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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보다 재밌는

그분은 삶 한가운데 자리 잡고 우리의 대화, 밥상 나눔의 중심을 잡아주신다. 우리가 침묵할 때조차도 그분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며, 낮선 이들조차 함께 웃고 우는 관계로 이어주신다. 그분의 이름은 '텔레비전'.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보상자. 사람들을 하염없이 정신줄 놓게 만드는 요물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놓아 보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마을 사람들 다섯, 아니 여섯 명이 2월 13일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좌담회에는 진영과 대영 부부, 두 아이의 아빠들 형우와 재일, 그리고 여성공동체방에서 생활하는 유리 님이 참석했다.

아람이네 부모, 대영과 진영 님은 신혼 혼수로 텔레비전을 장만했다. 되도록 큼직하면서 얇아서 벽에도 걸리는 최신 유행하는 놈으로 구입했다. 부모님 선물이었다. 예비 부부는 사양을 하는데도 당신들이 방문할 때를 위해서라도 사두라는 부모님 권고에 더 드릴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함께하게 된 텔레비전은 거실에 중심을 잡고 삶을 주도했다. 결혼 전 텔레비전을 항상 켜놓고 지낸 습관 덕에, 머리는 헤어지자고 말하는데 몸은 쉽지 않았다고 대영 님은 말했다. 진영 님도 결혼 전까지 텔레비전 없는 삶을 상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대영 님은 오히려 텔레비전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감은 견디기 힘든 침묵이라고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텔레비전을 처분하기로 결단한 계기는 귀신에 관한 설교를 듣고 난 뒤였다.

과거에만 귀신이 있는 게 아니다, 요즘에도 인터넷 귀신, 텔레비전 귀신 들린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곰곰 돌아보니 중독처럼 빠져 있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버려야 하나? 두 사람은 주변 권면대로 텔레비전을 마을에서 공적으로 쓸 곳에 기부했다.

유리 님은 마을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텔레비전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금단 현상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부모님댁에 갈 때마다 리모컨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손에서 잘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고 고백했다. 사실 그가 집을 떠나 독립하겠다는 인생의 중대사를 놓고 부모님과 심각한 대화를 할 때도 텔레비전이 켜있었다고 한다. 얼굴 보면서 이야기 나누자고 하면, 멀쩡한 텔레비전을 왜 끄느냐고 타박을 들었다고.

형우 님도 최근 설에 양가 부모님댁을 방문해서 별 생각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았다고 말했다. 사실 거실 배치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있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오락프로그램에 덩달아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옛 습관은 이런 순간 자연스럽게 피어오른다고 했다.

퇴근 후 잠들 때까지 저 네모난 지배자가 없으면, 우리 삶이 어떻게 바뀔까. 진영 님은 집안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생활공간을 가꾸고 치우는 일에 더 많은 정성을 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 5개월 된 아람이와도 훨씬 밀착해서 만난다고 했다. 아마 텔레비전이 있었다면 아기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면서 집안일을 하지 않았을까.

역시 텔레비전이 수다를 멈추면 사람들이 말을 하고 사람들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유리 님은 마을밥상에서 혹은 함께 사는 친구들과 차를 우려내며 하루 일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다고 했다. 마을 아이들이 친구들을 초대하고 초대 받기를 즐기는 것도 텔레비전이 없기 때문에 더 활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쉬울 때는 없을까. 특히 직장에서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물었다. 유리 님 직장 출근시간 풍경이 사뭇 재미났다. 탈의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건네는 첫 인사는 "언니, 어제 그 드라마 봤어." "그 주인공은 결국 헤어졌다니?". 주변 동료들의 일상에 친밀하게 반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쉽지는 않다고 했다.

대영 님은 주목할 만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를 이용해 시청한다고 했다. 국어교사라서 '뿌리 깊은 나무'나 '학교 2013' 같은 드라마는 나중에 챙겨 보았다고 했다. 형우 님도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에 무방비로 노출하는 것보다 선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선택권이 생겨 다시보기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했다.

형우 님은 자녀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도 또래랑 못 어울리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또 유행하는 말이나 유명한 운동선수나 연예인 이름을 몰라도 대화에서 소외되는 일은 없다고 했다. 마을에서 함께 자라는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대화 소재로 올리기보다 놀이를 함께 만들어 노는 일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유행을 넘어선 다른 문화를 만들어가고 축적해가기에 텔레비전보다 더 신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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