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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랑 수다 떨며 한국말 배워요"
녹색마을사람들 다문화사랑방…피부색 다른 이들 모여 끈끈한 정 나눠


화창한 금요일 오전, 여성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갓 돌을 지난 아가를 업고 온 젬마 씨, 두 살 된 아이와 같이 온 잔다 씨,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온 레이첼, 리애즐 씨다. 캄보디아·필리핀·베트남 등에서 와서 한국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이다. 오늘은 동화책 읽기를 연습하는 날이다. 한국말이 서툴러도 책 읽어주는 한국인 선생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없다. 아이도 엄마도 함께 책 이야기에 푹 빠진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녹색마을사람들(녹색마을)'에서 여는 다문화 사랑방 풍경이다. 매주 금요일 오전이면 사랑방에서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꽃이 핀다. 대부분 20대다. 여기서 한글도 배우고, 잘하는 음식도 같이 만들어 먹고, 공예품도 만들며 수다도 떤다. 이주여성들은 모처럼 말벗을 만나 힘도 얻고 위로도 받는다.

'친정언니'라고 부르는 녹색마을 활동가들이 이주여성들과 함께한다. 친언니처럼 보듬어주고 싶어 친정언니라 이름 붙였다. 활동가 대부분이 40·50대여서 친정엄마보다는 친정언니가 제격이었다. 언니들은 동생들이 낯선 땅에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이 육아에 대한 조언도 해주고, 남편이나 시부모와 겪는 갈등도 중재한다.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한 귀화 시험을 함께 준비하기도 하고, 일자리를 찾는 데 필요한 교육을 연결해주기도 한다.


낯선 땅, 한 마을 언니로 만나자

"며칠 전 많이 울었어요. 남편과 싸워서 마음이 아팠어요."
"왜 싸웠대! 지금은 괜찮아? 남편이 젬마 씨한테 뭐라고 하면, 울지만 말고 그러지 말라고 얘기해줘야 해. 그래야 남편도 젬마 씨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젬마 씨는 언니에게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언니들은 왜 울었냐며 젬마 씨를 다독였다. 얼마 전 뇌종양 수술을 받고 회복하고 있던 터라 염려는 더했다. 그래도 혼자 끙끙 앓다가 언니들에게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젬마 씨는 20대 중반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와서 한국남성과 결혼했다. 지금은 5살 아들, 2살 딸을 둔 엄마다. 처음에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달라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남편이나 시부모와의 관계도 어려웠다. 말이 안 통하니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웠다. 아이를 낳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키울지 걱정부터 앞섰다. 첫 아이를 낳고서 2013년 친정언니들을 만나게 되어 염려를 덜 수 있었다.

필리핀 출신 레이첼 씨도 매주 금요일이면 사랑방을 찾는다. 2009년 만남을 시작했으니 현재 6년 차, 제일 오래된 구성원이다. 친정언니들을 만나면서 한국말도 부쩍 늘었다. 귀화 시험도 잘 준비해 통과했다. 레이첼 씨는 현재 녹색마을 부설 ‘마을 속 작은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며 영어도 가르치고, 학원 영어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친정언니들이 자신감을 주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덕분이다.


같이 음식도 해 먹고 공예품도 만들고

"수유동 일대에서 한부모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하던 와중에 이주여성들이 눈에 띄었어요. 녹색마을 공간에 이주여성들을 초대했는데, 흔쾌히 발걸음을 해주었어요. 그때가 2009년이었어요. 24명이나 저희를 찾아왔죠. 대부분 20대 초반 여성이었어요."

친정언니들 중 큰 언니 김주옥 녹색마을 이사장은 동생들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동생들은 몇 번씩 만나면서 점점 친언니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가족 외에 한국땅에서 외부 사람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 사람 사귀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당시에는 김주옥 이사장은 이사장이 아닌 자원활동가로 동생들을 만났다.

첫 만남은 친정언니 활동과 다문화사랑방 모임으로 이어졌다. 동생들은 한국어를 익히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호소했다. 글은 좀 괜찮은데, 말하기는 정말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정언니들은 말을 빨리 배우려면 만나서 수다 떠는 게 제일이라며 동생들에게 매주 한 번은 모이자고 권했다. 그래서 시작한 모임을 7년째 이어오고 있다.

녹색마을 근처에 사는 박경희 씨도 동생들을 꾸준히 만나고 있다. 경희 씨는 3년 전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동화책 읽는 모임에 마음이 끌려 녹색마을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친정언니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 이주여성들에게 좋은 언니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경희 씨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동생들을 만나서 같이 책도 읽고, 요리도 하고, 나들이도 나간다.

친정언니들은 동생들의 아이 돌잔치나 집안 경조사가 있을 때면 초대에 기꺼이 응해서 함께 웃고 함께 운다. 동생들이 남편이나 시부모와 갈등이 생길 때 중재자로 나서는 이도 언니들이다. 동생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동반자들이다. 언니들은 동생들이 좋은 이웃들과 어울리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면서 같은 마을 주민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지역여성들, 이웃과 환경에 관심 실천

녹색마을은 강북지역에서 여성들 모임으로 1995년 시작했다. 20년의 걸음, 녹색마을의 발자취 속에는 소외된 이웃과 약한 생명을 향한 너른 품이 살아 있었다. 지역 아이들, 한부모 가정, 환경문제 등에 대한 관심은 실천으로 이어졌다. 이주여성들을 향한 마음 씀씀이도 남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주여성들을 있는 그대로 봐 주고, 이웃으로 만나면 좋겠어요." 김주옥 이사장이 다문화가정을 편견 없이 봐주기를 바라며 남긴 말이다.

다문화사랑방 옆 벽면에는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고, 그림 귀퉁이에는 같이 그린 이들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리애즐, 로즈, 잔다, 수진, 레이첼, 젬마, 김주옥, 박경희, 탐다빈, 그레이스, 다문화사랑방 식구들이다. 이들은 한 나무에 연결된 가지처럼 장벽을 허물고 이어져 있다.

임안섭 | 서울 강북 인수마을과 강원 홍천마을을 오가며 생명평화연대 활동을 하며 하늘땅살이를 배우고 있는 청년입니다.


<아름다운마을>은 마을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농촌과 도시를 함께 살리는 마을공동체 이야기를 전합니다.


펴낸곳 |  생명평화연대 www.welife.org

문   의 |  033-436-0031 / maeul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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