주를 둘러싸고 우뚝 솟아 있는 무등산에 올랐던 이들도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유적지를 따라 걷는 이들도 있었고, 서점 주인으로, 시장가게 아주머니아저씨로, 택시기사로, 물심양면 민중항쟁을 도왔던 이들을 찾아가 증언을 듣기도 했다. 그분들은 계엄군의 학살과 집단 발포로 옆에서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걸 자기 일처럼 여긴 ‘사람들’이었다. 대동세상을 함께 꿈꿨던 동지들 죽음을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이 오늘을 그때 그날처럼 살아온 이들의 노력으로 오월 광주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순례하는 길벗들 가슴 깊이 들어왔다.
5월 19일 오후에는 옛 상무관 앞에서 작은소리 음악회가 열렸다. 5·18 당시 행방불명 된 이창현 군의 아버지 사연을 떠올리며 손수 지은 노래,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품은 노래, 한이 서린 우리 소리 등 간절히 마음 담아 들려주는 여러 노래들이 한 시간 동안 흘렀다. 작은 소리는 우리를 지나, 희생자들 시신을 덮어놓은 태극기를 끌어안고 피맺힌 통곡과 추모가 연일 이어졌던 옛 상무관으로, 광주시민 2만여 명이 둘러앉아 뜻을 하나로 모아나갔던 5·18민주광장으로, 어린 학생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피하지 않았던 시민군들의 최후가 처참한 총탄 자국으로 남아 있는 옛 전남도청으로도 고요히 흘렀다.
5월 20일 오후 5·18민주묘지. 추모행사를 탄압하고 유족들을 회유해 5·18사건을 은폐하려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망월동묘역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신묘역에서 구묘역까지 천천히 걸으며 추모하던 길벗 230여 명은 오후 3시 구묘역을 빙 둘러섰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일구는 바람으로 불어오소서. 이 땅 생명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고쳐주소서. 미움과 거짓을 만드는 대립과 갈등을 풀어주소서.” 나직하면서도 또렷하게 함께 낭독하는 기도소리가 푸르른 언덕 가득 메운 망월동묘역 위로 울려 퍼졌다. 분단현실을 이용하여 학살과 발포가 정당화되는 세상이 다시는 오지 않기를, 정의와 평화가 춤추는 세상이 되기를, 오월 광주의 정신이 동북아 생명평화의 땅으로 이어지기를, 함께 노래했다.
다음날인 5월 21일 저마다의 호흡으로 오월 광주의 정신이 살아있는 남도땅 이곳저곳 흩어져 기도순례를 이어갔다. 지리산 등산 모둠은, 9살 어린이부터 다양한 연령대 길벗 60여 명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전쟁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모진 세월을 겪으며 뭇생명들의 신음소리를 다 받아내고 있는 땅 지리산. 오르고 내려가는 데 8~10시간의 대장정, 나의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고, 앞사람 뒷사람과 호흡을 맞춰야 오를 수 있는 산이었다. 운해에 둘러싸인 정상에 발을 딛는 이들에게 20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을 성찰하는 기회를 주는 듯했다.
다른 모둠은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이들의 해원을 기도했다. 이밖에도 오월 광주를 확장하는 폭넓은 만남과 연대 자리가 있었다.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귀농한 사람들이 교육과 수련으로 일구어가는 마을공동체 방문, 우리 땅에 뿌리내리려 고군분투하는 고려인동포들을 만나 든든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목포신항으로 두 시간 남짓 걸려, 3년 동안 바다에 잠겨 있다가 이제야 육지에 우뚝 올라선 세월호를 직접 눈앞에서 확인하고 진실이 밝혀지고,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되길 기도한 이들도 있었다.
함께 살아가는 벗들 덕에 생명평화순례가 나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 함께 일구어가는 삶, 마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없었다면,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남북외교와 국제정세에 일희일비하며 대립과 갈등의 한쪽 편에 갇힌 채 지내지 않았을까? 함께 살아가는 이들 덕에, 일상에서도, 한 달에 한 번의 순례길에서도, 다르지 않은 생명과 평화가 우리에게 있는지 늘 돌아보게 된다. 이번 순례에서 농촌마을 어린이들과 도시마을 어린이들이 만나 ‘철조망 돌돌돌 밀어라 여기는 비무장지대라’ 하고 노래 부르며 함께 어우러진 것처럼, 남쪽 어린이들과 북쪽 어린이들이 신나게 이어달리기하고 축구하고, 백두산도 오르고 만주벌판을 누비며 동북아 생명평화의 땅을 향해 달려나가길 꿈꾼다. ‘비무장 영세중립’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도 순례길 함께 걷는 이들과 꾸다보면 어느덧 우리 삶으로 이루어지리라. 일상에서 서로 살리는 삶의 토대를 잘 닦고 아픔의 땅에 생명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삶이 되길 소망한다.
최소란 | 강원 홍천에서 살면서, 함께 일구어가는 삶을 글로 써서 나누는 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