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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한 벗되어 함께 걷는 인생길
효제곡마을 소나무숲 노부부의 구수한 이야기

효제곡마을에서 재미나게 사시는 이옥순 할머니, 황병근 할아버지 부부


홍천 서석면 검산1리 효제곡마을에는, 둘이서 나란히 아침마다 면까지 걸어 다니시는 뚜벅이 노부부가 사신다. 74세 이옥순 할머니, 81세 황병근 할아버지시다. 두 분 이야기가 궁금해서 6월 9일 댁 문 앞에서 "저희 놀러왔어요" 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 마을신문을 보시고선, 계속 갖다달라고 할 참이었다는 할아버지께, 두 분 지내시는 모습을 마을신문에 담고 싶다고 허락을 구하고, 할아버지 일터, 할머니 일터도 따라다녔다. 우리 가까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느 이웃, 당신에게 주어진 기나긴 인생길을 당당하고 아쉬움 없게 걸어가시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시골 노부부의 투박하고 구수한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다. <편집자 주>

할아버지가 날마다 손글씨로 쓰시는 일기장. 집을 비우게 된 날 다른 종이에 써뒀다가 붙여넣었다.

"어이구, 낼 해가 어디서 뜰랑가 봐야겠구먼."
댁으로 인사드리며 들어갔더니, 할머니께서 반색하신다.
검산1리 효제곡마을 소나무숲 옆 이옥순 할머니, 황병근 할아버지 댁. 두 분이 편안한 차림으로 방에서 쉬고 계셨는데도, 얼른 자리를 내주신다. 앉자마자 단촐한 세간이 한눈에 다 보인다.
할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으셔서 손으로 일기를 쓰고 계셨다. 농협 가계부에 깨알같은 글씨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짜별로 빼곡하게 기록을 해두셨다.
"이건 지난번 먹으러간 횟집 명함, 그 날짜 일기에 여기 댕겨왔다고 붙여놨지."
어디 다녀오실 때마다 챙겨 받은 명함들로 일기장이 두툼하다. 집을 비우신 날엔 다른 백지에라도 꼬박꼬박 써뒀다가 집에 오셔서 일기장에 채워 붙이신단다. 손 글씨로 하루하루 정성껏 정리해놓은 할아버지 인생사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아침 7시 길 나서는 뚜벅이 부부

책상 앞에, 옛날 임금님부부 차림으로 두 분이 나란히 서계신 사진이 눈에 띄었다. 폼 잡고 찍었어도, 다정하게 잡은 손이 퍽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저번 달 여수 관광 갔을 적에 민속촌서 찍은 거."
할아버지 형제분들 다섯 남매가 해마다 여행을 다녀오신다며 사진첩을 펼쳐 보여주신다.
"관광도, 걸을 수 있을 때 댕겨야지, 걷기 힘들면 그것도 못 가, 그럼."
강원 산간과 달리 넓은 들판이 펼쳐진 남쪽 풍경에 신기하셨다는 홍천 토박이분들 이야기를 듣는데, 어느새 이웃집 수민이네 할머니도 노인정 가던 길에 눌러앉으셔서,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수민이네 할머니는 이 부부를 가리켜 "참 재밌게 사는 분들"이라신다.

2015년 5월 여행 갔을 때 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직 일할 수 있는데 집에 들어앉아 있을 순 없다며 날마다 두 다리로 씩씩하게 출퇴근하신다. 2차선 시골 차도는 산이나 논밭을 끼고 있어서 인도가 잘 확보되어 있지 않다. 차가 쌩쌩 달리는 국도변도 아슬아슬하게 지나야 한다. 나도 시골에서 자가용 몰지 않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궁리하던 터라 할머니 이야기가 궁금했다.

