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도, 슬픔도 노래가 돼요"
홍천 토박이 소리꾼 변기영 명창에게 듣는 동부민요
홍천아리랑 발표회에서 동부민요를 들려주는 변기영 명창.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삶을 꾸려가던 민초들이 부른 '동부민요'는 애잔하고 구슬픈 게 제 맛이다. 함경도-강원도-경상도까지 백두대간 동쪽지역의 우리 소리를 따라 걸어온 변기영 명창을 만났다. 홍천문화예술회관에서 9월 20일 열리는 '홍천아리랑' 발표회를 나흘 앞둔 때였다. 준비에 바쁜 틈에도 열정적인 그의 민요인생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변기영 명창은 동부민요를 집대성한 독보적인 동부민요 전공자이다. 변 명창으로 인하여 대학에서 최초로 동부민요 과목이 개설되기도 했다. 동부민요권 전체 민요를 아울러 실기를 가르칠 사람이 없어 변 명창이 학생 신분으로 스스로 공부자료를 만들어갔다. 우리나라 한반도와 중국의 장춘·심양·대련·연길·도문·단동·훈춘 등 만주벌판을 다니며 동부민요를 채집하여 11년만에 석사논문으로 세상에 냈다.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동부민요, 북한에서 부르는 동부민요, 한국에서 부르는 동부민요 선율에서 공통적인 메나리토리를 분석한 논문인 것이다.
홍천아리랑은 홍천이 고향인 변기영 명창이 이번에 새롭게 곡을 붙인 노래다. 원래 홍천아리랑은 음원은 사라지고 <강원구비문학전집>에 가사만 남아 있었다. 이 가사에 동부민요의 특징인 메나리토리를 살려서 지은 것이다.
강원도에서 보존되는 토속민요들, 홍천 상여소리.
"메나리토리는 '라솔미'음이 연결되어 나타나는데 서양음악의 단조처럼 슬프게 들리지요. 함경도부터 강원도 경상도까지 백두대간이 주욱 이어지는데 동쪽으로는 골이 더 깊지요. 논밭을 개간하려면 바위도 굴리고 나무뿌리도 파내야 해서 힘겹잖아요. 너무 힘들어서 나온 한숨소리, ‘아이고’가 메나리토리의 근원인 것 같아요."
민요는 언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억양에 따라 부르는 방법도 다르다. 표준말을 쓰는 서울·경기·충청지역 경기민요는 밝고 흥겹게, 굵은 요성을 많이 사용하는 호남 쪽 남도민요는 때론 거칠고 굵게 눌러내고, 평안도·황해도의 서도민요는 비음과 요성이 특징이며, 함경도·강원도·경상도 백두대간 동쪽지역의 동부민요는 애잔하고 구슬픈 메나리토리가 특징이다. 지금까지 경기민요로 알려져 있는 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신고산타령·궁초댕기·밀양아리랑·뱃노래 등도 실은 동부민요인 것이다.
"저는 1980년대부터 경기민요를 인간문화재 고 묵계월 선생님을 사사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경기민요) 이수자가 되었는데, 뭔가 성에 차지 않았어요. 노래라는 게 감동이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 흉내만 내는 것 같았어요. 이것이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였는가 갈등하고 고민하게 되었지요.
초등학교시절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먼데서 아련히 들려오던 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있어요. 우리 집 나이 많은 머슴할아버지가 부르던 소 모는 소리, 밭 가는 소리는 뭔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아련한 그런 소리였지요. 또한 시골에선 누가 돌아가시면 동네에서 소리 잘하시는 분이 상여 꼭대기에 올라서서 요령을 흔들면서 소리를 하는데 맨 나중 회다지를 할 때면 여럿이서 작대기에 헝겊 같은 걸 꽂고 리드미컬하게 후렴을 해요. 제가 어렸을 때 상여 뒤를 졸졸 따라가곤 했는데 상여소리는 슬프지만 그 회다지소리는 그렇게 신날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때 들었던 소리가 제 귀에서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동부민요를 하면서 그 소리가 메나리토리였다는 걸 알고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강원도에서 보존되는 토속민요들, 양양 상복골농요.
