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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오 동화작가가 풀어놓는
우리 옛이야기의 힘과 매력

동화작가 서정오 님은 횡성어린이도서연구회 초청으로 4월 11일 횡성군립도서관에서 강연했습니다. 강연 전문을 여기에 싣습니다. _편집자 주


아이들은 이야기와 함께 자란다. 아기자기하고 자유분방한 옛이야기는 아이들의 잠든 상상력을 일깨우고, 활짝 피어난 상상력은 창조에 밑거름이 된다. 또, 옛이야기 속에 종종 나타나는 현실 비판과 풍자는 아이들에게 준엄한 진실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재미와 은유의 수풀 속에 숨어 있어서 눈치 채기조차 힘들 때가 많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겁거나 따분하지 않고 친근하다.

옛날 농촌 공동체에서 이야기는 곧 소통의 도구였고 세대를 이어 주는 끈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만나면 으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옛이야기이기도 했고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야깃거리가 동나면 지어낸 이야기도 가끔 나왔다. 집에서는 어머니 아버지가, 마을에선 입담 좋은 아저씨가, 친척집에선 친척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꺼이 이야기꾼이 돼주었다. 심지어 장터에서 만난 낯선 아저씨한테서 옛이야기 한 자리쯤 듣는 것도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만약 이야기가 없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

그 소박한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이야기문화도 사라졌다. 요새 아이들은 이야기보다 지시 명령과 평가에 익숙해져 있다.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을 평등하게 이어주지만, 지시와 명령은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고 소통을 가로막는다. 이래서 오늘날 이야기와 이야기문화를 되살리는 일은 급하게 되었다. 이야기문화의 부활은 어른과 아이가 평등하게 소통하며 함께 위로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 중의 하나요, 답답한 현실의 숨통을 틔우는 거의 하나뿐인 길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자란다. ‘반쪽이’와 ‘강림도령’보다 ‘백설 공주’와 ‘피터 팬’을 더 친숙하게 여기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마차’와 ‘유리 구두’에 친해져 ‘지게’와 ‘짚신’을 낯설어하다 보면 정체성 혼란을 겪기 쉽고, 이는 곧 열등감과 자기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듣고 즐기는 가운데 자신이 바로 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은 남과 어울려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또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눈을 가지게도 된다. 옛이야기가 굳게 지키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은, 세상이 변해갈수록 그 소중함이 돋보이는 소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라고 묻지 않기 (비움과 내려놓음)


아이들은 모든 옛이야기를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똥, 방귀, 귀신, 도깨비가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은 재미는 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주제)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 꽤 공허해 보인다. 이 지점에서 많은 어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줘도 좋을지 망설이게 된다.

옛이야기는 재미있는 내용과 흥겨운 이야기판을 전제로 전승되어 왔다. 재미와 즐거움은 옛이야기의 생명과도 같다. 옛이야기를 교육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야기에 실어 전하는 내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소통하고 상상하는 그 형식이 이미 훌륭한 교육인 것이다.

옛이야기는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을 때 끊임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가지며, 만약에 주제나 교훈을 강조하느라고 서사가 약해지면 금세 흥미를 잃게 된다. 의도가 강한 이야기일수록 서사를 앞세우는 슬기가 이래서 필요하다.

손잡기와 함께하기 (동일시와 공감)

옛이야기 주인공은 언제나 평범함(↔특별함), 약함(↔강함), 작음(↔큼), 어림(↔성숙함), 모자람(↔완벽함)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겨룸 틀(대결구조)을 가진 이야기에서 약한 주인공은 언제나 강한 상대를 이긴다. 어린이는 언제나 자신을 약자로 인식하므로, 이 성격은 어린이가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감정이입한 상태로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옛이야기는 종종 인물의 성격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모든 인물은 그 성격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특히 주인공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따라서 변하지도 않는다. 이로써 듣는 이는 동일시가 깨어지는 혼란을 겪지 않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세 번 되풀이, 조력자 등장, 금기 어김 같은 ‘보편 화소’는 어떤 이야기에서나 발견되는데, 이러한 틀 또한 이야기를 예측가능하게 하여 혼란을 줄인다.

인물뿐 아니라 사물과 배경 또한 그 성격이 극도로 뚜렷하고 명확하다. 때때로 옛이야기는 그 명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심한 부풀림도 서슴지 않는다. 또 모든 사건은 아귀가 기막힐 정도로 딱 들어맞는다. 이로써 옛이야기는 듣는 이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기며, 또한 어린이들 정서에 부합한다. 요컨대 옛이야기는 먼 자리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들어가 함께 하는, 그리하여 이야기꾼과 듣는 이가 하나 되는 ‘감응’의 문학이다.

‘괜찮아’라고 말하기 (관용과 위로)


현실 속 약점은 옛이야기 속에서 약점이 아니다. 게으름뱅이, 바보, 느림보 같은 ‘약점을 가진 인물’이 그 약점 때문에 실패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덕분에 행복해지는 경우가 많다. 어수룩하고 모자라는 인물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줄거리에서 우리는 사람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옛사람의 귀한 생각을 만난다.

옛이야기를 듣다 보면 놀랄 일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현실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교훈이 옛이야기에서는 가볍게 다루어지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기를 비롯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할 일 다 하기, 윗사람 공경하고 따르기, 나라(집단)를 위해 봉사하기 같은 덕목을 옛이야기에서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 대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우연히 행운을 얻어 잘 사는 모습을 즐겨 보여준다.

이는 옛날사람들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즉, 옛날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가르치고 깨우치기보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위안을 삼으려 했다.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똑똑한 사람 되어라.’ 또는 ‘게으름 피우지 마라.’는 교훈보다 더 절실했던 것은 ‘몰라도 괜찮아.’ ‘게으름 좀 피우면 어때?’ 하는 위로의 말이었을 것이다. 옛이야기의 이러한 쓸모는 오늘날 공부와 경쟁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오늘날 어린이들에게 더욱 필요할지 모른다.