"걸어 댕기는 게 좋지. 운동도 되고."
예전에는 하루 몇 차례 정해진 시간에 다니는 버스를 타고 다니셨다. 어떤 날은 길 가다 집까지 태워주는 이를 만나기도 하셨다. 그렇게 버스요금이 굳은 날이면, 그 돈을 돼지저금통에 모으셨다. 몇 달 지나 꽉 찬 돼지저금통을 뜯어 세어보았더니 삼십만 원이 넘게 나왔단다.
"그 돈 갖고 이 집 도배한 거 아니여? 그게 벌써 5년 됐어. 내가 홍천읍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서석 돌아오는 버스 타려고 터미널 가던 길에 우연히 아는 사람 만나 차 타고 오면, 꼭 버스비 때문이 아니라,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라고 기분도 좋아져."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 얘기 하니까 생각나는데, 노인들 치매 걸릴까봐 보건소에서 검사해주는데, '티끌 모아 태산이 무슨 뜻이요?' 그런 걸 묻고, 별의별 검사를 다 해. 치매는 고치기 어렵거든. 누가 치매 걸리는가 보면 속으로 꽁하니 자기 것만 아는 사람이야. 노인들이 혼자만 지내면 위험해. 그래서 노인회에서 경로당 나오라고 챙겨주고 그러는 거지."
두 분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대화 흐름이 곁길로 빠진다 싶으면, 요즘 농촌 노인들에게 있는 관심사,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속에 이분들 일상도 들어있으니까.

"눈이 억수로 내린 날, 날 보겠다고…"

아침마다 검산2리에서 풍암리까지 2km 정도 거리를 걸어서 나란히 일터로 나가신다.


날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밥 지어 드시고 7시 전에 가방을 멘 두 분이서 집을 나서신다. 할아버지 일터인 서석면노인회까지 2km 가량 뚜벅이 출근길이 시작된다.
"둘이서 손 붙잡고 댕기라는 둥, 손잡고 가는 걸 봤다는 둥, 뭔 참견들을 그리 해대는지…."
싫지 않은 마음을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궁시렁. 두 분이서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지켜보며 샘내듯 흐뭇해하는 이들이 많은가보다.
올해로 13년째, 할머니는 먼저 할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할아버지는 먼저 할머니를 떠나보내시고, 각각 홀로 사시던 두 분이 다시 짝꿍을 이뤄 함께 살아오신 세월이다.

2003년 1월 3일, 새로운 연을 맺도록 다리를 놓은 친구분과 찍은 사진.

뭣하러 그런 걸 다 적느냐면서도, 둘이 처음 만나셨을 때 이야기를 슬슬 풀어놓으신다.

"내가 마흔다섯 살 적에 서석에서 '동갑내' 모임을 만들어서 회장도 했어. 41명에 부부동반 해서 82명이었는데, 하나둘 먼저 뜨더니 이제는 열 명도 안 남았어. 그때 사진을 아무리 봐도 이 사람(할머니)이 없는데, '바깥노인네'가 부인 안 데리고 자기만 나왔던 거지."
병치레하는 '안노인네'를 10년 동안 간호하시다 사별하신 할아버지, 모임 사진에 남편과 등장하지 않던 할머니, 이 둘의 인연을, 동갑내 친구들이 2002년 12월 엮어줬다.
"친구들이 면에서 밥 먹자고 불러내서 만났는데, 갑작스레 '두 분이 같이 사실라우?' 그러고는 어느새 우리만 남겨두고 다 내뺀거야. 금방 돌아오겠다고 잠바도 벗어두고 가서, 오긴 뭘 와? 어떻게 사람을 속이고 갈 수 있냐고 성질이 나서 난 바로 집으로 와버렸지."
"이 사람(할머니)이 말띠라서 성질이 있거든. 그날부터 열흘 동안 (할아버지 사시는 풍암리로) 한 번 나오질 않더라구. 장날에도 안 내려오고.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내가 안 가니까, 나그네(할아버지)가 눈이 억수로 온 날에 쓰레빠를 신고 여길(풍암리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효제곡 할머니댁까지) 찾아온 거야."
2003년 1월 3일, 예순둘 할머니와 예순아홉 할아버지의 새로운 가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석면 사진관에서 찍은 어엿한 사진 속 고운 얼굴이, 13년 세월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리 놓아준 친구분과도 근엄한 표정으로 기념사진 남기고 국수 한 그릇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손수 새벽 밥 지으시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날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셔서 두 분 아침밥상에 올릴 밥을 손수 하신단다.
"어느 노인이, 남자 혼자 살면 여자가 없어서 밥이랑 빨래가 힘들다 그러길래, 자기 밥이랑 빨래는 직접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내가 얘기해줬어요. 같이 사는 게 그런 것 때문은 아니지. 시대가 바뀌어서 남자 할 일 따로 여자 할 일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 같이 살려면 서로 도와야지. 나는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지, 하기 싫으면 안 해."
예전에는 할머니께서 내면(서석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까지 일하러 다니셨는데, "거기는 조반도 못 먹고 다닌다고 나그네가 싫어해서" 그만두시고 서석에서 일하게 되셨다고 한다. 따끈한 아침밥을 손수 나누며 함께 사는 이의 건강을 챙기시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려 서석면에 도착하니 7시 30분.
서석면노인회 사무소에서 '대한노인회 홍천군지회 서석면 사무장'인 할아버지 일이 시작된다. 노인회 홍천군지회와 서석면분회 사이에서 소통 창구 역할도 하고, 서석면 14개 리마다 있는 노인회들을 돌면서, 각 경로당별 정기모임도 살피신다.
"내가 들고 다니는 이 가방을 보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방이 무겁냐고 물어요. 서석 사는 노인회원이 783명(만 65세 이상)인데, 이 783명 노인들을 내가 짊어지고 다닌다고 말해요. 이 가방이 여느 사람한테는 별거 아닐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중요해요. 노인회 사무장 맡으면서 책임 맡은 일에 대해 신뢰를 얻겠다고 결심했어요. 이걸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못해요."

