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을 즐기고, 작은 숲을 만들자"
우리 시대에 다시 곱씹어보는 관계론, 삶의 태도
신영복 선생이 지난달 15일 별세했다. 선생이 20년 옥중생활에도 부단히 자기 성찰을 하며 깨달은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 내용을 토대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출간됐고, 동양고전을 새롭게 독법하면서 관계론으로 세상을 보고, 나아가 문명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마을신문에서는 우리 시대 중요한 화두를 남긴 선생의 삶과 사상을 동시대인의 삶의 언어로 재해석해보는 좌담을 마련했다. 좌담은 2016년 1월 29일 진행됐고, 신은진, 배지은, 신원, 전선기, 정인곤 님이 함께하였고, 김준표 님이 녹취를 맡았다(편집자주).
정인곤: 우리 시대에 그의 존재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봅니다. 해방과 분단, 독재를 경험한 시대가 가고, 그런 시대에 드러난 진실, 새싹 같은 존재였다 싶습니다. 삶 자체에서 드러난 새로운 학문을 제시한 분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시대를 자본독재 시대라 하는데 우리 시대를 뚫고나가는 지혜가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통제된 곳(감옥)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시대에 새로운 것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질문이 듭니다.
전선기: 소위 성공한 이후 조명 받기 이전 젊은 시절의 선생 모습을 살펴보면서, 이분은 한 인간으로 자기에게 모순 없이 일관되게 살아오셨구나 느꼈습니다. <청구회 추억>이라는 글을 보면 가난한 아이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독서모임을, 잡혀가기까지 2년 넘게 하세요. 이분은 젊어서부터 일상의 삶에서 이미 스승으로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군교도소에서 하루 두 장 나눠주는 휴지에 적은 글들을 집에 보내달라고 헌병에게 부탁하는데 그 헌병이 정말 집에 전해줍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선생의 재판 내내 동석했던 헌병이었는데, 권력이 어떤 식으로 말하든 상식 있는 젊은이 눈에 선생은 죄인이 아니라는 감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 헌병이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거예요. 삶으로 증언하고 가르쳐주신 참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원: 그 시대를 사셨던 분들의 왜곡이 있다 생각돼요. 그 시대에 투쟁했던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잖아요. 그런데 선생은 소통이 어렵다거나, 꼰대 같다거나, 전형적 진보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 바닥, 그 진영을 벗어나면 소통이 어려워지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으셨던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실마리가 감옥에서 살았던 태도에 있다고 생각이 돼요. 당시 사상범들 사이에 감옥에서 어떻게 지낼 건가 논쟁이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화 대상으로 볼 거냐는 논쟁이죠. 자신들은 엘리트이지만 저들은 범죄자이면서 하층민이니까 소통의 대상으로 안 보는 거죠. 의식화할 수 없고, 사회 진보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거죠. 대부분 사상범들은 감방 동기와 관계 안 맺고 지냈고. 또 감방생활이 인생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도록 공부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선생은 감방 동기들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은 거잖아요. 시대가 지나간 뒤에는 유효성이 사라지고, 소통이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으셨다 생각이 돼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그 시대를 넘어서 소통 가능한 지식인이 드문 것 같아요.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생각합니다.
전선기: 어느 절도범이 계속 잡혀서 감옥에 들어왔는데, 선생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단식투쟁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만은 “너는 안 돼”라고 경멸하거나 설교하지 않고, 매번 따뜻이 맞아주었던 거죠. 저는 교사라서 매일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고 훈계를 하게 돼요.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아이에게 네 삶을 주체적으로 책임있게 살라고 훈계하지만, 일년 내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아이는 매년 늘 있거든요. 그런 아이를 포기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계속 따뜻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쉽지 않아요. 끊임없이 잔소리하면서 인격이 만들어진다 하는데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 이전에 대하는 태도인 것 같아요. 내 말이 무화될 때조차도 아이를 붙들고 동고동락하려는 자세가 내게 있는가 돌아보게 하는 선생의 일화입니다.
