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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무겁고 삶은 묵직하고


보통 소유욕은 비난받기 쉽지만, 책으로 가득찬 집은 미덕의 대상이 된다. 'OOO의 서재를 찾아서', 종종 마주치는 기사 제목이다. 서재는 그 사람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이런 책 정도는 내 책장에 있어야…' 하며 자신을 과시하는 지적 배경이 된다. 마치 책의 지식을 내가 소유한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놓고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거나, 어렵고 지루해서 덮어놓았던 책을 굳이 이사 다닐 때마다 책장에 꽂아놓는 이유에는 이런 사회적 통념이 있었을 게다.

대부분의 소비재는 감가상각이 이뤄진다. 그러나 책은 낡아서 버릴 일이 없다. 묵은 대로 멋이 나는 게 책이다. 게다가 나날이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출판시장과 서점시장은 자꾸 책을 더 사라고 부추긴다. 책 소비가 퇴근길 직장인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된 세상이다. 책의 적정 재고량을 표준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그날을 위해 적절한 공간에 꽂아 놓으면 된다. 그러다보니 세간살이에서 갈수록 책장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마을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자신이 공부한 책과 자료를 차곡차곡 간직했다. 그러다 문득 결심을 했다. 책과 자료를 소유하지 말고 나눠야겠다고. 그의 결심은 과감했다. 책뿐만 아니라 책장 째 마을의 공공 공간에 기증했다. 그에게 책은 마지막 남은 소유욕이었다. 쉽지 않은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의 결심에 마을사람들도 자극을 받았다. 곧이어 집집마다 책의 행렬이 이어졌다. 물론 책장도 따라왔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 즈음 나는 결혼 초였는데, 기운에 힘입어 대학 때부터 보관해왔던 책들을 정리했다. 책장이 없어지니 집이 넓어졌다. 사실 꽤 넓어졌다. 넓어진 공간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 대견해했고, 신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소유의 의미, 공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같이 본다고 생각하니, 책이 더 잘 쓰임 받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당장 보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책을 모았다. 마을사람들이 주로 공부하는 청년아카데미의 교재도 꽤 있었다. 책이 쌓일 만하면 어디선가 책장도 공수되었다.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많아서 모아놓고 보니 하나의 도서관이 되었다. 대출기록부를 만들어서 비치하고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빌려갔다가 다시 꽂아놓았고, 외부 사람들에게도 대여해주었다.

▲ 올 초에 마을사람들이 힘 모아서 도서관 책들을 꽂아놓을 수 있는 슬라이딩 책장을 직접 만들었다. 책장 가득 마을 사람들의 땀과 마음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듯하다.


마을도서관을 만들어 책을 공유하니 재미있는 효과를 누렸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먼저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하고 구매하는 습관도 생겼다. 수입이 많지 않은 청년학생들은 따로 책을 사지 않고도 공부하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빌려보며 틈날 때마다 마을도서관을 지켰다. 누군가 어떤 책을 읽어 왔는지 엿볼 수 있었고, 풋풋한 20대 때 메모했던 가슴 찡한 글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었다. 어린이책 비중도 컸다. 마을의 어린 동생들을 위해 형님들이 기증을 많이 했던 것이다. 이 책들은 지금 마을 어린이집과 마을 초등학교 내 작은 도서관의 씨앗이 되었다. 가정마다 아이들 책을 많이 사놓을 필요가 없었다.

경제학에서 언급되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동체 모두가 사용하는 공유 자원은 소유권이 없어서 과잉소비되고 고갈된다는 것이다. 이기적 개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공유지의 비극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경제학의 주요 관심이자 딜레마이다. 하지만 인수동 아름다운마을의 도서관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공유지를 관리하는 야경국가 같은 존재가 없어도 지금도 누군가는 책을 빌리고 책을 기증하고 있다. 제도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모두의 협동이다. 마을도서관도 사적 욕망을 극복하고 공유를 늘려가는 실천이다. 도서관은 배움과 지식의 나눔과 공유를 나타내는 상징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부하는 과정으로써의 삶이 자연스레 몸으로 익혀지는 공간이다.

책은 가볍다. 모이면 조금 무겁고, 책장과 함께라면 많이 무겁다. 책의 무게보다는 책의 공유로 삶이 진중해지는 것이 책의 의미가 되겠다. 많은 책을 소유한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공부한 만큼 살아내는 삶이 서로에게 비춰지는 마을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김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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