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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합류와 전환: 종교, 과학, 철학의 견지에서

밝은누리움터 여는 잔치_2014년 7월 17~19일
이정배 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장 강연


오늘 새벽 다섯 시에 이곳으로 오면서 무척 설렜습니다.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이런 시골에서 이렇게 똘망똘망한 눈을 지닌 어린 학생부터 선생님, 청년, 어른이 같이 공부하는 모임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구나, 가슴 벅찼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 자리에 앉아서 듣고 배우고 싶고, 제가 속한 곳곳에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계속 성장이라는 열매를 나눠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성장이 계속될수록 우리 사회는 도처가 위험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성장 중독에 걸려 있는 게 우리 문명의 문제입니다. 지금 과학과 종교와 철학이 문명의 전환을 돕는 징조들을 우리 주변에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징조들을 깨닫고, 예감하고, 그에 맞게끔 살아내는 일이 오늘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과학이 발달했지만, 지금 과학은 부분적 확실성만 있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하는 전공영역에서만 확실하고, 그 부분적 확실성에 근거해서 지나치게 목적지향적이 되어버렸어요. ‘에너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전을 만들어야 한다’, ‘농산물을 증량하기 위해서 유전자를 조작해야 한다’, 그 영역에서의 목적만 추구하면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까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위험사회가 되는 거예요. 전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종교가 할 일인데, 근대 과학은 사실의 학문, 종교는 가치의 학문으로 철저히 분리되었어요. 그래서 기독교는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만 자기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더 이상 종교가 자연영역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과학이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학문이어도 안 됩니다. 종교와 과학은 다시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종교를 보면 저마다 다른 종교들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특수한 언어의 세계 속에 갇혀버렸어요. 하지만 자기 종교만 아는 사람은 자기 종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너'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북아프리카의 사유에서 도움을 받았어요. "I am because of we are(우리이기 때문에 나다)." 우리 엄마, 우리 아빠, ‘나’는 곧 ‘우리’라는 개념 안에 들어있죠. 하나님을 복수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어떤 하나의 틀 속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죠. 유태인에게는 유태인처럼 되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되어 살았어요. 기독교가 특수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보편성을 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 역시 두 가지 관점에서 변화하고 있어요. 근대는 동일성의 철학이었어요.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이, 유색인에 대해서는 백인이, 동양에 대해서는 서양이, 동양종교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자연에 대해서는 인간이 기준이고, 그 기준에 모자라면 늘이고, 길면 자르고, 이게 바로 동일성의 철학이에요. 차이가 인정되지 않고, 차이는 곧 차별이 될 뿐이에요. 그러다 타자성의 철학이 나왔어요. 지금까지 남자가 기준이고 여자는 남자 입장에서 볼 때 뭔가 결핍된 존재였다면, 타자성의 철학에 의하면 남자인 나는 절대로 여자가 될 수 없어요. 내가 그렇게 될 수 없는 이 타자를 나에게 있어 초월과 같은 존재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차이는 차별이 아니라 곧 초월이 돼요. 이게 타자성의 철학의 핵심이고, 철학의 변화예요.

또 하나는 타자성의 철학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개체적으로 각각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거대한 자본주의 세력을 이겨낼 수 없어요. 보편적인 악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보편성이 필요해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잔치와 같다고 설명했어요. 아침에 온 자나, 저녁에 온 자나 그들에게 임금을 똑같이 나누어주죠. 하루에 필요한 돈은 똑같으니까요. 이윤을 추구하고 노동시간을 계산하는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하나님나라는 조그마한 겨자씨가 너무 커져서 주변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너의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라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모습은 우리 세상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더 잘살고 싶고,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체제 안에서만 아웅다웅하고 체제 안의 논리로만 사유하지 않고, 사건을 통해서 체제 밖을 향하고 체제를 뛰어넘게 하는 사유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철학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는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수행적 진리가 중요하다. 사람은 많이 아는 것 같아도 행한 것만큼만 아는 거예요. 자기가 행하지 못한 것은 아는 게 아니죠. 사건을 여기서 사는 사람이, 우리 시대 문명을 바꿔낼 수 있습니다.

근대를 성찰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는데,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으로 보던 중세기, 합리적 이성으로 미래를 낙관하는 근대의 인간 이해를 넘어,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게 새로운 인간관입니다. 겉은 화려하고 두꺼운 옷을 입었지만 내면이 허한. 그런 인간이 자기를 미루어서 다른 사람 역시 그렇게 연약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속에서 공감하는 인간이 되려면, 최소한의 물질로 살아가는 힘을 회복해야 해요. 우리 정신으로 살아가는 힘,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 바로 여러분이 지금 실험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최소한의 물질로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물질을 나눌 수 있고, 공감하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자연은 '뉴 푸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새로운 의미의 가난한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 새로운 보편성이라고 한다면, 정신과 물질을 아우르는 삶을 통해서 체제 밖을 사유하고, 홀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해나가야 하는 것이죠.

이정배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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