틀 벗어나기(건강한 해방)

옛이야기는 생략과 비약, 비합리, 우연의 남발, 불투명한 인과관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또 인물이나 사건에는 수수께끼처럼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러한 발랄성은 상상력의 가장자리를 넓혀 줄 뿐 아니라 무의식을 정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자유로운 상상은 세상이 각박할수록 더 큰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상상력이 만드는 세계는 반듯하고도 건강하다. 권선징악, 인과응보와 같은 틀은 상상의 자리를 정돈하고 금기는 욕망을 다스린다. 옛이야기가 자유로운 상상과 날것의 욕망을 따르면서도 언제나 절제와 나눔의 미덕을 잊지 않는 것은 삶 속에서 깨친 슬기가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옛이야기에는 현실 공간과 상상 공간, 현세와 내세, 삶과 죽음 같은 서로 다른 차원의 공간이 공존하며, 인물은 서로 다른 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또 시간은 사건에 종속되어, 중요한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차원의 시간은 정지된다. 이 같은 일차원성이 어린이들 정서에 잘 맞아떨어짐은 물론이다.

옛이야기 속 인물은 어떤 사건 앞에서도 놀람, 망설임, 고뇌와 같은 감정이 아주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 신체의 일부가 떨어지거나 붙는 사건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과장된 장면은 옛이야기에 종종 나타나지만, 이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진행되는 서술이 자극을 줄이는 구실을 한다.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판 만들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줄 때 쉽게 빠져드는 유혹 중 하나가 ‘공자님 되기 유혹’이다. 뭔가 ‘교육적인’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이야기꾼 본디 구실을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게 ‘공자님’이 된다. 그래서 도덕군자 훈계나 종교인 설교와 같은 옛이야기만을 골라 들려주고, 게다가 시시때때로 이야기 속에 숨은 교훈을 드러내어 강조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중에는 아이들이 과연 그 교훈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인까지 하는데, 그렇게 하는 순간 옛이야기는 이미 이야기가 아니라 지겨운 잔소리가 돼버린다.

어른들이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유혹으로 ‘부처님 되기 유혹’이 있다. 이야기꾼이 듣는 이와 다른 점은 처음부터 이야기를 구석구석 다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손오공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부처님처럼.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면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인물, 약자뿐 아니라 강자의 처지도 시시콜콜 서술하게 되고, 이렇게 시점이 왔다 갔다 하면 아이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옛이야기에서 이야기꾼의 눈길이 언제나 주인공에게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야기꾼이 조심해야 할 또 한 가지 유혹으로 ‘검열관 되기 유혹’이 있다. 알다시피 옛이야기에는 엉성하고 앞뒤 안 맞는 대목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사건에는 개연성이 없고 인물에는 개성이 없을 뿐 아니라 우연이 판을 치고 틀은 천편일률이다. 게다가 잔인한 장면까지도 마구 나오니 이야기꾼으로서는 께름칙해질 수도 있다. 옛이야기를 못미더워하는 순간 이야기꾼은 검열관으로 변신하여 마구 ‘가위질’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검열을 거친 이야기는 어느새 만신창이가 돼버린다. 옛이야기의 비합리성이나 잔인해 뵈는 장면까지도 뭔가 까닭이 있어 생긴 거라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검열관 되기 유혹에서 벗어나 즐겁고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판을 만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이야기꾼이 될 수 있지만,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다음 세 가지 미덕을 갖출 것을 권한다. 불친절하고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워지는 것!

이야기판에서 너무 친절한 이야기꾼은 환영받지 못한다. 옛이야기 속 낯선 물건이나 상황을 시시콜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친절한 일이긴 하나 이야기판을 어수선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장면 묘사나 심리 묘사 또한 마찬가지로, 이야기판에서 이야기꾼이 관심을 기울일 것은 한 가지뿐이다.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상상력을 동원한다. 이야기꾼이 줄거리를 따라 성큼성큼 속도를 내어 이야기하면,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듣는 이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메워 넣는 것이다. 만약에 이야기꾼이 세세한 부분까지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묘사하면 듣는 이는 몹시 지루할 뿐 아니라 자신의 상상과 이야기꾼의 설명이 다를 경우에는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판에서 지나친 친절은 듣는 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몫을 빼앗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이 이야기에 너무 책임을 지려고 해도 판이 삐걱거릴 수 있다. 책임을 진다는 건 모든 걸 다 설명해줄 수 있다는 건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사실 이야기 속 장면이나 상황에 대한 물음에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섣불리 이야기꾼이 답을 내놓기보다는 아이들 상상에 맡기는 편이 슬기로운 일이다. 무책임 또는 되물음은 이야기꾼을 ‘정답 대기’의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야기판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것이다. 이야기판에서 적당한 무책임은 흠결이 아니라 미덕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옛이야기를 들려줄 때 이야기꾼은 각편과 변형에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알다시피 옛이야기는 전해오는 과정에서 많은 각편들을 낳는데, 각편이 생긴 배경에는 이야기꾼의 창의력 또는 기억의 문제가 숨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옛이야기를 듣고 기억했다가 다른 자리에서 전할 때는 크건 작건 변형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야기꾼이 일부러 몇몇 화소를 보태거나 바꾸거나 빼어서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들거나, 때로는 기억에 부담을 느껴 뜻하지 않게 화소가 빠지거나 달라지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질을 알고 나면 이야기꾼은 아주 편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 못해도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옛이야기는 여러 화소가 단순하게 이어진 ‘염주 알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화소 한두 개가 빠지거나 들어가거나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큰 틀은 무너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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