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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에게 열어둔 유연한 시간, 백수

현지야!

집에는 잘 도착했어? 영화를 향한 꿈을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오가는 너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삶의 쉼표를 찍고 있는 시기에 네가 우리 마을에 놀러오면 좋겠다고 소망했는데, 너에게서 서울에 온다는 전화를 받아 얼마나 기뻤는지! 그런데 모처럼 만난 너와 단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고 헤어져서 아쉬운 마음이 남아 못 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학교에 다니면 다닐수록 빚만 늘게 만드는 비싼 등록금과 전공 공부의 의미에 대한 고민으로 휴학을 결정하고, 대학 밖의 배움을 즐겁게 찾아다니며 함께할 친구를 찾고 있는 너를 보며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 또한 휴학과 같은 시간을 설정해서 마을에서 놀고 있으니까. 바로 창조적 백수! 일반적으로 백수 하면 구직에 실패했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생각하기에, 난 당분간 직업을 갖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창조적 백수라고 새롭게 부르기로 했어. 또한 이 시기 동안 내 시간을 비워두고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도우며 유연하게 생활하겠다는 마음도 있지.


창조적 백수로 지내며 여러 가지 질문을 품고 있어. 처음에는 교육과 교사로서의 재능과 진로에 대한 것이었는데, 다양한 만남과 공부 속에서 이제는 나의 삶이 터 잡고 있는 땅에 대한 관심, '나는 왜 도시에 살고 있는가'와 같은, 사회구조가 낳고 있는 삶의 양식에 대한 회의로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아.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삶의 전망을 세우는 이 시간이 마치 십대로 다시 돌아간 듯해.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런 질문들을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처럼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땅 속에 든든히 뿌리내린 나무처럼 구체적인 삶으로 연결해갈 수 있는 마을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마을에서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돕는 것이 재미있어.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랄까. 어떤 만남 속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모르지만 그 일을 통한 만남 속에서 뭔가 하나씩은 배우게 되거든.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마을찻집에 가서 찻집지기 대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어. 찾아오는 손님들이 내가 만든 차를 마시면서 맛있다고 이야기해주면 얼마나 뿌듯한지……. 지난달에는 마을어린이집 선생님 한 분이 아파서 쉬게 되어서, 한 달 동안 어린이집 선생님 역할도 맡았어. 덕분에 마을의 귀염둥이인 4살 또래 여섯 명과 친해졌지. 처음에는 부끄럽다며 도망가던 아이가 이제는 와락 안길 때 또 얼마나 행복한지…….

아무도 나를 찾는 이가 없을 때는 뒷산에 오르는데, 요즘 산이 포실포실해 눈길을 끄는 것이 많아. 얼마 전에는 분홍빛 철쭉을 보았는데 그 색이 신비롭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어. 그래서 숲속을 걷는 것도, 마당바위에 올라 책을 읽는 것도 백수생활의 큰 즐거움이란다. 우리 다음에 만나면 함께 산에 올라가볼까?

2월 17일부터 창조적 백수가 되었으니 어느새 석 달이 되었구나. 때로는 바쁘게 때로는 심심하게 지내면서 배우고 싶었던 강좌를 수강할까 알아보기도 하고, 잠시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찾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어떤 직장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는 건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 덕분이야.

교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젠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잘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게 신기해. 그것은 든든한 친구들을 만나 함께 살아온 일 년의 시간이 내게 준 선물이 아닐까? 창조적 백수의 시기로 설정한 시간이 길어질지 혹은 줄어들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 잡힌 생활을 하도록 지켜주는 친구들로 인해 오늘 하루에 감사하단다.

부산에 돌아가서 넌 어떻게 지내고 있어? 고민하던 일들을 어떻게 소통하며 풀어가고 있는지 궁금해. 봄날의 기운처럼 생동하는 삶 살기를 응원하며 답장 기다릴게.

백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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