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민족의 정신을 깨운
가나안복민운동의 철학, 새로운 과제와 꿈


일가는 1909년 경기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김춘교와 김공윤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춘교는 와부면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할 만큼 민족의식에 투철한 한학자였지만, 기독교신앙과 사상을 받아들여 손수 농사짓는 농사꾼이 되었다. 일가는 부친 김춘교로부터 민족의식과 근로정신을, 모친 김공윤으로부터는 봉사와 희생정신을 물려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일가는 1925년 양주에 있는 광동중학교에 진학한다. 이 학교는 몽양 여운형이 설립한 학교로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교육이념이었다. 광동중학교를 졸업한 일가는 민족 자주독립이라는 꿈을 안고 만주로 건너간다.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치, 군사적 힘을 가져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주권 회복은 정치, 군사적인 힘으로가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과 실력을 구비하고 서로 협동하는 길임을 인식한다. 일가는 귀향 중 평양에 머물게 된다. 이때 갑작스러운 발병(發病)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는데 이 경험은 그가 평생을 두고 기도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일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부친 유언을 따라 기꺼이 농사꾼이 되기로 했다. 일가는 소작농의 증가는, 농민의 무지와 지식인들의 농민, 농촌 회피의 결과이며, 진정한 주권 회복은 지식인들이 농사에 참여하는 것과, 기존 농민들의 근면성실에 있다고 보고 노동의 가치를 심으려는 차원에서 농사꾼이 된 것이다. 당시 농사를 회피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첫째, 농사는 이윤이 적다는 인식에 대해, 성실하게만 하면 농사만큼 큰 수확을 올리는 사업이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농사는 힘이 든다는 인식에 대해 농사야말로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유익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셋째로 농사는 천대받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농사는 생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으로 존경받아야 할 직업이라고 반박한다. 넷째로 농사는 희망이 없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농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희망차고 가능성이 있는 직업이라고 반박한다. 다섯째로 농사꾼은 우매해진다고 하지만, 수확의 교훈이나 노동의 교훈은 인간을 가장 진실되고 성숙하며 지혜롭게 만들어준다고 반박한다.

주권 회복을 위한 대안사회운동

농사꾼이 된 일가는 24세의 나이로 양주 봉안에서 이상촌운동을 착수한다. 일가가 꿈꾼 이상촌은 ‘오곡이 익어가며, 꽃이 만발하고, 벌과 나비가 춤을 추고, 집집마다 젖 짜는 양이 있고, 교회가 있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되어 하나님을 믿고, 모두가 근로하며 생산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므로 정신적, 영적 안위를 얻을 수 있는 에덴동산의 재현이다’라고 정의되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 이상촌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의 고향이 되기도 했으며 대안 사회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협동조합 운영, 소비조합 운영, 공제상호조합, 농촌유아 교육, 농촌소년 교육, 농촌청년 교육, 문맹 퇴치운동, 주택 개량사업과 같은 구체적인 활동들이 있었다.


일가는 일제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서 공출품목이 되는 쌀농사 대신 고구마 농사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 고구마는 영양분이 풍부한데다 생산성이 높고 박토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을 가져 경작이 쉬웠다. 그러나 문제는 저장이었다. 일가는 수년의 실패 끝에 드디어 12개월 저장법을 찾아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엔토가 찾아와서는 고구마로 군량미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일가에게 이상촌에 도울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 일가는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가와 이상촌은 일제의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일종의 치외법권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여운형과 같은 독립투사들이 이상촌에서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이라는 혹한 속에서도 민족의 정기와 신앙의 지조라는 그루터기를 지켜낼 수 있었다.

해방을 맞은 일가는 이상촌을 다른 동기들에게 맡기고 서울로 가서 ‘농민동맹’을 조직한다. 이 와중에 모스크바 삼상회담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는데 일가는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군정에 의해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신형무소에 수감된다. 한국교계 지도자들의 탄원으로 13일 만에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정치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 위기의식을 가진 일가는 정신적 스승이며 정치적 동지였던 여운형과 결별하고 다시 농촌으로 돌아간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동일하지만 당시 사회가 좌우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분열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서로 먼저 주면서 살자’는 협동과 섬김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투쟁적인 공산주의 방식이나 경쟁적 자본주의 방식을 초월하는 복민주의라고 주장했다.

