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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지켜온 가치
새로움으로 이어가려는 지저스아미


필스돈·프라이어리와 토트네스를 거쳐 세 번째 방문한 곳은 ‘지저스아미’이다. 토트네스에서 340km를 달려 5시간여 만에 노스햄튼마을에 도착했다. 지저스아미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우리 방문 일정을 조율하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큰 길에서 우산 쓰고 기다리다 맞이해주신 리차드 님 안내에 따라 우리 일행은 세 군데로 흩어져 세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와 은진, 성은, 다인, 정민이 머무르게 된 곳은 ‘뉴리버하우스(New River House ― 이 글에선 ‘새강'으로 부른다)’라 불리는 곳인데, 외양간을 개조해서 커다란 집으로 만든 곳이다.

방에 짐을 풀고 거실로 나와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나 님과 인사를 했다. 대화하면서 그 집에 대해서, 지저스아미에 대해서 듣고 도착해서 낯설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새강에는 두 가정과 아이들 다섯, 그리고 비혼들 예닐곱 명이 살고 있었다. 그 다음날 보니 새강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따로 살면서 새강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까지 포함해서 이 한몸살이 기초단위는 20여 명이었다.

혈연가족을 넘어 하는 공동생활


도착한 첫날 푹 잘 잔 덕에 해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커다란 부엌에 둘러앉아 각자가 아침을 챙기고, 오늘 식사 당번이라고 하는 분이 점심식사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 먹으면서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11시가 되어 차를 타고 모임 공간으로 이동했다. 노스햄튼마을에는 300명 정도의 구성원이 있는데 세 모둠으로 나눠서 해날 낮 모임을 한다.

모임 끝나고 모두 숙소로 돌아가 점심밥상을 나눴다. 새강에는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본 사람들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곳에 있지만, 새강에 자주 와서 밥상 나누고 교제하는 한나 님 부모님과도 인사하고, 또 새강 근처에 따로 사는 엘코라는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인종으로는 아일랜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사람 등 다양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엘코는 10대를 약물중독에 빠져서 보낸 청년이다. 담배와 약물을 함께 하던 한 친구가 어느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동네를 떠나버렸다고 한다. 일 년 뒤 엘코는 그 친구가 지내고 있는 지저스아미에 방문하게 되었고 달라진 친구 모습에 놀랐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엘코가 그 날 친구가 사는 공동체집에서 잘 때 깜짝 놀랄 사건이 일어났는데, 열여섯 살 이래 처음으로 숙면을 취한 것이다. 그 얘기를 나눴더니 한몸살이 식구 한 명이 엘코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했고, 엘코는 모든 중독을 끊을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엘코는 자신을 구원해준 은혜에 무언가 하고 싶어서 독신으로 헌신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40여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만큼 지저스아미에 대한 평가도 많이 있었는데, 한 자료는 공동생활이 지저스아미 구성원들의 믿음과 실천에 바탕이 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한 개인이 새로 태어나는 것은 생물학적인 가족을 뛰어넘어 영적인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새강 식구들이 한데 부엌을 같이 쓰고 한 지붕 아래 사는 배치가 구조적으로 혈연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을 생성할 수 있게 하는구나 싶었다.


달날 아침 리차드 님과 다시 만났다. 해날에는 만나지 못했는데, 리차드 님은 노스햄튼마을이 아니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레스터라는 마을에 살면서 모임을 하기 때문이었다. 오전에는 리차드 님에게 지저스아미 역사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오랫동안 중독자들과 노숙자들을 섬기며 살아온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지기수로 많은 낯선 사람들이 공동체집에 머물렀는데 어떤 이들은 왔던 걸음대로 쉽게 떠나가기도 했다. (이 얘기를 들으니) 첫날 손님들을 봐도 크게 반가워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은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필요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사업 만들어


이후에는 공동체 사업장을 둘러봤다. 지저스아미의 특징 중 하나는 한몸살이에서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한몸살이 공간을 고치고 관리해야 하는 필요에 의해서 목공일을 하게 되었고, 그 필요가 사업체로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목공, 목재 가공, 그리고 4,500여 종 품목을 취급하는 생활필수품 유통 등의 사업을 하면서 250여명을 고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업은 일만 잘하면 되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과 관계도 살핍니다.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를 겪는다거나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밖에서보다 공동체에서 사업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외부는 경쟁적입니다. 그래서 사업이 잘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싫어하고, 실패를 용납하거나 인정해주지 못하는 거죠.”

