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침묵 넘어 마주한 아픔
역사의 뒤안길에서 제주 봄날을 노래하다
지금까지 제주도에 간 횟수는 열 번쯤 된다. 산과 바다를 만끽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즐기며 쉼을 누리기 위해서 간 여행이었다. 그런 내가 제주로 기도순례를 떠났다. 생명평화를 소망하며 떠난 기도순례. 부끄럽게도 제주 땅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공부한 것은 얼마 전이었다. 김포공항에서 50분만에 날아온 제주는 참 가까이에 있었다. 제주공항에 내려 제주시를 지나니 ‘화해와 상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4.3사건 70주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보이는 건 관광객과 상품화된 제주의 모습이었다. 예전 내가 그랬듯 대부분 사람은 제주의 낭만을 떠올리느라, 진짜 중요한 본질을 잊지는 않았을까. 올해도 많은 이들이 제주의 아름다운 봄날을 만끽하러 모여들었다. 하지만 진짜 제주는 그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봄날의 제주는 강요받은 침묵 속에 아직도 울고 있다.
“속솜하라”
함께 기도순례 떠난 길벗 몇몇과 제주4.3연구소를 찾아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한 분은 4.3 당시 큰외삼촌을 잃었고, 당시 상황을 아는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속솜하라”며 자식들 입도 단속하신다 한다. ‘속솜하라’는 제주말로 ‘조용해라’, ‘가만히 있어라’, ‘말하면 죽는다’ 등의 의미라고 한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4.3 유가족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한다. 아니 침묵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섬은 고립된 곳이고, 공동체 기반이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고, 여러 이데올로기가 뒤섞여있어요.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밥은 나누어야 했습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우리 가족을 죽인 사람들을 내가 누군지는 알지만 말은 못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어린아이, 노인, 여성은 죽일 이유가 없겠거니 생각해 피난가지 않았는데, 도피자의 가족이라고 모두 죽였다고 한다. 끔찍했다. ‘4.3’이라는 말만 꺼내도 빨갱이로 몰려 변을 당하느니, 상처를 품은 채 살자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사건 뒤에 진정 어린 사과나 화해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여 살아야만 했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시신조차 찾지 못한 행방불명된 이들이다. 그러한 이들이 4.3 당시 4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4.3사건 70주년을 맞이하며 ‘화해와 상생’을 말하지만 아직 사과받지 못한 제주 사람들이 너무 많다. 70년 전의 고통과 상처가 지금도 응어리진 채 굳어 있다. 유가족의 아물지 않은 상처,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야 하지 않을까. 4.3 연구소 간사님은 ‘이제 4.3 사건을 겪은 생존자가 서서히 돌아가시고 계신다고 한다. 그래서 최대한 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와 증언을 하며 4.3 사건을 알리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어쩌면 4.3 사건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목적은 4.3에 대한 진실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돌아오는 길 보았던 형형색색 관광 알림글에 이전과 달리 마음이 무거워졌다.
환상과 낭만 뒤 아픔
‘제주 이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제주는 ‘환상의 섬’으로 상품화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가 겪은 아픔과 진실은 가려지고, 환상과 낭만, 휴양이 그 자리에 밀고 들어오는 모습이 씁쓸하다. 환상과 낭만 뒤에 가려진 제주의 아픔을 찾고 품어야 하지 않을까. 나와 너, 우리를 넘어 온생명의 평화를 기도하는 발걸음으로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제주에서 가졌다. 아파하고 상처 받은 자들의 평화를 구하고, ‘왜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의 해원(解冤)을 구했다. ‘가만히 있으라’며 진실을 왜곡시키는 권력과 ‘환상의 섬’이라는 자본이 보여 주는 환영을 깨고 진실을 기억하고 평화를 소망하는 물결이 퍼져 나가길 기도한다.
김주안 | 도시직장인 6년차. 주말에는 삼일학림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