버려진 땅 찾아 개척하는 걸음

못 쓰는 산소통을 재활용해 만든 개척의 종. 이 종은 새벽마다 10번을 타종하는데, 그 의미는 육체의 잠, 사상의 잠, 영혼의 잠을 깨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농촌으로 돌아온 일가는 이상촌의 경험을 보다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1946년 경기 고양군 은평리 구기리에 버려진 땅 1만3천 평을 매입하여 삼각산농장을 개척한다. 이때 일가에게 ‘가나안’이란 개념이 자리잡게 된다. 그가 이해한 가나안이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버려진 땅을 찾아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성취된 중심부를 좇아 안일과 영광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아직도 무시당하고 버려진 주변부를 찾아 근로와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정신과 육체, 그리고 땅을 회복하는 삶의 의미를 가나안 정신의 기초로 삼는다. 그러므로 가나안정신이란 형제애적 가치를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근로하고 봉사하되 자기를 희생하기까지 섬기는 기독교의 핵심사상으로 복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삼각산 농장 시절 일가는 폭넓은 교류를 경험한다. 그가 교류한 인사는 다석 유영모 선생, YMCA의 현동완 총무, 함석헌, 이현필, 한경직, 박형룡, 김재준 제씨들이 있으며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씨와 미국인 선교사 위철지, 전마태(Jean Delmater) 같은 이도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일가는 일제와 전쟁으로 고통 가운데 빠진 농민을 위해 이상촌운동을 확산할 목적으로 삼각산농장을 헐값에 매각하고 세 번째 개척지로 떠난다. 1952년,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에 27명의 동기와 함께 에덴향을 개척한다. 일가는 버려진 땅을 개척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옥토로 만들고 나면 적당한 사람에게 맡기고 다시 버려진 땅을 찾아 나섰다. 토지에 대해 소유의 가치보다 책임적 존재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리고 농민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소명의식 때문에 이동이 자연스러웠다.

신앙에 바탕을 둔 농촌, 농민교육

매일 새벽 산에 올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자 지은 구국기도실


만 3년 만에 에덴향을 떠난 일가는 1954년 11월, 경기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 만 평의 땅에 가족 7명, 동기 3명으로 새로운 개척의 시대를 연다. 1955년 가나안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의 생활화, 독농가 양성, 협동조합 육성, 교육운동(소생학교), 계몽운동, 건강사업, 의식주개선 등을 활발하게 펼친다. 이곳의 개척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척되자 인근의 사람들이 찾아와 교육을 청하게 된다. 평소 기독교신앙에 바탕을 둔 농촌, 농민교육이야말로 민족의 주권 회복과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일가는 1962년 가나안농군학교를 개교한다. 초창기 교육내용은 종교 및 신앙생활, 축산, 과수, 채소, 농촌음악, 농민체조, 농촌요리, 생활개선(의식주, 관혼상제, 위생), 식품가공(식빵, 각종 잼, 개량 메주, 포도즙, 고추장), 고구마 12개월 저장법, 황무지 개척법, 흙벽돌 개량가옥 건축법, 가정 지도법, 식탁교육, 회의법, 통솔법(지도력), 생활법률, 육아법, 특수작물 재배, 농업경영, 기타 특강 등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로 가면서 가나안농군학교는 농민이 아닌 사람들의 교육 참여가 늘어났다. 농업관련 교육보다 일가의 철학과 신앙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신교육이라는 과정이 개설되었다. 농촌지도자 양성에서 사회지도자 양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와도 맞았다. 일가는 ‘잘살아 보자!’라고만 외친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김준 초대 새마을운동 총재 때부터 일가는 인간성이 실종된 경제성장은 또 하나의 유물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래서 정신교육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아울러 절약하는 경제생활을 강조했다. 그는 필요한 만큼 생산해서 필요한 만큼만 적절하게 소비하는 소위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를 강조했다.

일가는 후반기 가나안농군학교 교육을 통해 에덴향에서부터 시작된 ‘복민주의’를 심화한다. 그가 말하는 ‘복민주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복 받고 사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일가는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이 통치하시므로 정의와 평화와 희락이 넘치는 성령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인식했다. 유신개헌을 불의한 것으로 인식하고 반대하는 책, <운명의 개척자>를 저술해 정치사찰을 받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치, 경제 권력과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인격과 생존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의 자발적 봉사와 희생, 힘없는 타자를 떠받칠 때 가능하다고 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육 이념인 근로, 봉사, 희생이 이와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이념문제로 국론이 분열될 때 언제나 이념을 초월한 화해와 일치를 강조했다.

본래로 돌아가며 새로워지도록

일가가 떠난지도 벌써 30년이 된다. 그의 삶은 민족사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충분한 연구가치가 있다. 그에 대한 더 많은, 특히 ‘환경보존’, ‘산아제한금지운동’, ‘탈자본주의운동’, ‘대안사회’와 같은 주장에 대해 연구와 소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가나안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가족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는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과 ‘자기 버림’의 정신, 일가와 가나안 교육이념인 ‘희생정신’이 요청된다. 다행히 가나안농군학교는 지금까지의 기업체 직원들을 위한 교육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땅에 기반을 둔 자립 공동체를 만들어 이상촌과 농군학교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행복한 개인과 가정과 지역사회의 모습을 실험해보려고 한다. 일가 선생이 자주 외쳤던,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에 괭이를 들고’ 답을 찾을 때까지 기도하면서 나아가려고 한다.

오세택 | 두레교회 담임목사


뉴스편지 구독하기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방문자수
  • Total :
  • Today :
  • Yesterday :

<밝은누리>신문은 마을 주민들이 더불어 사는 이야기, 농도 상생 마을공동체 소식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