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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발판으로 이 사회를 똑똑히 본다면"
밀양 송전탑 피해 마을 김영자 할머니와 세월호 피해 학생 박은희 어머니 증언


이 시대 강도 만난 이웃, 밀양 송전탑 건설로 인한 피해 마을 김영자 님과 4·16 세월호 참사로 인한 단원고 피해 학생 어머니 박은희 님을 만났다. 밀양에서 기차 타고 먼 길 오시면서도, 10년 간 싸워온 기록을 담은 두툼한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백서>와 <밀양 투쟁 화보집>을 배낭에 지고 오신 김영자 님, 그리고 집 아닌 광화문에서 노숙 농성을 하시다 노란 우산을 쓰고 오신 김은희 님, 일상 자체가 운동이 되신 두 분은 현장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다고 하셨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건으로 갑작스런 고통 아래 살게 되었지만, 그 다음을 위해 또 다른 피해를 막아내고자 용기있게 앞장서고 있는 분들이었다. 사건 당사자로서 문제가 호도되지 않도록 예리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증언해주셨다<편집자 주>.



김영자 | 지금은 송전탑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송전도 조금씩 되고 있어요. 2005년 12월 5일 밀양한전 앞에서 북 치고 꽹과리 치면서 ‘76만5천 볼트 송전탑은 안 된다’고 외친 게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지난해가 10년째 되는 해였어요. 2012년 1월 16일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을 하셨어요. 이치우 어르신 논에 송전탑이 세워지게 되면서, 분신하시게 된 거예요. 대책위가 출범하고, 전기톱 앞에서 신발이 베어나가고 옷이 찢겨나가는데 나무를 끌어안고 한전 인부들을 막아냈어요. 힘없는 사람이 국가에 짓밟히는 일 없도록 지금도 싸우고 있어요.

국가에 짓밟히는 입장이 되니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투표할 때 기호1번밖에 없는 줄 알던 사람이었어요. 내가 겪으면서, 언론에 나오는 데모하고 싸우는 사람들 심정을 알 것 같더라고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민이 뭘 원하는지 들어봐야 하는데, 귀를 닫고 “그래서 돈 더 준다잖아요?” 이런 얘기나 하고 있어요.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승인이 났는데, 그게 왜 필요한가요? 우리나라 전력예비율을 보면 절대 모자라지 않아요.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는데, 이 싸움을 하면서 후쿠시마를 만났어요. 원자력발전소를 더 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밀양 송전탑 피해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연대하는 이들과 함께.


우리 세대에서 끝날 일 같으면 이렇게 안 싸우죠. 우리는 농사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잖아요.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니까, 사람들 전자파로 암 걸려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놔두면 안 되죠. 충남 당진 등 발전소 있는 곳, 변전소 있는 곳들 다녀보면, 주민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밀양 때문에 우리가 보상이라도 조금씩 받게 되었다고요. 밀양지역에 송전탑 69개가 세워졌지만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76만5천 볼트 송전탑을 신경기에 세우려다가 ‘제2의 밀양’ 만날까봐 철회했어요. ‘우리 싸움이 헛되지 않았구나, 국민들 외침으로 바뀌어가는구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13년 10월 1일, 3천 명 경찰 병력을 배치해서 주민들 제압하고 송전탑을 세웠는데, 3천 명이 몇 달을 주둔해도 우리나라 치안이 돌아가고 있으니, 참 우리나라 세금 헛되게 쓰는 거죠. 그리고 주민들 회유하라고, 시청 공무원 계장급 이상 54명을 4개 면에 풀었는데, 이야기 들어보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예요. 송전탑이 세워지면서 한 마을에도 찬성 주민, 반대 주민이 서로 말도 안 하고, 분열 수준이 아니라 아예 마을이 박살이 났어요. 그 모습을 제 자식이 다 봤어요. 엄마랑 같이 일하던 친구 아버지, 엄마들이 합의 쪽으로 돌아서고 도장 받으러 돌아다니는 걸 봤죠. 이 분열된 마음이 대물림될까봐 너무 가슴 아파요. 우리 집 대문 앞에 아들 친구 아버지가 농사짓는 밭이 있어서 눈만 뜨면 보는데, 예전엔 우리 집 화장실을 쓰곤 했는데, 이제는 말도 안하지요. 시골생활에 네 것, 내 것이 어딨어요? 조그만 일 있어도 우르르 가곤 했는데…. 왜 합의서에 도장 안 찍느냐 이거예요.

우리는 잘못된 법을 바꿔나가는 게 급하고, 우리처럼 억울하게 당하는 분들이 더는 없길 바라면서 투쟁하고 있어요. 바꿔가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힘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엄마아빠나 밀양 할머니할아버지나 적은 숫자예요. 그러나 국민들 힘을 믿고 싸우고 있어요. 우리 상황이 어떤지, 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정확하게 알아주시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바꿔나가야 안전한 세상이 될지 가슴 깊이 새겨주셨으면 해요.


박은희 | 저는 예은이 엄마이고, 안산의 한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안산시에서 작은도서관협회 회장도 맡고 있어요. 안산 시 외곽 시골에서 아이들 뛰놀게 하면서 책이랑 놀고 행복했어요. 우리 가족이 세월호 참사 대상자가 될 것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참사를 내가 선택한 게 아니죠. ‘그러면 이 자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봐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희생자들은 그걸 보게 하는 창이구나’ 생각되었어요. ‘옆에 있는 사람 빤히 잘못하는 걸 보고도 눈감아오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거대한 배를 침몰시켰구나.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숨겨져 있는 이 사회의 민낯을 보라’ 하는 창이죠. 유가족 한 분이 우리 아이를 발판으로 내줄테니 밟고 올라서서 이 사회를 똑바로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아요. 그런데 풀어야 할 숙제가 있기에 눈을 감기까지 이 문제를 놓지 못할 거예요. 저번에 학생들 형제자매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던데, 형제자매들이 부모가 해결하고 가지 못하면 나라도 해결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있더라고요. 기특하고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밀양 어머님 말씀처럼, 내 자식이 갈등의 골이 깊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낼까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 보고 있어요.

