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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 무궁화 정신 되살린 현재호 목사

모곡예배당에 걸려 있는 그림. 일제 식민시절 모곡학교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전래놀이가 있다. 술래가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외치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도록 움직여 앞으로 나아간다. 홍천 모곡리에서 무궁화운동을 펼친 한서 남궁억 선생, 무궁화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한서교회 현재호 목사(64)의 설명은 이렇다. '내가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어딜 쳐들어와? 우리 무궁한 역사와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는데, 어딜 감히 쳐들어오느냐?' 이런 뜻이다. '우리 민족은 괜찮은 민족이야! 건드리면 가만 안 둘거야'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착취와 억압의 고통 받던 우리 민족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겨레의 꽃으로 무궁화를 보급한 한서 선생의 독립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운동 전략의 재치를 새삼 느끼며,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한서 선생을 연구하고 기념관까지 세운 한서교회 현재호 목사를 만나러 홍천 서면 모곡리로 향했다. 같은 홍천이지만 서석에서도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먼 곳이다. 모곡리, 또는 보리울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100여 년 전 민족교육운동을 펼친 한서 선생의 모곡예배당과 모곡학교가 있었던 곳이고, 지금은 한서남궁억기념관과 더불어 무궁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모곡학교 터와 현재호 목사 : 현재호 목사는 20년 전 모곡학교 터에 한서 남궁억 기념관을 세우고 '무궁화 정신을 되살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 목사는 농촌지도자가 되려면 진리에 대해 깊이 알아야겠다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가고 결국 목사가 됐다. 민주화운동이 경실련, 환경운동, 유기농운동 등으로 분화되기 시작할 무렵 '지속가능한 농업'에 관심을 갖고, 농촌으로 왔다고 한다.
 
"저는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교육 받고서 삶의 뿌리인 농촌이 살아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농촌운동, 농촌목회를 해왔어요. 지속가능한 농업에 관심이 있어서 경기도에서 농촌목회를 하다가, 홍천 모곡에 있던 선배 목사님이 이리로 와서 농촌목회를 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오게 되었죠. 이곳에 온 지는 벌써 20년이 됩니다."
 
보리울에 왔지만 한서 남궁억 선생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몰랐다고 한다. 지역주민들에게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공부도 하면서 이분이 중요한 독립운동가, 농촌운동가, 교육운동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서 남궁억 선생 이야기들을 발굴해내고, 유적, 유품 등을 모으고 정리하면서, 이렇게 기념관까지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현 목사는 보리울에서 한서 남궁억 선생처럼 농촌운동, 교육운동을 오늘에 맞게 해가고자 했다. 특히 정부가 주도하는 농업정책 속에 산업화, 상업화되어가는 농촌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고 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이 세운 학교처럼 후학을 양성하는 수련원을 짓는 것도 생각해보았는데, 본인에게는 욕심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은 접었다고 한다.
 
"내 몫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을 통해 한서 남궁억 선생 이야기가 여러 곳곳에서 회자되도록 하고, 무궁화 동산을 가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그 이야기가 살아있고, 그 정신이 계승된다면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남궁억 선생의 정신은 무엇이었고, 오늘날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지 생각을 정리해 강의를 통해 이곳저곳에서 나누고 계신다.
 
"저만 잘나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생각을 버리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이 시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 상업화, 도시화되어 가는 문화 속에서 변두리이자 삶의 뿌리인 농촌에서부터 이런 문화를 회복하고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토대는 '사랑'으로 서로 배려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님 마지막 순간에 강조한 것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모곡예배당 : 한서 선생은 1918년에 모곡에 내려와 1919년 9월 사재로 10칸짜리 예배당을 설립, 교회 건물에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달아 학생을 모집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와 항일독립정신을 고양하였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을 현 목사의 소개로 둘러보면서, 선생의 삶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한서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언론운동, 교육운동, 노래운동, 무궁화보급, 역사 저술을 해오셨다. 민족을 위한 헌신에 앞장선 것이다. 그의 삶처럼 힘찬 노래가 하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찬송가로 바로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 동산 ~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 동산 ~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강산 위해 ~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젊은이들이 농촌에 들어와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며, 한서 선생이 살아계시면 하셨을 일들을 하고 있다며 격려해주셨다. 100년여 전 홍천 변두리 땅에 낙향해 무궁화를 보며,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심고 가꾸고 밝은 세상을 일군 한서 선생의 삶이 미소를 지으며, 이 땅 곳곳에서 우직한 삶으로 희망을 잉태하는 일꾼으로 살아가자고 초청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 많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에서 말이다.
 
고영준 기자 | 두 아이를 청량분교 병설유치원과 풍암어린이집에 보내며, 아이들이 마주하는 급식에 이웃 농부들이 키운 건강한 먹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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