신은진: 선생이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어도 떳떳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을 둘러싼 시대와 환경이 그렇게 살게끔 만든 것이라 생각했어요. 자기 내면이 강한 것도 이유겠지만, 그렇게 무너지지 않고 일관되게 살아오신 이유는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분이 꼰대가 되지 않고, 소통 안 되는 사람이 되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도, 주변 관계가 그를 인간답게 대하셨기 때문에 다를 수 있었겠다 생각돼요. 감옥에서 관계 맺고 배우겠다 생각하니까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겠다 생각했어요.
전선기: 염려가 아니라 대화의 편지를 주시면 좋겠다고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요. 또 아버지가 집필하는 책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아버지 문체의 약점을 이야기해요. 이렇게 이분은 동양고전이나 부모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그 시대의 권력에 대해서도 당당히 할 말을 하고 권위에 쪼그라드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는 것이 주목되었어요.
또 하나, 이분이 사상범으로 갇혔는데 연좌제 있던 시대에 가족들이 의절하지 않고, 부모・형제・형수・제수씨와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이분에게 가족이 진정한 공동체 역할을 해낸 거죠. 공동체가 자기를 지지하고 계속 대화하면서 감옥생활 중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죠.
배지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여름 징역살이를 설명하며 옆에 있는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고 미움 받는다는 비극의 설명은, 관계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성찰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간적 친밀감을 넘어서 깊게 만나가는 것은 뭘까, 서로의 한계를 넘어서 깊은 관계로 넘어가는 것은 뭘까 질문을 했었어요.
자신을 알려면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보고 관계 맺는 나를 생각해봐야 한다는데, 지금 저는 같은 방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 말을 체험한다 생각해요. 옆에 있는 존재를 이해하고자 나를 이해해야 했고, 옆의 존재를 통해 내 한계를 보고, 내 옆의 존재를 위해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해져간다 생각했어요. 관계를 맺다보면 내가 마음을 열어주고 들인 만큼 실망하기 싫은 마음이 크다는 걸 느껴요. 최근에 이런 내 모습이 옆에 있는 사람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돕는다는 건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고 걸어가는 것이라는 글이 그때 생각났어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 되는 관계를 지금 배우고 싶고, 살고 싶다 다짐했어요.
정인곤: 저는 2003년에 <더불어 숲>을 읽었는데요, 이 책은 1년간 여행 다니면서 쓴 묵상 글입니다. 세계여행 안 해본 저에게 세계사, 우리 세계를 이해하는 교과서 같았던 책입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고장이라 하지만 식민지 희생 위에 선 것이라는 관점이 새로웠고, 만리장성에서 뛰어난 건축술을 볼 수 있지만 피땀 흘린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봐야 한다는 따뜻한 시선이 있었어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다양한 관계를 주목하는 눈이 세계사 이해에 큰 관점이 된 것 같아요. 선생은 로마 콜로세움이 여민락(與民樂)이 아니라 우민의 광장이었다 표현해요. 사람들이 콜로세움에서 즐기면서 취해가고 비판의식을 잃게 만드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읽은 것이 2004년에 나온 <강의>였는데 군대 갈 때 사서 들어갔어요. 두 개로 쪼개서 주머니에 넣고 훈련 중간 중간 쉴 때 읽었어요. 한비자, 즉 법가사상을 평가하면서 기억나는 건 ‘법으로는 안 된다’였어요. 법의 엄중한 시행을 한비자가 추구하였는데 권력에 의해 제거됩니다. 권력 자체는 법 위에 서려고 하기 때문에 한비자를 없애버린 거죠.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보면서는 큰 것보다 작은 것, 작은 것의 핵심은 관계라고 정리가 되었어요. 관계 맺을 수 있는 규모에서 새로움이 나온다 생각했어요.
신은진: 누군가 이미 해석해놓은 권위에 매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강의>에서 느껴졌어요. 제가 과학을 공부하고 있어서인지 그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권위에 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과 우리 시대가 소통할 수 있는 핵심적인 주제들을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제가 우주나 자연을 기계적으로 생각해왔다는 것과 존재를 실체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일상적으로는 자본의 논리에 갇혀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만 해야겠다 생각하는데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제 처지를 돌아볼 수 있었어요.
