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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삶을 노래로
마을에서 실현하는 문화주권

밝은누리움터 여는 잔치_2014년 7월 17~19일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강연


마을공동체 삶이 인류문화의 희망이라고 입으로 글로 이야기했는데,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 막상 서니까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저는 4년 전부터 시골에 들어가서 살고 있습니다. 산골마을인데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의 삶이 참 행복합니다. 여기 있는 어린이들이 저의 스승이 될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저는 인문학을 마을공동체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인문학이고, 가장 인간다운 삶이 마을공동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민속학이란, 토박이 한국인다운 삶을 살기 위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박이 한국인다운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하면 시골에 있습니다. 저는 민속학과 학생들과 자주 마을 답사하러 시골에 갑니다.

도시에는 식당이 엄청나게 많은데 밥 굶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골에는 밥 굶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아파트가 많지만 노숙인이 곳곳마다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는 집 없어서 노숙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옛날에 도둑집이라고 있었습니다. 보름달 뜨는 밤에 마을 청년들이 울력으로 집 지어서 신혼부부가 살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마을공동체라는 토대 속에서 자기가 필요한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갔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넘쳐나지만 시골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골 없는 도시는 지속가능한가? 불가능합니다. 도시는 농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바다가 메마르게 되면 배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도시는 거대한 농촌 위에 떠 있을 때 건강합니다. 그런데 현재 시골이 쪼그라들고 있는데 모두 시골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골에 가면 문화주권에 관해서 지속가능한 삶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주권이라고 하면 주로 정치적인 것만을 떠올립니다. 주권에는 정치주권뿐 아니라 경제주권과 문화주권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왜 시인만 시를 쓰는가, 왜 교수만 논문을 쓰는가, 왜 가수만 노래를 부르는가? 이것이 문화독점 현상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시를 쓰고 노래로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자기 인생을 노래로 부를 수 있었습니다. 민요에 자기 사설을 넣어 부를 때 잘 부른다고 했습니다. '진도아리랑'으로 수집된 사설이 300여 가지라고 합니다. 소리꾼이라고 해서 더 잘 부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나 불렀다는 것입니다. 일하면서 보리타작하면서 물레질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와 일이 함께 갔습니다.

지금은 문화주권을 문화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정치주권은 민주화되고 확대되었지만 문화주권은 축소되고 문화독재로 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만 문화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문화를 공유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문화를 사고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 수 있는 것만 유통되고 팔릴 수 있는 것만 생산합니다. 문화가 상품이 되면서 생겨난 폐해입니다.

근원적으로 인간은 일하고, 놀고, 빌고, 살아갑니다. 일 안하고 살 수 없습니다. 놀지 않고 일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이치를 마을의 삶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옛날 마을에서 어떻게 일했습니까? 울력을 했습니다. 과부도 장애인도 먹고 사는 데 아무 걱정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능력에 따라 일을 했습니다. 토지는 사유화했지만 일자리는 모두한테 있었습니다.

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들은 세시풍속을 따라 단오에는 그네뛰기, 씨름을 했습니다. 돈 들지 않고 그때그때 자연물에서 만들어서 잣치기, 팽이치기 같은 것을 했습니다. 팽이 만들면서 공작기술을 익히고, 연 만들면서 바람의 이치 등을 배웁니다. 줄다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줄을 꼴 때부터 놀이입니다. 풍물 치며 짚을 엮고, 신명나게 노래하고 놀이했습니다.


마을에는 공동체신앙이 있었습니다. 마을에 들어갈 때 아름다운 고목이 있으면, 그것은 마을사람들이 섬기던 나무입니다. 나무가 우리 마을을 지켜준다고 해서 신앙했습니다. 사람들이 섬기고 신앙했기 때문에 그 나무는 장수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을공동체 신앙은 민주적이고, 그 신앙으로 인해서 마을을 지켜나갔습니다. 그 믿음을 미신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초월적인 영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감이 실제로 우리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냥 공부하는 것과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고, 몸에 질병이 있는데, 기도를 열심히 하면 치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집니다. 보름달이 뜰 때 세 번 절하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으면서 비는 사람은 이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빌었는데도 안 이뤄지는 것은, 소원을 빈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마을운동을 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자고 이야기합니다. 외국에 가고 대도시에 가면 출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을도 잘 모르면서 세계를 안다는 헛된 지식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지식층이 그렇게 이끌어왔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깨닫고 있습니다.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로 살아가면서 더 풍성해지자는 것입니다.

임재해 |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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