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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을 실제화하는 새로운 삶
신앙+마을+교육 : 농도상생 생명평화

2월 9~10일 생명과 생명이 진실하게 만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삶에 대한 고뇌와 희망을 나누는 자리가 열렸습니다. 2015공동체지도력훈련원 겨울연수회에서 최철호 님이 '신앙+마을+교육 : 농도상생 생명평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내용을 부분 편집하여 싣습니다(편집자 주).
 

공동체지도력훈련원 겨울연수회에서 최철호 님이 '신앙+마을+교육 : 농도상생 생명평화'라는 제목으로 2월 10일 강연했다.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운명적으로 따라다니는 관습으로부터 떠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나는 기질적으로 어떻다 하는 자기 전제를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 아집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몸을 왼쪽 방향으로 주로 쓴다든지 자기에게 의식하지 못한 육체적 습관이 생길 수 있듯이, 마음도 어느 쪽으로만 치우쳐서 생각하게 되는 편향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실제로 자기 몸은 더불어 살기 어려운 기질이라면 그만큼 의식과 몸의 괴리가 커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를 잘 인식하는 게 필요하겠지요.
 
'떠나온' 다음에는, 세상과 전혀 다른 관계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상비군과 왕을 둔 주변 나라들과 달리, 출애굽한 민족은 왕이라는 세상의 구조적 양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준 구원자를 기억하여 우리끼리 종을 삼거나 누군가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자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점 우리도 왕을 세우자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지배받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신음하는 피조물을 살리는 밥으로 살아야 한다는 책임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서로를 살리는 관계는 새롭고 구별된 삶으로 나타납니다. 결혼, 돌잔치를 어떻게 하는지, 스마트폰 소비주의, 가족이기주의, 학벌주의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구별된 삶의 양식이 일상에서 만들어집니다. 인수마을에 처음 이사 갔을 때 마을버스 기사나 도배장판 가게 분들이, 젊은 사람들이 왜 이곳으로 오냐고 의아해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집을 정할 때 초역세권으로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거의 일차적 기능은 출퇴근이 아니라 살림과 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파, 소음, 불빛이 많은 곳은 생명 살림의 가치로 안식하기 어렵습니다.
 
생명현상을 거부하게 만드는 문명에 대해 저항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과도하게 도시에 몰려 살고 있는 것도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지요. 국제자본과 국가권력이 쓴 이농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주변에서 저임금노동자, 산업예비군으로 살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 있는 문제를 먼저 고민하지 않는다면, 도시 복지문제는 계속 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과도한 육식문화는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약과 주사로 소, 돼지, 닭을 키우는 문명 속에서 사람도 자식을 그렇게 키울 가능성이 높겠지요. 폭력의 질서를 생명 살림의 질서로 바꾸는 것이 공동체가 할 일입니다. '로마제국의 평화인가? 그리스도의 평화인가?' 초기 공동체들이 고백했듯이, 거대한 국가적 폭력 앞에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핵으로 지탱되는 문명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정직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거대한 관계양식은 작은 단위 자립적 공동체들의 연대입니다. 세계사에서도 지방분권과 연방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도적 획일성이 최소화된 자립적 생활단위의 마을들이 독립되어 자율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관계양식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혁 의제들이 자본 질서 속에 끌려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마을, 사회적기업, 협동조합도 상품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홍성에서 협동조합을 만드신 할머니들이 계신데, 그런 틀이 있든 없든 이미 그런 협동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셨습니다. 그런데 "'로컬푸드' 하게 되니까 사람들 인심이 각박해졌어. 옛날에는 조금 남으면 같이 나눠 먹었는데, 이제는 돈 주고 사야 해" 토로하십니다.
 
'마음'은 '몸'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가치, 신념, 철학과 같은 공동의 마음은 함께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마을을 통해 현실화됩니다. 강고한 신념의 동일성을 토대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주의 시스템에 포섭되기 쉽습니다. 국가적 전략으로 건물 짓고 돈 들여 마을공동체 사업을 했던 거의 모든 곳들에서 마을의 사귐이 깨지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마을은 사업이 아니라, 천, 지, 인의 조화로 생성되는 인간 삶의 터전이라고 봅니다. 인간 생명의 온전한 생명 됨과 생명 상호 간의 평화를 위한 근원적 토대인 것이지요.
 
오산학교, 명동학교는 마을을 배경으로 강한 신념의 동일성이 구현된 학교입니다. 마을운동 속에는 교육운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대안학교들은 이 앞부분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학교를 만들려고 하는가 하는 철학이 없이 자본에 의존하고 외국 프로그램을 직수입하여 체인점 같은 대안학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교육은 삶의 모든 관계와 터전에서 이뤄지는 생명사건입니다. 공동체가 교육을 할 때 자녀 교육을 중심으로 하게 되면 내적으로 함몰될 수 있습니다. 뭇 생명의 기운을 품고 들어오는 청년교육을 함께 하는 것이 좋습니다. 관습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늘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끼리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대중교육을 해야 사고가 경직되지 않을 수 있겠지요.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분들은, 도시에서만이 아니라 생명의 토대인 흙에 터해 생명의 존재방식(생명 순환)에 따른 농사의 삶 속에서 할 수 있도록 준비해가시길 바랍니다. 소, 돼지, 밭생명, 온생명과 교감하는 능력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생명 순환 농사, 생태건축을 한다고 할 때, 소재, 자재도 중요하지만, 그걸 결정하는 것은 농촌과 도시가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생명 순환 방식대로 하려면 여러 사람이 같이 해야 합니다. 풀이 자라는 힘과 속도, 흙집 짓는 일의 강도가 무섭지만, 여럿이 붙으면 사람도 무서우니까요.
 
