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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길이 되어라
이현필, 유영모의 삶과 영성을 조명하다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 주체적, 창조적으로 신앙을 자기 안에 들이고, 새로운 삶과 사상을 보여준 선배들이 있다. 지금도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이들이 이어가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몸소 보여준, 이현필과 유영모를 조명해보았다.

이현필 선생(1913~1964)은, 29살부터 전라도 지리산자락에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농사짓는 수도공동체를 이루었다. 한국전쟁 참화로 인해 많은 고아들이 생겨나자, 헐벗고 병들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돌보며, 가난과 섬김의 삶을 사는 수도공동체(동광원)를 일구었다. 이들은 “수도하는 우리는 돈을 멀리하고 살아야 한다”며 청빈과 절제로 자족하기를 연습했다. 1948년 전라도 광주에 있는 동광원에서 그를 만난 유영모 선생이, 여기에 한국교회의 빛이 있다고 하면서 ‘빛고을 광주’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다석 유영모 선생(1890~1981)은, 성경과 유·불·선 동양사상을 아울러 가르치면서 창조적 사상운동을 펼쳤다.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는 선생의 호인 ‘다석’(多夕; 많은 저녁)이 지니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서구 기독교에서 빛은 악을 이기고 어둠을 극복하는 선의 상징이었다. 빛은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의식과도 같다. 그런데 다석은 오히려 빛을 끄라고 말한다. 빛, 곧 의식 때문에 더 큰 세계(영성)를 보지 못하고 자신 속에 갇혀버린다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빛 때문에 못 보던 밤하늘을 볼 수 있고 우주의 근원이 드러난다. 진짜 비어 있을 때 신비한 것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다석은 하나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했다. 더 근원적인 것을 만나려면 빛과 의식을 버리라는 것이 동양적인 기독교이다.”

이현필 선생은 동광원 신앙집회에 유영모 선생을 해마다 초청해 강의를 들었고, 동광원 강의 녹취가 훗날 책으로 나올 정도로 깊게 교류하였다.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는 “이현필 선생과 유영모 선생은 생각이 굉장히 다른 분이었다. 우리의 초대 사상가들은 이처럼 결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도, 그 진심이 소통되고 서로의 본질을 존경하고 들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었다”는 점을 부각하며, 조금만 달라도 견디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비추었다.


이현필 선생은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에게 병이 옮게 되자, 치료에 힘쓰기보다 더 아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기 몸에 주어진 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더 아프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린 데 대해, 김영락 목사(홍천 하늘길수도원)는 “죄 없이 고통당한 예수 앞에 온전히 자기를 드리고 싶고, 예수와 하나 되고 싶다는 철저한 십자가 신앙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이현필 선생이 보여준 신앙의 길은, 우리에게 물질만능과 경쟁의 시대에 욕망과 결핍에 끌려다니지 않고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 묻고 있다.

평생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고 살았던 이현필 선생은, 말년에 ‘파계’를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이 자신의 선행만 좇지 않도록 했다. “관 대신 거적때기에 싸고 맨 땅에 묻어서 거기가 무덤인지 아닌지 모르게 하라”는 뜻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유지는 지켜지지 못했다. 스승의 행적을 남겨 많은 후손이 그 길을 따르도록 묘를 초라하지 않게 하려던 제자들 때문이었다. 이정배 교수는, 유영모 선생 제자들과 함석헌 선생 제자들이 서로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고 하는 모습을 빗대어, “제자 노릇을 잘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스승들이 일러준 제자 된 삶은 무엇일까? 유영모 선생은 “누에가 뽕잎을 먹고 실을 뽑아내듯이, 성경을 읽고 제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은 자기 밖의 것인 바, 밖의 불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 속의 빛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라”는 것이다. 문자에 사로잡히지 않고 끊임없이 묻고(생각하고) 자신 속에서 불려서 궁극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길을 걷다가 길이 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정배 교수는, 유영모 선생이 평생 실천한 일식(一食)을 풀이하며 “일식은 문자 그대로 한 끼일 수 있지만, 대량소비, 대량생산 양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일식은 그와 맞서는 단순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사람이 최소한의 물질로 살아갈 때 그 물질은 더 이상 물질로서가 아니라 정신으로 역할을 한다. 단순소박한 삶을 인류가 선택할 때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세상을 거슬러 단순하게 살아내는 것이 21세기 세상을 구하는 십자가이다. 체제 밖을 상상하고 진리를 실험해보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만큼만 아는 것이라고 했다. 머리로만 아는 것, 그건 모르는 것보다 나쁜 것이다. 머리로 알던 신앙에서, 온 몸으로 아는, 그야말로 삶이 되는 것이, 이현필, 유영모 선생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가르침인 듯하다.

최소란 | 강원 홍천에서 이웃들과 더불어 마을을 일구며 생명을 키우는 삶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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