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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과 눈빛 모아 한 작품 완성!
동지잔치에서 꿈틀대는 힘을 본 마을 이모 이야기

▲ 손수 만든 리코더집을 옆에 차고 연주합니다.

3년쯤 전 마을에 들어와 '함께 살기'를 배워가고 있는 유미입니다. 저는 마을공동육아 산책 선생님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저를 '유니이모'라고 부릅니다. 발음이 잘 되지 않는 세 살 아이들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 이름이 좋습니다. 마을초등학교에서는 텃밭수업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마을을 누비며 밤, 도토리를 주워 먹고, 주목 열매, 산수유를 따 먹으며 산책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마당에 있는 작은 밭에서 작물을 키우고, 밭을 터전 삼은 많은 생명체들과 삶 나누는 것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수확한 무, 배추로 김장을 담으며 마무리했습니다.

동지(12월 21일) 즈음 초대장 하나를 받았습니다.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내준 '동지잔치 초대장'입니다. 알록달록한 종이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들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내심 아쉬웠는데, 초대장을 받으니 그 마음도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제비주둥이 같은 입으로 "오실 거죠? 오실 거죠? 어디서 하는지 아세요? 아세요?" 닳도록 물어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가고 말거다~!" 하고 확답해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이들이 품에서 떨어집니다.

아이들이 한 해 동안 어떻게 마음을 모았고, 얼마나 튼실하게 자랐는지 볼 수 있는 '동지잔치'는 인수마을 연례행사입니다. 그리고 동지팥죽을 나눠 먹으며 한해를 마무리합니다. 처음에는 이처럼 차분한 연말연시 풍경이 낯설었지만, 내년도 생활계획을 세우고 새해맞이 단식을 하는 친구들이 옆에 있다보니 저도 어느새 적응되어갑니다.

동지잔치를 마련한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인수터전 학생들은 한 달 전부터 공연을 위한 맹연습을 한다든지, 비싼 옷을 맞춘다든지, 어른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놀이하듯 공부하는 아이들 일상을 해치지 않으면서, 실제로 아이들이 교과과정 중에 배운 것들과 손수 만든 것들 중에서 골라서 펼쳐냈습니다.

교과과정은 아이들과 선생님, 학부모, 마을 이모삼촌들이 참여하여 함께 만듭니다. 작게는 2박3일 들살이를 다녀오기도 하고, 각자 가진 작은 재능과 지식, 체험을 수업시간마다 정성스럽게 나누면서 배움의 시간들을 채워갑니다. 교과를 만드는 과정은 어른들에게도 마을 아이들과 만나 서로 큰 변화를 일으키는 소중한 가르침의 기회이므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참여합니다.

당일, 저는 30분 정도 일찍 갔습니다. 욘석들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전날 맞춰본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걱정도 되어서 겸사겸사 그랬습니다. 그곳에는 초등 형님들 뿐 아니라 마을어린이집, 도토리집 동생들도 들뜬 표정으로 연습하고 있습니다. 시끌시끌 의논하고 떠드는 소리가 한창입니다. 제게 초대장을 준 녀석은 제가 온 것을 봤다는 눈도장을 찍습니다. 저도 눈을 찡긋하고 손짓으로 인사했습니다.


마을 인근에 빌린 소박한 행사장 벽에는 형님들의 멋진 붓글씨가 펄럭이고, 서툴지만 힘있게 그린 수묵화도 걸렸습니다. 간단하고 소박한 무대에서 아이들은 한 무리씩 올라와 예행연습을 했습니다. 마지막이건만 틀렸던 건 또 틀려줍니다.

'마을서당'(9세) 형님들이 사물놀이로 잔치를 열었습니다. 장구 가락만으로 시작해서 점차 꽹과리, 북, 징, 장구 네 악기 소리가 어우러지는 사물놀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물놀이는 쇠로 만든 소리로 하늘의 소리를 대변하고, 가죽으로 만든 소리로 땅의 소리를 대변한다고 합니다. 아이들 풍물을 듣자니, 웅장한 우레도, 보슬보슬 작물에 알맞게 내리는 빗줄기도 모두 축복으로 내리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장단에 절로 몸이 들썩여집니다.

