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겠지만, 그들도 그렇게 깨어났겠구나"
광주에서, 국가를 다시 생각하다
국가의 폭력, 무고한 죽음, 시민들의 항쟁, 결의에 찬 죽음…. 최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싶어 찾아본 광주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증언록 등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희의감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해진 생각은, 계엄군의 잔인하고 압도적인 무력행사에 의해 당시의 시민들은 쓰러져갔지만 38년간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노력(또 다른 여러 차례의 죽음을 포함한)에 의해 그 죽음의 의미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5월 18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숙소에 들려 짐을 내리고 근처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향했습니다. 피에 물든 태극기, 누렇게 바랜 여러 시민, 학생들의 일기, 취재기록이 담긴 기자수첩 등 절박했던 당시 상황들을 말해주는 증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은 아이들과 무등산에 올랐습니다. 화순 쪽에서 오른 무등산은 산 안에 산을 품고 여러 마을을 품은 다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촉촉이 젖은 산길이 저희를 품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서는 광주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무등산은 오랜 세월 그렇게 묵묵히 광주땅을 지켜본 큰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이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늘 뜻 땅에 내려 온 생명 살리심을 믿습니다~ 하늘 뜻 땅에…” 화음을 넣어 불러주는 큰 아이의 노래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려올 때는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지만 우리를 맞이해준 아름다운 무등산을 뒤로 하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날 망월동묘역에 둘러서서 생명평화 고운울림 노래로 죽음과 삶이 한 자리에 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묘역에서는 앉아서 계속 흙장난을 하던 아이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했던 말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엄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어떻게 지나가는 사람을 막 그렇게…” “그렇지? 그건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어.”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지내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자국민에게 이러한 폭력을 저지른 국가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학생’이라는 이름, ‘국민’이라는 이름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길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팠겠지만, 광주의 시민들도 그렇게 깨어났겠구나. 어느 날 갑자기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국가가 어느 순간 국민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등 돌리거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면, 되려 국가가 자신들을 폭도로 몰아갔다면, 이전의 가치체계는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광주는 사람들의 신념, 인식체계를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정보의 차단과 왜곡에 의해 다수의 국민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직간접적으로 진실을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광주는 쉽게 지울 수 없는 자국이 되었습니다.
광주 기도순례를 함께 했던 아이가 커가면서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질문할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의 순례길에서도 슬픈 역사를 마주하는 길목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어른들이, 또 일상으로 돌아와서의 삶이 곧 안정으로 이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진실을 알고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야 함이 마땅하기에 앞으로의 순례길도 함께하며 공부하며 다녀오려 합니다. 평화를 기도하고 해원을 위해 순례를 이어가고 있는 이 걸음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리라 믿습니다.
임재원 | 같은 뜻 나누고 한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는 관계가 있어 행복한 인수동 마을밥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