노장사상과 불교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읽으며, 수학, 물리를 제가 어떻게 이해하고 싶은지도 알게 되었어요. 예술가들이 예술을 하는 이유는 대상이 그리워서, 그 대상이 되고 싶어서 그린다는 말씀이었어요. 음악을 하는 것도 음악이랑 하나가 되고 싶은 거였고, 어떤 대상이 너무 그리우면, 그리면서 만족이 되는 거예요. 수학이나 물리도 나 자신이 그 이치가 된 듯이, 내가 떨어지는 사과가 되듯이 온몸으로 느끼고 이해하고 싶었구나 생각 되었어요.
가장 기억나는 건 묵자였는데, 묵자는 세상의 여러 문제가 ‘별애’,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것에서 생긴다고 말해요. ‘별애(別愛)’에서 ‘겸애(兼愛)’로 가야 한다, 즉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해요. 최근 느낀 것은, 제가 옆 사람이 필요한 것을 잘 못보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 옆 사람을 정말로 내 가족처럼 생각하기 어려워한다는 것도 알았어요. 살면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을 내 몸처럼 여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원: 20년 감옥생활에서도 무언가를 배우셨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배울 것은 있을 것 같아요. 적당히 거리두고 지내는 것에 제가 점점 익숙해진다 생각되고, 직장 동료들을 보면서 같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전제를 두고 만나면 관계에서 배울 기회를 놓치겠다 생각돼요. 직장에서 아무것도 배울 것 없다는 이야기를 직장인들이 많이 하는데 이런 건 핑계할 수 없다 생각해요.
또 하나 주목한 것은 자기 생각을 계속 소통하려는 것인데 엽서를 기록해서 남겨야겠다는 신념은 운동성이라 생각이 돼요. 선생 시절에 대학생이 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진로를 결정하느냐보다 이 사회를 어떻게 할까라는 인식이 공유되었던 변혁의 시기였지요. 일주일 내내 세미나를 지도하면서 대학시절을 보내셨는데, 시대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돼요. ‘바다’라는 시를 보면 모든 게 바다로 간다, 기어코 바다를 만들어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신념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배우면서도 먼 역사적 지향을 가지고 사신 것 같아요.
정인곤: 현재는 과거의 축적이고 과거를 추적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이 감옥에 간 것은 시대가 강요한 것이지만, 무기수로 살았던 삶이 시간에 대한 이해나 세계 이해에서 사형수와 달랐을 거라 주목이 되었어요. 그분이 관계를 중심으로 산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세계의 무기수로 산다는 것을 깨달은 것 아닌가 싶어요. 감옥에서 나가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않고 감옥에서 사는 삶을 택한 것은 함께하는 관계가 미래이고 삶의 전부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국가 폭력의 결과였지만 본인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것이죠.
그런 삶에서 길어올린 관계가 큰 울림을 준다 생각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우리 삶을 밝힐 지혜는 어느 현장에서 가능할까 질문이 들어요. 당시의 편견이나 지배권력이 강제하는 삶을 선생은 뒤집으셨는데, 요즘은 그것이 ‘무능’인 것 같아요. 사회적 타살의 언어죠. 청년세대에게 붙은 딱지 같은 것, 우리 시대 이후 살아갈 지혜가 거기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배지은: 우리가 증언할 수 있는 작은 숲, 작은 기쁨을 생각했는데, 내가 변할 생각이 없으면서 사회 변화를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아요. 나의 변화와 내 관계의 변화가 사회 변화의 시작인데 그 과정이 즐겁고 지치지 않으려면 함께하는 사람들과 쌓여진 사건, 애정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돼요. 내 변화에서 시작해 커지는 관계망의 변화가 작은 숲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숲을 이루어가면 큰 숲이 되어 만나지 않을까 합니다.
김준표 | 마을신문에 글 쓰고 꼴 잡는 이로 일합니다.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며 아내와 여섯 살 아이 그리고 마을의 벗들과 함께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