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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휴가 내서 순례길 떠나다
길벗들과 함께 걸으며 몰랐던 역사 이해하고 새로운 희망 품고

윤동주 생가에서.


8월 22일부터 27일까지 연변-백두산 생명평화 고운울림 순례로 연길에 다녀왔다. 연변 지역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지만,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이 지역에 얽힌 현대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듯하다. 별다른 기억이 없는 이유는 아마도 연변이 사회주의국가에 편입되었기에 역사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적인 교류 자체가 뜸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순례 길에 동행한 친구들과 함께 흩어진 겨레와 항일운동 역사를 공부하면서 연변 조선족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책으로 1900년대 전후부터 해방과 분단체제 초기에 얽힌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에 방문해서는 현재를 살고 있는 조선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다. 연길에서 만난 중국 분들은 조선족, 한족 가릴 것 없이 대체로 친절하고, 성실하고, 호탕했다. 그곳을 가기 전에는 주로 그 반대의 것을 생각했으니, 내가 얼마나 왜곡된 미디어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 다녀온 조선족 분들 중 대다수가 한국 사람의 냉대와 무시로 많은 상처를 받고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혐오, 우월의식. “미움과 거짓을 만드는 대립과 갈등을 푸소서.”

올해는 중국 개혁개방 40주년이다. 개혁개방 바람이 연길까지 불어 닥쳤음을 도시 외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단지형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서점에는 주식 관련 책들이 한쪽 책장에 가득 채워져 있고, 중심가에는 글로벌 자본의 상징인 다국적기업 커피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한때 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은 50%를 넘었지만, 지금은 30% 대로 많이 떨어졌다. 한국이나 일본으로 외화벌이를 나서는 이들이 많고, 젊은이들은 취업이나 학업 등의 이유로 중국 내륙 쪽 대도시로 떠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조선족 분들은 외화벌이로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데, 오늘날 조선족은 대부분 민족이라는 정체성보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강력한 국가 체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연길 시내를 둘러보면서 지금 조선족에게서 고유한 민족의식을 찾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일운동과 끈질긴 개척정신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조선족의 역사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실천함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연길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룡정이 있다. 1900년대 초기에는 룡정을 중심으로 한민족 집단 이주와 정착이 있었기에 당시에는 연길보다 룡정이 더 번화했다고 한다. 룡정 시내에서 또다시 버스로 20분 이동하면 명동마을이 나온다. 나지막한 산과 언덕이 포근하게 감싸고, 고요한 천이 흐르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 지도자였던 김약연 선생이 세운 명동교회가 있고, 바로 아래쪽에 윤동주 생가가 있다.

마을 중심에는 명동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마을학교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이 나고 자란 마을과 학교. 어두운 시절을 밝게 빛낸 별들이 저절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단 이주한 이들은 함께 번영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항일운동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이루고, 새 일꾼을 길러내기 위한 준비와 실천으로 교육과 삶이 통합된 마을 운동을 실현했다.

연길은 국경지역과도 가까운 곳이다.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두만강 중류의 국경도시 도문이 있다. 이틀간 비가 와서 물이 불었는데도 두만강 강폭이 생각보다 좁았다. 마침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두만강문화관광축제” 기간이어서 중국 쪽에는 많은 사람으로 붐볐지만, 북측은 인적이 드물어서 매우 대조적이었다. 아무리 축제기간이더라도 국경 쪽은 삼엄한 기운이 감돈다.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 바로 앞에 중국과 조선을 잇는 그리 길지 않은 다리가 있는데, 다리의 일부 구간만 관광객들에게 허용되어 있을 뿐이다. 어서 빨리 저 다리를 자유롭게 오가는 날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굳은 표정의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파란 하늘을 신나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 솔릭 여파로 백두산에는 갈 수 없었다.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날씨가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기차 타고 백두산에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날 하늘이 정말 쾌청했는데,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웅장한 천지를 봤다. 뜻밖에 선물을 가슴에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함께 걸었던 명동 마을길, 두만강 너머를 바라보며 통일을 빌었던 시간, 연길 시내를 거닐며 평화롭게 어울렸던 시간들이 좋았다. 몸과 마음에 남은 순례의 흔적을 고이 간직하고, 일상에서 더불어 마을살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생명과 평화 실천하는 삶을 곱게 이어가야겠다.

김현기 | 인터넷서점에서 김과장으로 일하는 12년차 직장인. 마을 친구들 덕분에 속세에 찌들지 않고 살 수 있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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