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어르신 세대가 인생의 무게
고향 잃고 같은 처지 아픔 보듬어준 이웃들이 피붙이 같아
흰여울마을
“여 하소.” 이 말이 지금의 부산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풀어 쓴다면, “머물 자리가 필요하면 여기 쓰세요”가 될까. 피란민의 땅, 한때 한반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도시. 부산 영도 좁은 방앗간에서 우릴 환하게 반겨주신 어르신도 흥남부두 철수 때 이북에서 배 타고 이곳으로 내려오셨다.
열세 살 때 아버지와 큰누나를 남겨둔 채 어머니와 둘째, 셋째누나 함께 이곳에 오셨단다. 배는 거제도로 피란민들을 쏟아냈다. 부산에 미리 와계신 큰아버지가 어찌어찌 거제로 찾아와 부산으로 네 식구를 데려오셨고, 지금 사시는 ‘흰여울마을’에 터를 잡게 되셨다. 이 마을에 우연히 흘러든 건 아니었다. 부산시 공무원들은 몇 날 몇 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동네로 가고, 이 때 들어온 이들은 저 동네로 가라고 지정해주었다. 어디고 땅이 부족해 무덤 위에도 집을 지었고, 줄만 그으면 내 땅이 되었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끼리 더 넓은 땅 갖겠다고 싸우지 않았다. 내가 열 평 땅 먼저 줄을 그었어도 더 딱한 이웃이 있으면, “여 하소” 하고 선뜻 다섯 평 나눠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곳 집들은 두 사람 누우면 가득 차는 집이다.
흰여울마을은 영도 남쪽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선 마을이다. 문만 열면 가지런히 정박한 대형 선박이 여러 척 보인다. 신년 정각에 일제히 뱃고동을 울려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지만 할매들은 시끄럽다고 귀찮아하신다. 주민들은 자갈치시장에서 짐꾼으로, 바다에서 물질로 고된 일 하며 수십 년을 건사해오셨다. 우리가 만난 어르신도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보셨고 그렇게 모은 밑천으로 90년부터 이곳에서 고추방앗간을 시작하셨다. 자부심 갖고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피란민들은 점점 이곳을 떠나갔다. 한 동에 80세대가 살던 길 건너 영선아파트도 이제 텅텅 비어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 철책선 이남이 고향인 사람들은 진작에 돌아갔고, 일자리 구하러 서울로도 많이 올라갔다. 이분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지만 35년을 통장으로 지내며 마을을 지키셨고, 여전히 노인정을 포함해 여러 마을일에 힘쓰고 계신다.
오랜 시간 흘렀지만 이북에 계신 가족분들 찾고 싶은 마음 있으신지 여쭈었다. 어르신은 단번에 “없다”고 하셨다. 남북관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 같은 이때에, 당연히 가족분들 만나고 싶다는 답이 돌아올 것 같았는데 의아했다. 어르신은 아픈 아내를 돌봐야 하는 이 삶도 녹록치 않아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하셨다. 조카들 형편이라도 알게 되면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뭐라도 챙겨주어야 할텐데 잘해줄 자신이 없다고…. 가족 만날 마음 없다고 답하기까지 어르신은 70년간 어떤 인생의 무게를 견디셔야 했을까. 매일매일 생각하지 않은 날 없었겠지만 너무 오랜 시간 흐르면서 포기하는 편이 지금 삶을 겨우 지탱할 수 있겠다 판단하셨을 것이다.
사실 흰여울마을 모두 비슷비슷한 이야기 위에 지어졌다. 서로 다르면서도 똑같이 위태로운 이야기들. 혼자서는 미끄러졌을지 모르지만 서로 터를 나누며 아무도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준 관계가 있어 그 시간을 버텼다. 마을에 함께 방문한 캐나다 친구가 물었다. “미국이나 남미에선 이런 빈민촌이 생기면 보통 범죄 소굴이 되는데, 여기는 너무 달라. 왜인 것 같아?” 한참 생각하다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견딜 수 없는 사건을 모두 다 함께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기억이 이어준 인연 때문에.” 고단한 삶이지만 함께 기대어 새 생명 일구어간 분들께 평화 있기를 기도한다.
안나현 | 뚝섬 근처 무역회사에 다니며 베트남 관련 사업을 담당하는 직장인. 다양한 문화와 사람에 관심이 많아 재밌게 소통하고 있다.
아미산 비석마을
1876년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은 부산포를 일본에게 강제 개항하고 거주지역을 주게 됩니다. 일본인거주자가 늘어나고, 그들을 위한 상점과 관공서, 항구 등이 지어집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 중에는 죽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아미산에 사는 원주민을 이주시키고, 공동묘지로 사용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전쟁으로 부산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피란동포들은 어디서든 몸 누울 곳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미산에 있던 일본인 공동묘지도 우리 동포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기초석이나 비석들은 집의 주춧돌 등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을 돌아다녀보면, 일본의 연호, ‘소화’가 새겨진 묘비석과 기초석들이 자재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산바람 맞으며 한평 남짓한 공터에서 담담히 쑥을 뜯고 계셨습니다. 무릎이 아프다시며 몸 매무새 흐트러진 것을 민망해 하셨습니다. 전쟁통에 집을 난립하여 지어서 물을 구하려면 지금 마을버스로도 다섯 정거장 정도, 그것도 가파른 산비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몇 십년동안 물동이를 이고 나르셨으니 무릎이 성할 리 없습니다. 그래도 전기는 일찍 들어왔다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름진 손을 잡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그 시간을 살아내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눈물이 한줄기 흘렀습니다. 부산을 비롯한 우리 겨레가 일본제국주의와 한국전쟁의 상흔을 완전히 벗고 생명평화를 심고 가꾸는 아름다운 겨레로 거듭나기를,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도 우리가 만드는 생명평화 물결에 동참할 수 있기를, 그렇게 우리 사이에 있는 길고 질긴 폭력과 혐오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우방으로 거듭나기를, 그 길의 선두에 온생명이 있는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온유미 | 뒷산 공원에서 운동하고, 동네 어르신들이 만들어놓은 텃밭, 꽃밭 감상이 취미에요. 순례 덕분에 불혹의 나이에 향토역사에 관심이 생긴 전주 시민입니다.
매축지마을
부산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좌천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가서 다리를 건너면 ‘매축지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바다를 매축해 만든 곳이라 하여 매축지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유명한 영화들을 많이 촬영한 곳입니다. 막상 와보면 쓸쓸하고 황량한 삶의 터전 앞에서 마음이 절로 숙연해집니다.
매축지마을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들과 한국전쟁 당시 피란 온 사람들이 지은 건물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삼무삼다(三無三多)의 마을로 불린다고 합니다. 마당이 단 한 평, 반 평도 없으며 햇볕과 바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노인과 자물쇠가 걸린 빈집, 공동화장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어렵게 살아야만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삶을 절절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연이야 어떻든 이곳은 여전히 주민들 삶의 터전입니다. 마주보고 있는 집들은 안 그래도 좁은 골목에 화분이나 빨래들의 여러가지 살림들을 꺼내놓고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다른 피란민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정겨운 풍경입니다. 마을 외곽에 있는 오래된 교회에서 우리는 조용히 기도드렸습니다. “아직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시며 사람 사는 훈훈한 느낌을 만들어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경의를 표하며 언제까지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렇게요.
정영현 | 군 제대 이후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진로 고민 중인데, 먼저 평화의 가치를 새기며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