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작은 생명들과 어우러져
합천 열매지기공동체
경남지역에서 생명평화를 일구시는 분들을 만났다. 먼저 함양온배움터를 방문했고, 이어 합천 열매지기공동체로 갔다. 서정홍 님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6년부터 가톨릭농민회, 우리밀살리기, 경남생태귀농학교 활동을 하셨다. 그러다 2005년 황매산자락 목곡마을에 터 잡으셨고, 2006년 3월부터 귀농한 젊은이들과 함께 첫 모임을 하셨다. 사람이 늘어나면서 2008년 1월 '열매지기공동체'라 이름을 바꾸고, 현재는 아홉 가구 27명이다.
열매지기공동체에 함께하려면 하늘땅살이(농사)를 꼭 해야 한다. 이들은 농약과 화학비료, 비닐을 쓰지 않고 생태뒷간으로 거름을 만들어 쓰고 있다. 가능한 기름이나 전기, 농기계를 아껴 쓰고, 필요한 농기구들을 서로 돌아가며 쓰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들을 함께 해나가고 있다.
열매지기공동체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한다. 이때는 일상도 나누고, 농사 이야기, 배우고픈 선배농부 방문 계획 잡기, 대체의학 공부, 농업과 환경문제들을 나누고 토론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요즘 공동체의 주요 고민은 다음 세대와 청년이다. 이전에는 ‘강아지똥학교’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 아이들과 함께 텃밭도 가꾸고 글쓰기와 몸공부를 하다가, 학생들이 좀 자라났기에 지금은 ‘담쟁이인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청년농부들이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해서 지원하는 일도 해나가고 있다.
서정홍 님 댁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밭에서 직접 뜯어온 나물들로 정성스럽게 꾸려진 밥상에서 넉넉한 품과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인상적이었던 일은 이웃의 방문이었다. 식사하는데, 갑자기 오셨다. 한경옥, 서정홍 님 부부는 자연스럽게 밥 먹었냐고, 자리 앉으라고 하시며 밥과 찬을 내주셨다. 서로 한 가족처럼 편하게 오가며 지내는 열매지기의 한 모습을 보았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서정홍 님이 그 자리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마을 이웃들이 함께 시 읽고 나눈 것을 엮은 책이 그날 마침 나왔기 때문이다. 서로 돌아가며 책에 나온 시와 감상을 낭독하고 감상했다. 그 중 ‘겨울 햇살에’라는 시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바로 앞집에 사시다 몇해 전 세상 떠나신 인동할머니 이야기다.
17살에 시집 와서 25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70년 가까이 혼자 사신 할머니인데, 하나에 700~800원 밖에 하지 않는 곡식 포대를 하루 내내 껴안고, 떨어진 부분에 양말을 덧대어 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쓴 시라고 했다. 작은 천 조각 하나 쉽게 버리지 않는 그 삶이 바로 오늘 이 지구를 살리는 것이라고, 이런 걸 본인이 글로 남기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버리기에 사명감을 갖고 글을 쓰신다고 했다. 인동할머니처럼 이름 없는 위대한 분들이 계시기에 오늘 우리가 이나마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다.
겨울 햇살에
아흔 살, 인동 할머니
겨울 햇살에 앉아 하루 내내
떨어진 곡식 포대를 깁고 있다
거저 가져가라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포대를
돈으로 따지면
새 것이라도 칠팔백 원밖에 하지 않을 포대를
그리운 자식처럼 끌어안고
할머니 살아온 세월만큼
여기저기 닳고 해진 낡은 포대는,
생살보다 기운 자리가
더 많은 낡은 포대는,
어느새 할머니 동무가 되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겨울 햇살에 스르르 잠이 든다
할머니 품에 자식처럼 안겨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생명 살리는 마을어르신들 삶을 지켜보며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 삶에서 받은 도움 기억하며 이웃들 어려운 처지를 못 본 척 할 수 없다는 이야기, 꽃과 나무, 수많은 별, 산새들, 바람소리 느끼며 삶의 기쁨을 얻고 힘을 낸다는 이야기, 할 수 있는 대로 생명과 하늘에 죄를 덜 짓고 살아가려 한다는 이야기…. 그렇게 소박하지만 진실하게 작은 생명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이야기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찻집 ‘토기장이의 집’을 운영하시며 토론모임도 하시는 김형태 님, 마을 식구들의 집을 지어주신 목수농부 정상평 님,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청년농부 구륜, 수연, 예슬 님, 청년농부들과 함께 세상 공부하시고 홍천마을과도 인연 있는 김은실 님 등 열매지기 식구들을 만나는 데에 1박2일도 모자랐다. 앞으로 더 깊고도 다양한 만남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 마음으로 도시/산업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함께 어우러져 생명평화 일궈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가슴 벅차게 반갑다. 당장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꿈 같은 이야기라도, 자기 현장에서 우직하게 한걸음씩 내딛어가는 길벗들이 있기에 그 꿈들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만남과 이 땅 뿐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도 생명평화를 이뤄가며 속이 알찬 열매를 만들어가는 열매지기가 되고 싶다.
‘생명평화를 일구는 삶과 사람들’(주동술, 김두영, 장재원, 박준석, 최혁락) | 각 지역에서 생명평화 일구는 분들 만나며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하는 모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