이들에게 공동체 사업은 한몸살이의 필요를 채우면서 한몸살이 식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난생 처음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대여섯 가지 사업체와 전체 행정을 관리하는 중앙사무실이 있는데, 2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은 주중에 이틀은 비영리단체인 공동체 사무실에서 일하고, 사흘은 사업체에서 일한다고 한다. 비영리활동과 영리사업 양쪽을 다 보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한몸살이 식구가 아니어도 공동체 사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일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또 함께 사는 삶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한몸살이 식구 모두가 공동체 사업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고 공동체 밖에서 다른 일을 하더라도 지원하고 적극적으로 응원한다.

공동체 사업체에서 모든 사람들이 받는 임금은 동일하다. 동일 임금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지만, 어떤 면에서는 임금을 확보해놓고 일하기 때문에 게을러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 단점이 있다. 그에 반해 어떤 이들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즐거워서 돈을 받지 않더라도 그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도 한다.

공동체 사업으로 버는 수익은 한몸살이 구성원들의 소박한 생활비를 충당한 후 나머지는 교회 사역에 쓰인다. 지저스아미는 시작할 때부터 노숙자, 약물·알코올 중독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재활을 돕는 데 노력을 들여왔다. 코벤트리, 런던, 노스햄튼, 세필드 4개 도시에서 ‘지저스센터’라는 곳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지저스센터에서는 노숙자들이나 주거환경이 불안정한 사람들이 생활을 안정적으로 자리잡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브릿지(다리)’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저스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적은 돈으로 밥을 사먹을 수도 있고, 공예나 간단한 기술을 배우기도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간단한 도시락을 싸주어 굶지 않도록 하고, 또 빨래방 등의 시설을 제공하면서 지역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공동 지갑’은 공동체집 단위로 운영된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 모두 자기 수입을 한 곳에 모으고, 거기서 살림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개인 용돈이 나오게 된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돈이 필요하면 재정 담당자에게 자신의 필요를 얘기하고 돈을 받았다고 한다.

“재산을 나누는 목적은 첫째는 간소해지는 것, 소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인 동시에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재산을 공유하는 동시에 중앙에서 물건을 한 번에 구매해서 공급해주면 식구들은 상점에 가서 직접 돈을 쓸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리차드 님은 공동지갑 운영이 하나의 견고한 제도가 되면서 경직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한몸살이에 들어오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망설이고 결단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리차드 님은 한몸살이에서 공동재정 부분도 자율에 맡기는 변화를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공동체 홈페이지나 책에서 보면 생활공동체를 시작한 기반을 ‘공동지갑’에 두고 이 정체성을 40년간 이어 왔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것이 함께 사는 것의 본질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변화를 고민하시는 것이다. 70대인 리차드 님을 비롯해 한몸살이 지도력들이 여러 면에서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면서 마음을 많이 쓰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이들이 이 변화를 어떻게 풀어갈지 기대가 된다.

새로운 지도력으로 이어지다


달날 오후에는 우리가 지저스아미에 대해서 궁금한 것을 자세히 묻기 위해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 앞서 사전 질문을 보냈는데, 리차드 님이 각 질문별로 대답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섭외해놓으셨다. 각 주제별로 한 분씩 일하는 도중에 잠깐씩 오셔서 20~30분씩 얘기하고 가시고 했다.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 나누기는 어려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애쓰신 리차드 님의 마음이 고마웠다.

