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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과 수탈의 역사 되풀이되지 않도록

일제강제동원역사관


부산은 강제동원이 출발하고 돌아오는 항구였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들어서자 입구에서 커다란 사진 한 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표정 없는 표정과 숨기듯 그늘진 시선을 좇다보니, 생전 처음 찍어보는 가족사진처럼 보였다. 누가 저렇게 세워놓고 사진 찍게 했을까, 저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

당시 사람들 사진과 목소리, 손편지와 수첩, 각종 행정서류와 통계자료는 너무도 생생했다. 화살표를 따라 걸으니 어느덧 가슴에 분노가 일었다. 내가 제대로 한번 분노해 보았던가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기본으로 해서 각종 강제동원을 위한 법령을 만들어 시행했다. 뺏기 위해서 세세하게 법과 절차를 만들었다는 건 생각해보니 너무나 기만적이었다. 위안부 동원은 최소한의 절차도 필요 없던 야만의 극치였다. 전쟁에서 패하자 일제는 강제동원한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모른 체했다. 현지에 버려져 전범이 되거나 귀국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나는 커다란 지도 앞에서도 한참 머물렀다. 그건 동북아와 태평양 일대에 표시된 일제 지도였다. 윗쪽은 마치 우리 고조선이나 고구려 영토와 닮았고, 아랫쪽은 우리가 즐겨 찾는 동남아 관광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남쪽 먼 나라에서 소리 없이 짓밟혀간 숨결들이 깃발과 환율 앞세운 관광 소비자들 발자국에 밟히는 것만 같았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이들에게 ‘강제동원’은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근현대사, 베트남과 미얀마와 시리아, 우리나라에 찾아온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애통한 생명들에 위로와 평화가 있기를, 이 땅에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일렁이던 감정 추스르며 나오는데, ‘국내’ 강제동원은 정부 보상에서 빠졌다며 시위하고 계시는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아픈 기억에서도 소외된 또 하나의 외침이 문 밖에 서 있었다.

이호연 | 낮에는 세무공무원, 퇴근 후엔 세 아이 아빠로 지냅니다. 요즘은 친구들과 목공방 하나 만들어볼까 궁리하고 있습니다.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에 다녀왔습니다. 1929년 일제의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 세워졌던 건물로, 광복 후 50년간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1999년 부산시에 반환되어 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한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대청동 거리, 외세 주둔의 상징인 건물, 역사관이 자리잡은 터 자체로 인상 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굵직한 사건들과 부산이라는 땅이 직접 맞닿아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일본과 물리적으로 가깝고 배가 드나들기 좋다는 이유로 개항과 수탈, 지배, 근대화 등 모든 것이 빠르게, 또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픈 역사를 가진 땅이 많은데 부산도 그러한 곳 중에 하나였고, 일제가 세운 건물들과 매축지 등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일찌감치 외세의 침략을 받으며 겪었을 혼란과 불안, 수탈로 인한 고통 등 부산에 살던 이들이 겪었을 사건들을 떠올리며 기도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과 분단, 전쟁과 생태계 파괴를 모두 짊어진 땅 부산이 생명평화의 땅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신영 | 서울에 사는 4년차 직장인입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함께하며 이 땅의 아픔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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