변 명창은 자신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면서 동부민요를 하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평생을 유랑하듯 살아온 것 같다. 오로지 외길 소리밖에 없었다. 어떤 때는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살 수밖에 없는 때도 있었고 길바닥에서 논두렁에서 남의 집 대문간에서 어디서든 민요를 채집하기도 했다. 원형을 찾기 위해 옛날노래 부른다는 사람들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같이 농사일도 거들고 막걸리도 나누고 몇 날씩 묵으면서 그렇게 중국과 한국에서 동부민요 수많은 곡을 발로 뛰어 채집해왔다.
"옛날에는 소리가 우리 생활의 곳곳에 배어있었어요. 기쁠 때도 노래로, 슬플 때도 노래로 상여소리도 슬프게 울 때도 있으나 '아이고, 아이고…' 우는 것도 선율이 있고, 강약과 박자가 있어요. 계속 울기만 하면 힘들고 지쳐서 오래 하지도 못할 거예요. 강약과 고저와 박자를 붙이면 힘들지도 않고 리듬을 타면서 마치 자연스레 틀에 맞춘 노래가 되어 이렇게 부르면서 슬픔을 용해시키는 것 같아요. 요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려고, 창작국악이니 퓨전국악이니 많아져서 좋아요. 그런데 대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선 재미있고 보기 좋은 방법도 중요하지만, 전통의 기본바탕을 단단히 다져놓은 바탕 위에서 하면 좋겠어요. 잘못 하다가 정체불명 국적불명의 음악으로 변질될까봐 우려되는 부분도 있어서요. 노래는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주위환경에 감응해서 박자와 음의 틀을 갖춘 게 노래예요. 노래에 감응해서 더 상승되면 몸짓으로 나오는 게 춤이구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그냥 생활에서 흥얼거리던 선조들의 노래가 더 감동적이잖아요. 그런 소리가 진정한 민요라고 생각합니다.
궁·상·각·치·우(솔·라·도·레·미) 다섯 음에서 '궁'은 임금을 나타내는 음이므로 느리고 위엄 있고 무게가 있어야 해요. '상'은 신하를 의미해서 평이해요. '각'은 백성이에요. 백성에게 자유를 줘야 해서인지 소리를 떠는 요성을 쓰지요. '치'와 '우'는 경제와 만물의 이치를 나타내는 음이지요.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나쁜 풍속을 좋은 풍속으로 바꾸는 힘이 있어요. 우리 음악이 잘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밝은누리움터에서 동부민요를 가르친 학생들과 함께.
변기영 명창은 "후학 양성이 제 과제"라며 민요 전승에 힘써오고 있다. 또한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한인 1.5, 2세대들이 간단한 가락과 장단을 배우면서도 뭉클한 감동을 받는 모습을 보며 호주 멜버른에도 동부민요 지부를 냈다. 홍천에서 동부민요를 알리고자 시작한 '동부민요 경창대회'는 홍천군과 강원도의 지원을 받아 올해로 4회 째를 맞아 10월 31일에 열린다.
9월 20일 홍천아리랑 발표회가 열렸다. 방짜좌종이 공명하며 시작을 알리면 다듬이 소리가 토닥토닥 커지다가가 사그라들고 물동이 두들기는 소리에 맞추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간다지 못 간다지 얼마나 울었나 동창보 개울물이 늘어만 간다" 노랫말이 울려퍼졌다. 애잔하고 구성진 메나리토리는 그의 어린 시절 잊혔다가 다시 우리 귓가를 울리며 이 땅과 우리 삶을 이어주는 것 같다.
강원도에서 보존되는 토속민요들, 횡성 회다지소리.
최소란 | 홍천에 터 잡고 살아가며 만나는 다양한 이웃들 이야기를 전하는 게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