세월호 사건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촛불 문화제.


지난 일주일 오랜만에 가족들이 노숙농성을 했어요. 배가 아직 안 올라왔어요.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자마자 선체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을 하겠다고 해놓고, 계속 핑계 대며 미루고 있어요. 세월호가 외부 충격에 의해 침몰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있는데, 그러면 외형을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미 배가 파손되고 있어요. 태풍에 배가 견딜지, 반 토막 나지 않을지 염려가 돼요. 배 안에 아직 있는 아홉 명을 기다리는 미수습자 가족이 있어요. 이분들은 정부에 반하는 활동을 하면 수습을 안 해줄까봐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데도, 수습을 안 해주고 있어요.

지난 2년 동안 싸우면서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주저앉아 있으면 일으켜주시고 뒤에서 밀어 주신 손길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덕분에 우리는 안산분향소에 모여 있어요. 사단법인도 설립했고, 300명 좀 안 되는 인원이 모여 있는데, 희생 학생, 생존 학생, 교사, 일반인 희생자, 일반인 생존자들 가족이 다 들어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하고 하루씩 돌아가면서 매일 밤 당직을 서요. 부모들 중 반이 조금 더 되는 인원이 배·보상을 신청했고, 반이 조금 못 되는 사람이 배·보상을 거부하고 싸우고 있어요.

다행인 것은, 배·보상을 받았을지라도 아이들 명예를 훼손하거나 진상규명에 치명적 위협을 가하는 일이 생기면 그분들도 다 나오세요. 결정적 순간마다 서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저분들이 배·보상을 받았을지라도, 진상규명은 우리와 같이 원하는구나, 그리고 저분들은 경제적 이유나 가치관이 달라서 배·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부모로서 부끄럽지 않으려 하는구나, 확인하는 순간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세월호특별법 개정과 선체 인양을 위해 우리는 계속 노력할 거예요. 전국 곳곳에서, 아닌 것을 보고 침묵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실제적 성과가 있었는지, 왜 연장을 왜 해야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성과를 떠나서, 법으로 보장된 1년 6개월을 정확히 지켜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법의 해석에서 문제가 있어요. 세월호특별법 공표가 작년 1월 1일이었고, 3월에 특조위 15명이 임명장 받고, 직원 구성되고 월급이 지급된 게 8월 초예요. 정부는 입법을 시작으로, 우리는 실제 예산 집행을 시작으로 봐요. 활동 ‘연장’이 아니라 ‘보장’이 정확한 말이에요. 대통령도 여한 없이 조사하게 해주겠다고 했죠. 그렇지만 조사가 매끄럽게 안 되었어요. 8월에 예산 집행되고, 조사가 10월부터 시작되어 12월에 청문회 한 번, 2월에 한 번 했어요.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잠수사 500명 투입이 거짓이었다는 거예요. 증인으로 나온 해경들이 자기네 입으로, 보고서에는 30명이라 쓰고 언론에는 500명으로 썼대요. 1차 청문회에서는 ‘왜 구조하지 않았나?’, 2차 때는 ‘왜 침몰했을까?’ 주로 물었어요. 과학적으로 1초에 17도를, 150미터 정도 되는 배가 돈다는 것은 조타기만으로 불가능하다고 나와요. 침몰 원인 중 과적이 있는데, 고속도로도 톨게이트마다 트럭 무게를 재도록 하는데, 배에 짐 실을 때는 무게를 안 쟀다고 해요. 그냥 컨테이너 개수로 계산했대요. ‘전문가인데 왜 이렇게 엉터리로 계산했습니까?’ 물었더니 위에서 시켜서 했다고 해요. 청문회 하다가 매번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단당하니까 어느 선 이상 갈 수가 없어요. 재판법정에 앉아있을 때 우리가 궁금한 건, ‘처음에 왜 외면하고 돌아갔는지’, ‘500명 이상 탔는데 왜 30명도 안 되는 구조인원만 보냈는지’였는데, 검사들은 기소할 때 ‘왜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냐’에 두고 기소해서, 그것만 질문해요. ‘왜 배 안의 CCTV가 다 꺼졌는지?’ 그런 질문은 없어요. 그래서 특조위는 우리 마음껏 조사할 수 있어서 필요해요. 철근 실렸다는 사실도 특조위에서 밝힌 거예요.

[질문] 마을에서 합의해준 분들도 있고, 계속 싸우는 분들도 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6월에 행정집행 2주기로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오시고 송전탑 세워진 현장에서 음악회도 있었어요. 찬성하고 도장 찍은 분들은 그 자리에 못 오시는 거예요. 너무 안 됐더라고요. 그분들도, 언제 언제까지 도장 안 찍으면 못 준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없었으면 도장 찍어주지 않았을 거예요. 2013년 10월 1일 경찰병력이 동원될 때 126번 현장에 나 혼자 올라가 있었는데 경찰병력이 계속 들어왔어요. 그 순간 ‘송전탑 공사를 막을 수는 없겠구나. 그 밑에서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어울리며 살겠구나’ 생각했는데, 찬성·반대로 갈리면서 마을공동체가 예전처럼 되기 힘들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 누군가는 얘기해야 되는 일이예요. 같이 마음 모아 싸워야 이 나라 법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김준표 | 한 주에 한 번 , 6개월 남짓 배운 풍물의 맛을 이제 조금 알아가는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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