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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
세계 공동체 순례

1. 내게 공동체란

어릴 적 가장 아련하지만 따스한 기억 중 하나가 사랑방이다. 30~4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살던 농촌마을 그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였다. 일할 때도  혼자 하기보다 두레로 함께했다. 농한기면, 동네 여자들은 안방에 모여 바느질을  하거나 마늘을 까며 수다를 떨고,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사랑방에 모였다. 함께하 는 게 재미가 없고 피곤하기만 하다면 그렇게 함께할 리가 없는 일이다.

한국인들은 종교의 공동체성도 유별나다. 절이나 교회, 성당에서 모여 점심을 함 께 먹는 곳이 적지 않다. 해외에 나간 교회나 성당이 교민들이 함께 먹고 정을 나누고 정보를 교류하고 서로 돕는 사랑방 구실을 하는 것도 독특하다. 한국의 종 교공동체는 이상이나 가치, 신앙만이 아니라 서로 희노애락을 나눈다. 어우러지 는 이런 공동체문화는 갈등하고 상처를 헤집어 아프게 할 위험성도 내포하지만,  사는 재미와 의미를 배가시켜주기도 한다.

2. 어떻게 순례에 나섰나
나도 너무 궁해서 유토피아를 찾아나섰다. 10년째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 1년 병가를 냈다. 유명대학병원에서 치료를 했지만 별무효과였다. 궁하면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대안공동체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게 타이의 아속공동체였다. 아속에서는 항문관장을 통해 몸의 독소를 빼내 건강을 되찾게 해주는데, 내가 그곳 사람들처럼 맨발로 시골길을 거닐고, 해독까지 하면 몸이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그렇게 방콕에서 차로 10시간 가량 떨어진 타이 중서부 시사켓의 시사아속으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안은 만족스러웠다. 통증이야 자가면역질환에서 비롯돼 단시일 내에 나아질 수는 없었지만, 5일 단식과 관장으로 컨디션이 상당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공동체에서 몸만 챙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공동체에서는 구경꾼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문 안에 들어오면, 일상사를 함께하라’, 이것은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요구하는 것이다. 아속은 불교국가인 타이에서 주류불교의 타락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계란으로 바위를 친 선지자들이다. 그런 배짱도 놀랍거니와 그런 소수파들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은 회사들’을 만들고, 오늘날 타이의 주류들도 무시할 수 없는 5개의 공동체마을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군 장성출신 정치인 잠롱 스리무엉을 무욕의 방콕시장으로 만든 멘토가 바로 아속의 창시자 보디락 스님이라는 것도, 논밭에서 일하면서도 웃음꽃 을 잃지 않는 학생들,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원들의 일거수일투족도 신기했다. 무욕과 자비의 보살들을 현세에서 만났다.

그렇게 한 달 간 아속의 이곳저곳에서 보낸 뒤 간 곳이 인도의 오로빌공동체였다. 오로빌은 방대했다. 한 마을이라기보다는 인류공동체라는 목표로 ‘만들어지고 있는 ‘계획도시’였다. 한 프랑스 여성의 꿈으로 시작된 오로빌은 혼자 꾸면 꿈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음은 멀리 미국이었다. 뉴욕에서 차로 3시간쯤 떨어진 우드크레스트는 브루더호프의 본부격이다. 처음 브루더호프를 방문한 것은 1999년 초였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대안을 보여주려 공동체 취재에 나섰는데, 그 첫 대상이 영국 다벨 브루더호프였다. 그 이후 한국인들은 브루더호프 사람들의 평화로운 표정에 매료됐다. 나도 우드크레스테에 17일간 머물면서 지상천국은 이런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우거진 숲에 둘러싸인 호수에서 낚시와 수영을 하고, 초원이 펼쳐진 언덕위에 하얀집에서 가족끼리 정답게 속삭이며 별빛을 맞는 우드크레스트를 보았다면 단테도 천국을 더욱 생생하게 그렸을지 모른다.

공동체 여정은 일본의 ‘야마기시’에서 마무리됐다. 한국의 산안(야마기시)마을공동체와는 20년의 인연을 유지해왔던 터다. 민주화운동 이후 방향을 잃은 진보지식인들도 공동체운동에 적잖은 관심을 보였다. 일본의 나고야 인근에서 시작돼 일본 전역은 물론 전세계에 확산돼 1980년대 경기 화성에 만들어진 산안마을공동체는 우리나라 공동체운동에 모델이 된 곳이다. 그 야마기시의 원조인 가스가야마와 도요사토를 둘러본 것이다. 야마기시도 오늘날의 하모니를 이루기 전에 치열한 내분을 거쳤다. 야마기시에서 이탈한 사람들은 도요사토 인근 도시인 스즈카에 터를 잡고, 에즈원이란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고 있었다. 야마기시에도 머물고 에즈원에도 머물면서 그들의 ‘사랑과 전쟁’을 생동감있게 들었다.


3. 새 문명을 여는 공동체들
공동체는 세속의 약육강식과 파괴, 폭력 등 문제를 직시하며 다른 세계를 열기 위한 대안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들은 욕망을 실현하려하기보다는 자신을 비워간다. 매일매일 삶에서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밖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많이 벌고 싶고, 남보다 더 잘 입고 싶고, 돈 펑펑 쓰고 싶고, 때마다 여행 가고 싶고..., 허영기 섞인 욕구들을 버리고 단순소박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 게 공동체다. 공동체살이는 세상에 대한 혁명이기에 앞서, 바로 자기 비움의 혁명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대안공동체들은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에도 폐 안 끼치는 삶, 치유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자원을 마구 쓰고 버려 초록별을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공범들이 아니다. ‘욕망의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다. 욕망의 홍수가 뒤엎은 세상에서 방주로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게 소유하고 적게 쓰며 많이 나누고 더 돕는다. 남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변해 솔선수범하는 대안공동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들인 셈이다.

공동체는 리얼한 삶의 현장이지, 지구 밖의 이상향이 아니다. 문제가 전혀 없는 공동체도 있을 수 없다.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환상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일지 모른다. 문제가 두려워, 또는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사랑 한번 못해보는 무료한 바보가 되기에 생은 너무나 아깝다. 인간은 시련을 통해 배운다. 공동체들도 마찬가지였다. 1층부터 10층까지 온갖 욕망을 켜켜이 쌓고, 11층에 유토피아까지 올릴 수는 없다는 것. 유토피아란 이기적인 자유방종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고통이나 상처, 아픔까지도 껴안을 품이 있을 때 그 품으로 슬며시 찾아온다는 것까지도.

조현 <한겨레> 논설위원

10월 5~8일 밝은누리 한마당 잔치에서 강의한 내용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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