질문) 마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주민들에게도 하나 된 신념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하는데, 주민 교육을 통해 하나 된 신념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활동가들이 바쁘다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을 만들기 하는 분들이 저희에게 찾아오시면, 마을을 뭐라고 생각하시냐고 물어봤습니다. "강북구라는 행정단위가 마을인가요? 강북구는 마을이 아니라 백성들을 관리하기 위한 하부단위입니다. 땅을 함께 딛고 사는 기초관계가 마을입니다. 일상에서 식·의·주·락 생활양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마을을 이렇게 설명하는 걸 처음 들었다고 반응합니다. 사업의 상품으로만 여겼던 거죠. 국가 행정단위가 아닌 우리 사회에서 몇 십 년 동안 파괴된 마을을 복원하려면, 철저하게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훈련된 사람들이 먼저 공동의 주체가 되어서, 어떻게 살 것인지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학습을 충분히 숙성한 다음 주민 교육으로 외화해가는 것입니다.
 
한살림에서 설립이념과 경영성과에 대한 입장이 충돌할 때, 한살림이 왜 만들어졌는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 정신대로 가려면 한살림 조합원을 더 늘리는 것보다, 조합원이 생산자와 직접 교류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살림 입장에서는 경영성과가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해야 하겠죠. 그럼 한살림의 역할은, 도시인들이 생협운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잠깐의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지요. 한살림을 처음 만드신 분들은 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질문) 역사에서 비주류로 남는다 해도 괜찮습니까? 전거나 모델이 있습니까?
 
생명은 생명의 존재방식대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양태가 바뀔 뿐입니다. 공동체가 초대교회 이후 실패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교회사 2천년을 통해 신앙공동체는 한 번도 역사 속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있으면 새로운 생명도 일으키고 소명이 끝나면 새로운 때에 이어집니다.
 
역사와 해외에 있는 모든 공동체들은 국가폭력에 기초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독립된 가치 교육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섹터화되었다, 폐쇄적이다 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해왔습니다.
 
해외 공동체는 공동생산 사업체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와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공동체들도 유럽에서 건너간 것이고, 유럽사회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도전에 반응한 자본주의입니다. 약하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공공적 가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집단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식민시절 일본을 거쳐 받아들였기 때문에, 돌봄보다 경쟁에 기초하는 천민자본주의입니다. 미국 우파의 복지정책보다 훨씬 인색합니다.
 
공동체가 어떻게 자립할까?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기존의 전제를 갖고 자립을 생각하면 돈에 지배당합니다. 자립의 기준은 자족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단순소박한 삶의 영성을 깨달아야 하고 이걸 기초로 자족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삶에서 기운이 형성됩니다. 공동체 자립을 위해 공동 수익사업을 많이 생각하는데, 우리 노동의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는 노동이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상의 패턴, 노동의 패턴이 자본의 유통구조에 들어가게 되면 노동영성을 구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본의 잉여를 관장하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출판사와 복지재단으로 수익사업을 하다가, 접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공동체의 활력이 올해 생산규모, 올해 수입규모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수익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 사업은 독립을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지도력과 경제적인 분배 기능을 동시에 갖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질문) 공동체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자기가 땀 흘리고 수고한 것을 흘려보내는 성숙을 요구할 수 있을까요? 본인이 수고한 것에 대가를 맛보게 하는 것을 어떻게 인식시킬 수 있을까요?

 
노동의 성과를 아이들이 사유화하는 것도 의미는 있는데, 그 아이가 어떤 기운 속에서 자라고 있는지 잘 살피고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상품화하는 편향의 기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삼일학림에서 아이들이 집짓기, 농사, 밥상 돕는 일을 하는데, 철학·수신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 기본적 학습이 되기 전까지는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안학교들에서 주식이나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노동을 화폐화하는 것에 대해 아이가 어떤 가치 훈련이 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나눔 문화를 가르치려면, 마을 이모삼촌들이 서로 나누는 것을 자꾸 보게 해주면 됩니다. 내가 좋아하던 옷을 저 아이가 물려 입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이들에게 ‘내 꺼’라는 의식이 줄어듭니다. 공은 공을 낳고 사는 사를 낳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치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릴수록 개념과 인지적으로 접근하는 건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사람들 삶을 보면서 배우게 됩니다. 부모들이 공동체 안에서 깊게 교제하면서 맺는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들도 생명의 감수성을 축적해갈 수 있습니다.

최철호 |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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