할머니의 구슬땀

어르신들 공공근로 일터인 재활용품 분리수거장.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도 능숙하게 일하신다.


할아버지 일터에서 다리쉼도 잠시, 이제는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 공공근로 일터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배낭 속에 틀어놓은 뽕짝음악을 길동무 삼아 어느새 서석면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에 도착. 면내를 돌고 온 쓰레기수거차량에서 내려지는 분리수거품들, 다른 공공근로 할아버지들이 길거리에서 집게로 비닐 가득 담아 모은 쓰레기들이 할머니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제 비닐봉투들을 일일이 뜯어서 종이상자, 스티로폼, 플라스틱, 유리, 캔, 부탄가스, 고철 별로 분류하는 게 할머니 일이다. 할머니 목장갑이 능숙하게 움직인다. 플라스틱이나 유리, 캔이 마대자루에 채워질 때마다 작은 체구에 번쩍 짊어지고 가셔서 던져놓으신다.

낮 최고 33도까지 오른 날이라, 아침부터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지쳐서 아무 말도 안 나오는 이 상황과 무관하게 음악소리만 신나게 울려 퍼진다.
"할머니, 농사짓는 게 더 낫지 않으세요?"
"농사도 밭이 있어야 허지. 밭이 없으니까…. 이 일도 할려는 사람이 많어."
할머니께서 농사를 안 지으시는 건 아니다. 집 주변 짜투리 땅에 여러 남새와 꽃도 키우시고, 마을길목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밝게 인사해주는 키 큰 해바라기 꽃밭도 가꾸신다. 도시 손님들이 찾아드는 농촌도 도시 못지않게 쓰레기는 계속 나오니, 그 쓰레기를 감당할 일손도 계속 필요하다. 소비문명의 뒤안길에서 말없이 먼지 묻은 구슬땀을 흘리는 우리네 어르신들이다.

"할머니, 그런데 왜 할아버지를 '나그네'라고 부르세요?"
호칭에 별 뜻 없다는 듯 대답은 않고, 그저 얼굴 가득 웃음꽃만 피우신다. 혹, 당신 인생여정에 찾아온 길손님 같은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날 동안 마음 다해 나누는 구수하고 투박한 사랑의 표현일까?

여든하나, 일흔넷, 지긋한 연세에 자기 힘닿는 만큼 몸 써서 일하고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 버스비 천 몇 백 원조차 아낄 줄 알고 돼지저금통에 모으듯, 아까운 여생 하루하루를 흘려버리지 않고 일기에 담는 사람, 당신들 일상을 당당하고 아쉬움 없게 살아가는 어르신들과, 언제든 대문 밀고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어 새삼 감사하다.



최소란 | 지난 가을 홍천에 터잡고 여러 이웃들을 만나며 글 쓰며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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