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마음 새겨 선물하는 즐거움
청량2리 서각동아리 사람들
강원 홍천 서석면 청량리에 가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마을길에서 각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마다 나무에 새긴 ‘택호’가 있다는 것. 여기가 청량리 골짜기라 해서 ‘청량골’, 새들을 많이 키워서 ‘새들의 집’, 집안에 딸이 넷 있다고 ‘작은 아씨들’ 등 다양하고 재밌는 집 이름들을 지어 달았다. 청량2리가 2013년 홍천군에서 ‘청솔내 건강장수마을’로 선정되면서, 집집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이는 사업을 펼친 것이다.
마을길 곳곳에 있는 택호들.
이 사업으로 청량2리에는 서각동아리가 생겨났고, 농한기인 겨울철이면 마을회관에 모여서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는 서각작업에 열중하느라 심심할 틈 없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서각동아리를 통해 배운 재주도 살릴 겸 청량2리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장수 어르신(70세)을 중심으로 몇몇 이들이 택호 만들기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고 한다.
김장수 어르신이 귀촌하여 청량리에 정착한 지는 10년이 다 되어간다. 공직에 있다 퇴임한 뒤 우연찮게 이곳 서석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80년부터 서예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붓을 놓지 않고 있다. 85년도 서예대전에서 입선한 경력도 있지만, 직장생활이 바빠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진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기능보유자 철재 오욱진 선생의 서각작품을 접하게 되어 서각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제가 서예를 하니까 직접 글씨를 써서 서각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조각도를 가지고 시작했다가, 바빠서 손을 놓고 있었죠. 어느 날 후배 하나가 서각 무형문화재 이수자가 되어 ‘선배님한테 서예 배워서 이렇게 됐어요’ 하며 찾아왔어요. 그래서 저도 칼날하고 나무하고 짊어지고 와서 다시 시작하게 된 거예요.”
전통예술대전에 출품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
청량리 마을사람들은 서각동아리에서 함께 만든 작품으로 기로미술대전, 전통예술대전 등에서 대거 입상하셨다. 마을사람들에게 서예나 서각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는지 물었더니, 가르치기보다 그저 같이하고 있을 뿐이라고 답한다.
“아휴, 서예나 서각을 가르치기보다 그냥 같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서예는 여러 사람들이 시작했다가도 이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보니, 서각으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지금 서예는 열 명(매주 월요일), 서각은 여섯 명(매주 수요일)이 하고 있습니다. 서예보다는 서각이 바로 한 작품으로 결과물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진 재능을 마을 사람들과 즐겁게 나누는 김장수 어르신.
서각동아리에서는 김장수 어르신이 서예로 글을 나무에 써주면, 다른 이들이 본을 떠서 파는 식이라고 한다. 대개 서각작업을 할 때 인터넷에서 글자를 뽑아서 하는데, 농촌에서 컴퓨터가 낯선 어르신들에게는 번거롭기 짝이 없다. 또 종이에 써주고 나무에 붙여 작업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선생님이 나무에 직접 써줘서 바로 작업할 수 있는 것이다.
“농한기에만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어요. 12월부터 4월 초·중순까지 합니다. 정월대보름이면 온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때 동아리에서 만든 작품들 전시도 하고, 사람들이 붓글씨로 멋지게 소원문을 써서 달집 태우기도 하면서 삶에 흥을 더하고 있습니다.”
청량2리 마을전시실에 들어가 마을사람들이 그동안 공들여 완성한 작품들을 둘러보니, 감탄이 절로 난다. 전시실에는 멋진 글귀가 담긴 서예, 서각작품뿐 아니라, 탁자, 절구통, 함지박, 주걱, 등잔 등 다양한 목공작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힘 모아 장승도 만들어서 마을회관 옆에 세워두었는데, 목공동아리 회원들이 커다란 나무를 깎아 장승을 만들고, 서각동아리 회원들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글자를 새겨 넣는 합작으로 했다고 한다.
보통 예술작품을 만들려면, 그 재료를 선택하고 구하는 것도 일이다. 보통 100~200만 원어치씩 나무를 사다가 제재해서 쌓아두고 말려서 쓴다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다. 그리고 감나무, 대추나무가 아주 단단해서 이런 나무로 조각을 하면 더욱 그럴싸해 보이지만, 절충해서 조금 저렴한 미송으로 한다고 한다. 채색은 흔한 아크릴 물감로 한다.
“서예나 서각을 배우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같이하고 싶어요. 특별히 가르친다기보다는 자신이 꾸준히 해가면서 요령이나 기법이 느는 것이지요. 이론적인 부분은 책 같은 걸 통해서 본인이 찾아서 하면 되고, 계속 연습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자신이 실질적으로 느낀 것을 가지고 해도 괜찮아요. 앞으로 오랫동안 할 생각입니다. 같이 작품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 생기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서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김장수 어르신은,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얻게 된 신뢰가 작가로서의 학력이나 약력, 수상경력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서각동아리로 함께 활동하면서 서로 나누는 신뢰관계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서예나 서각을 하다보면, 만든 작품을 먼저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약력부터 궁금해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예전에 서예를 가르치러 갔더니, 오만 사람들이 어디서 무슨 상을 받았습니까? 지금 초대작가입니까? 추천작가입니까? 물어보는데, 그렇다고 옛날에 한 걸 가지고 자랑하기도 뭐하고, 이 타이틀이라는 것이 진짜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실되게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상 같은 걸 먼저 이야기하더라고요.”
서각동아리 회원인 박선수 님 작업실.
작업실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서각동아리 회원 중에 열심히 하는 분이라며 박선수 님을 추천해주셨다. 서각작업에 최적화된 박선수 님 작업실을 둘러보니 나도 모르게 창작욕구가 솟아오른다. 박선수 님은 손수 만든 작품을 지인에게 선물로 드렸더니, 선물 받은 분들이 ‘가보로 모시겠습니다’고 할 정도로 기뻐했다고 한다. 보통 한 작품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저는 넉넉히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완전히 채색까지 다하면 조금 더 걸리죠. 하루 서너 시간 정도씩 해요.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계속 붙어있으니까, 같이 사는 사람한테 미안하죠. 또 망치로 칼을 때려야 해서 쇳소리가 나면 다른 사람 잠도 못 자게 신경 쓰이게 해요. 그래도 여기에 몰두가 되면 잡념을 가질 수가 없어요! 서각이 참 좋아요. 내가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것, 하나씩 선물하면 좋거든요.”
가진 재능을 마을사람들과 아낌없이 겸손하게 나누시는 어르신, 이에 정성껏 배워가며 삶에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마을사람들, 그리고 이들이 수고로 귀한 글귀가 새겨진 나무작품을 보며 기뻐했을 이들을 생각하면서, 청량2리 마을분들이 새삼 행복해 보였다.
고영준 | 홍천 서석면에 살면서, 마을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