지저스아미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한 첫 질문을 위해서는 초창기부터 지저스아미에서 아이들 교육을 고민하셨다는 제이니 님이 오셨다. 공동체 초기에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계절학교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를 시작할지 고민하던 당시에는 지저스아미가 여러 지역으로 분화·개척하는 데 많은 자원과 역량을 쏟았다고 했다. 그리고 공동체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동네 주변에서 경계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 때 지저스아미에 속해있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부끄럽거나 곤란한 상황이 되기도 해서 이런 부분을 집에서 잘 살피도록 애썼다. 아이들도 공동체 아이들하고만 있는 것보다 공교육 학교에 가서 다른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또한 아이들이 공교육에서 공동체 가치를 벗어나거나 반하는 내용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도 집에서 부모들이 교육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지도력에 대한 질문이었다. 80년대 한몸살이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노엘 목사의 추진력이 크게 작용한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노엘 목사님은 일찌감치 다섯 명을 후임자로 정해놓고, 돌아가시기 서너 달 전 한 사람을 정했고 그 분이 대표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공동체들이 창립자가 수명을 다 했을 때 그 공동체의 수명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지저스아미는 계속해서 새로운 지도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리차드 님은 최근에 한몸살이 지도력이 변해야 한다는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실제로 새로운 지도력을 세우는 과정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오래되면 그냥 그대로 있고 싶은 관성도 있을 텐데 새로워지려는 노력이 강하게 느껴졌고 거기서 에너지가 많이 생성되고 있는 것 같았다.

최근에 한몸살이 2세대들 중에 한몸살이를 떠나서 새롭게 개척한 청년들이 생겼는데, 어른들은 그들을 지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청년들이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하며 깊이 성찰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우리 한몸살이 안에서 할 수 없기에 떠나간 것이라면 우리한테도 놓치고 있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울타리 밖으로 나간 청년들을 지켜보면서 어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떠나간 청년들이 반항심이 커서 나갔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지저스아미 2세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에 개척한 청년들도 함께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왜 개척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미 많은 것이 갖춰진 한몸살이 구조에서 주체성을 발휘하는 것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분화하기로 했어요.”

갖춰진 틀 떠나 스스로 결정하는 삶


이렇게 분화·개척한 이들은 4명의 남성청년이다. 노스햄튼 부근에 따로 방을 얻어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면서 기존 한몸살이에서 도움을 받는 부분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분화·개척해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미 갖춰진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못해봤을 경험들을 하고 있어요.” 나가서 크게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재정을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우리가 번 돈을 어디에 쓸지 직접 결정하는 것이 가장 다르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번 돈은 전도 사역하는 데 쓰는 것을 당연시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또한 한몸살이에서는 먹거리와 생활필수품을 공동체 사업체 중 하나인 ‘Goodness Food’에서 공동 주문해서 받아 쓰는데, 이 청년들은 ‘Goodness Food’에서 주문하는 양을 최소화하고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서 전도의 기회를 만든다고 한다.

2세 청년들에게 한몸살이 밖에서 학교 다니면서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물었다. 한 청년은 학교에서 해날 축구를 하는데, 그걸 같이 못했던 게 아쉬웠다고 했다. 한몸살이에서는 너무 경쟁적인 스포츠를 금기시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이런 부분이 많이 유연해졌다고 한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한몸살이로 살면서 학교 아이들이 하는 것을 같이 못해서 힘든 것도 있지만, 결국 부모님이 사는 삶을 보면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고 삶의 본보기가 모두 한몸살이 안에 있기 때문에 함께 사는 삶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지저스아미는, 1960년대 히피문화가 퍼지던 때 반기독교정서가 강력하면서도 새교회운동이 활발히 펼쳐지던 때, 반기독교정서에 대응해서 구별되어 살려는 노력으로 세속적인 문화를 단절하며 성장해왔다. 그들이 하는 사역을 통해서 만나는 수많은 생명을 생각하면 겸허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필스돈, 프라이어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독자, 노숙자들을 보살피는 것이 개별 한몸살이의 소명이 아니라 이들에게 있어 시대적인 과제였던 것 같다.

순례하며 이런 새로운 창조성에 대한 영감을 꿈꿀 수 있고 유연하게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함께 하는 친구들이 내 동지로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는 것을 순례 내내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김나경 | 주중에는 IT회사에서 디지털 뉴스 관련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삼일학림에서 학생으로 배우며 교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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