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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묻힌 이들의 평안을 빕니다
길벗들과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오래 전 대학 동아리 사람들과 지리산 한 번 가보자고 해서 뱀사골 거쳐 노고단 오르는 길을 갔었다. 그 때는 지리산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단지 크고 높은 산이라는 정도였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주변에서 지리산 다녀온 이야기 들으면서, 그리고 <태백산맥> 읽으면서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 지리산 일정이 있었다.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 오르는 일정이었다.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인가. 남도땅에서는 제일 큰 산인 까닭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 조정래 <태백산맥> 중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의병들이 일어나 싸운 격전지, 동학농민혁명 봉기,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의병활동, 그리고 해방 이후 제주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 조직이 있던 곳. 지리산 하면 떠오르는 어떤 강인함이 느껴지곤 했는데 이런 역사 속에서 저항정신이 깊이 새겨져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이 큰 산에 오른다는 설렘을 안고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10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걸어야 했기에 내 호흡에 맞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이 산을 오르는 의미와 마음가짐을 잘 새기고 싶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가기 전 중반까지는 끊임없는 계단식 길이어서 체력 안배가 필요한 곳이었다. 먼저 출발했던 사람들 중에 뒤처진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속도를 내서 앞지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왜 앞서가야 하지? 난 무엇 때문에 이 산을 오르는 거지?’ 이 산행의 의미를 되짚었다. 다른 사람이 보이고 그들과 비교하며 살아가려는 내 습성이 느껴졌다. 다시금 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오르고 나서야 숲이 거치고 구름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로 땅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보였다. 하얀 구름들이 뭉게뭉게 펼쳐진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날씨는 점점 쌀쌀해졌다. 아이들도 어느새 잠바를 꺼내 입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잠시 쉰 뒤 천왕봉을 향해 걸었다. 통천문을 지나니 정말 하늘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마지막 힘든 오르막계단을 오르고나니 멀리서 생명평화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 드디어 천왕봉에 다 올라왔구나!’ 이곳에서 죽어간 무수한 영혼들에게 평안과 위로가 함께하기를. 그리고 이 땅에서 곱게 어울리는 밝은누리 씨알로 살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드렸다.


멀리까지 구름에 둘러싸이며 앞이 잘 보이지 않다가 가끔씩 비추는 햇살에 하얀 구름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또 구름이 잠시 거치면 멀리까지 넓게 퍼져있는 능선들이 보이는 아름다운 장광을 보기도 했다. 올라왔던 이들이 하나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지리산 정기를 받으며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으로 그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함께 올랐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가고 나서야 나도 자리를 정리했다. 내려오는 걸음은 경쾌했다. 아이들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언제 그리 힘들었냐는 듯. 천왕봉에서 머문 긴 여운을 안고, 어머니의 품이라 불리며 수많은 생명을 품어주었던 이 산에 고마움을 느끼며, 동시에 이 땅에서 피 흘린 수많은 영혼의 안식을 빌며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김재규 | 최근 홍천으로 이사해 시골살이 배우며 하늘땅살이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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