'우리·아름 서당'(7~8세) 학생들은 운율과 장단을 곁들여 '말놀이'를 들려주고 '보리밥장군'이라는 전래동화를 연극으로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서로 주인공만 고집하지 않고 연극에 등장하는 여러 조연들, 가만히 서 있기만 한 소나무 역할까지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며 골고루 역할을 맡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낸 배경이 더 감동이었습니다.

▲ 아름서당 말놀이 공연 모습입니다.


▲ 보리밥 장군님을 연극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뛰노는 숲속 놀이터, 신나는 야구놀이, 추운 겨울 눈싸움
내가 좋아하는 것, 인하네 집 산수유, 새콤달콤 딸기, 달달한 주목열매
알록달록 시침핀, 귀여운 바늘꽂이, 크고 하얀 미르, 화려한 호랑나비
귀여운 동생들, 동생들 웃음소리, 친구들과 선생님 고운 노래소리

'다운서당'(9세) 학생들은 자신들이 솔직히 좋아하는 것들을 노랫말에 담아 불러주었습니다. “숲속 놀이터”는 마을학교에서 북한산자락과 접한 지점에 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빈터입니다. 점심시간이면 야구장도 되었다가, 눈 내리면 그대로 눈썰매장도 되는 신나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등하교할 때마다 지나가는 "인하네 집 산수유"는 유난히 붉고 많이 열려, 한 움큼씩 따서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도 하고, 동생들 따주며 생색을 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한땀 한땀 손바느질한 "바늘꽂이"는 또 어찌나 아끼고 품고 다녔는지요. 진돗개 "크고 하얀 미르"는 모든 어린이 친구들에게 절대적 사랑을 받고 있는 점잖은 마을 인사입니다.

"귀여운 동생들, 동생들 웃음소리, 친구들과 선생님 고운 노래소리" 부분에서는, 전에 홍천터전 학생들이 "친구의 땀 냄새가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그때처럼 무엇인가 따뜻한 것이 가슴속에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는데, 말로 설명하긴 어렵네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 우리도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 참 좋습니다.


몸놀이 수업시간에 즐겁게 배운 봉산탈춤도 선보였습니다. 함경도지방에서 주로 추었던, 움직임이 역동적인 전통탈춤인데요, 손수 색칠한 탈도 쓰고 긴 소매도 달고, 장난꾸러기들이 진지한 품세로 큰 대형을 이루어 축원도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니 제법 춤사위가 나옵니다.

잔치는 끝났지만 저녁시간 마을밥상에서 다시 만납니다. '동지팥죽'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죽그릇 마주 대하고 잔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펼쳐집니다. 장구 칠 때 어땠는지, 노래는 어땠는지, 틀리지 않고 잘 맞춰서 뿌듯하기도 하고 아쉬운 것도 있고 재잘재잘 여운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어른들도 아이들 못지않게 싱글벙글입니다. 마을 이모삼촌들은 동지잔치에 참여한 아이들의 작은 일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공연할 때 이 아이 저 아이 할 것 없이 다 눈에 들어오고, 리코더 합주 도중 떨려서 자기 독주부분을 까먹은 친구를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눈빛, 한 순서가 시작할 때마다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 등 세세한 마음의 자람까지, 그 모든 것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아이들도 자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땠는지를 물어옵니다.

마을 아이들은 가정을 넘어 자신을 지켜보는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자라갑니다. 표정이 어두우면 왜 그런지 물어보고, 그렇게 똑같이 자란 다른 건강한 친구들과 형님, 동생들과 매일 밥상에서 지지고 볶고, 놀고, 혼나고… 그러면서 성장해갑니다. 우리가 미래의 환경을 바꿀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처럼 짐승의 이빨 사이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그 뱃속에 들어가도 용해되지 않는 고농축의 생명의 힘, 그 씨알을 구성할 새로운 장을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 시작을 마을 동지잔치에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원유미 | 몸과 마음과 이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마을 주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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