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책 한 권씩 낼 때마다
말의 무게, 관계의 무게를 느끼다

수유역과 합정역 사이를 지하철로 오가며 출퇴근을 한 지 만 5년이 되었다. 합정역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출판사에서 주로 원고를 다듬고 고쳐서 책으로 내는 일을 하고 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약 두어 달이 걸려 책이 나오면 그 독특한 냄새가 좋고,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기쁨도 누린다. 그래서 이전 직장에서부터 9년째 출판 일을 하고 있다.

좋은 책을 내려면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래서 출판 강좌를 듣거나 출판 프로그램을 배우기도 하고 출판 잡지도 열심히 구독했다. 책이 손에 쏙 들어오고 글이 편안하게 눈에 들어오는 책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출판계에서 인정받고 독자들이 기억해주는 편집자, 기획자가 되고픈 욕망이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술은 느는데, 내가 만드는 책들이 사회에 어떤 반향을 주는지 고민이 깊어졌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책이 필요할까, 그 답은 아무리 편집 책을 들여다봐도 나오지 않았다.

책을 만들고 팔아서 수익을 내지 못하면 출판사는 문을 닫게 된다. 그래서 어떠한 가치를 이야기하는 책과 많이 팔릴 수 있는 책 사이에서 가치와 생존논리가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다. 내가 하는 또 다른 업무는 우리 출판사가 내는 해외도서 관리다. 8월이면 많은 미국 출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출판사들과 접촉한다. 많은 경우 저자의 명성이나 해외에서의 판매 부수에 따라 계약이 결정된다. 그리고 국내 원고는 한 달에 10여 건, 많게는 30여 건의 원고가 메일로 들어온다. 원고에 대해 가벼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려면, 공부가 필요했다.

책은 그 특성상 자신의 삶과 아무 관계없는 자료를 짜깁기해서 감동적으로 써내는 것이 가능하다. 더구나 편집자는 늘 자기 책을 내달라는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내 수준인 줄 착각하며 기만에 빠질 위험이 크다. 좋은 책을 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내용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삶을 보게 된 것이다.

직장인이 되기 전 내가 갖고 있던 직장인의 상은 까다로운 상사, 싫어도 참석해야 하는 회식, 늦게까지 이어지는 야근 등이었다. 졸업 이후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던 나는 왠지 출판사에 들어가면 이러한 관계를 피할 수 있고,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환상이 있었다. 그런데 책 한권이 나오기까지 얽히고설킨 관계망 속에서 일해야 했고, 정확히 판단을 내리고 소통하며 풀어가야 할 일이 많았다.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자리에서 점점 책임이 커지는 자리로 올라갈수록 소통의 능력, 판단력은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가장 먼저 소통할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내 방향이 없으면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오히려 소통을 그르치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 기대했던 '독립적으로 일하는 직장'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그런 회사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순수한 마음, 착한 사람이 모여도 권력은 작동한다.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관계망 밖으로 나가야 할 텐데 그곳은 삶이 계속되는 한 그런 곳, 그런 때는 없었다.

권력의 지배를 받기 싫어하는 마음 뒤에 '나를 억압하지 말라'는 무의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관계 속에서 일하려 하지 않고, 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잊고 자족하는 개체로 살아가려 한 게 아닐까? 동료와의 관계에서 상대를 고정된 사람으로 보려는 마음을 버리고 관계를 새로이 맺어가는 게 필요하다. 살아 있는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보이더라도 거부한다면 생명의 관계를 살 수 없을 것이다.

직장은 내 삶을 결정짓는, 내 삶을 다 담아내는 틀이 아니다. 그러한 직장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그 안에서만 나의 삶을 생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을 함께하는 관계 가운데 성찰하게 되었다. 더 큰 삶, 더 큰 관계에 대해 늘 열려 있는 자세, 직장이라는 곳에 함몰되지 않도록 나를 지켜봐주는 관계가 소중하다. 특정한 직장을 다니는 존재로 나를 규정하려는 위험에서 지켜주는 관계망이 없었다면 나도 큰 괴리를 만들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잔소리와 애정 섞인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들 덕에 오늘도 삶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김준표 | 책에 대한 애정과 출판문화에 대한 고민 속에 편집 일을 하며 마을신문 기자로 즐겁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뉴스편지 구독하기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방문자수
  • Total :
  • Today :
  • Yesterday :

<밝은누리>신문은 마을 주민들이 더불어 사는 이야기, 농도 상생 마을공동체 소식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