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닿는 곳에서 평화의 삶 살아가는 이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서 동북아 생명평화 위해 일하는 청년들 만나다
작게 시작된 관계에서 경험하는 하나 됨
고성은 분단된 남과 북의 축소판입니다. 서로 죽이고 죽었던 3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고성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고성으로 그 지명을 서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가장 북쪽 지역인 고성 통일전망대에 올라서면 북쪽 고성 지역, 금강산, 해금강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습니다. 언젠가 갈라진 고성이 하나 되는 날을 생각하며 북에서 온 두 사람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최세은(가명) 님은 량강도 혜산이 고향입니다. 사회주의 체제로 출발하여 모든 것이 국가 통제 아래 있었던 조선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이유로 기초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던 세은 님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식 사회주의가 이제는 개인의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박현우 님은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입니다. 함경도나 량강도 지역 중 국경에 인접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중국이나 한국은 먼 곳이 아니었습니다. 현우 님도 먼저 탈북하여 한국에 정착한 누나의 영향으로 한국행을 선택한 경우였습니다. 2018년 기준으로 한국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이 3만 2천 명을 넘었습니다. 이렇게 먼저 온 가족들을 통해 지금도 다양한 정보가 다양한 방식으로 국경 마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장마당(시장)은 활성화되어 있고 거래는 달러나 위안으로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선과의 접촉을 차단당한 채, 생명력 없이 걸러진 정보만 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실재하는 곳과 실존하는 사람들을 상상해야만 하니 왜곡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은 님과 현우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 있는 조선을 잘 알아가기 위해서라도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오신 분들을 잘 만나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현우 님은 온성에서 열차 차장으로 3년간 일하다가 탈북했고 남쪽에서 철도 공부를 이어간다고 합니다. 현우 님의 꿈은 졸업 후 철도기관사로 실무경험을 쌓고, 통일이 되면 동해선 열차를 몰고 DMZ를 넘어 금강산, 원산, 함흥, 청진을 지나 자기가 나고 자란 온성에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우 님이 모는 열차에 함께 타고 온성으로 가서 고향 마을에 내려 잔치 벌이는 날을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내친 김에 그것 타고 시베리아 지나 유럽까지도 가는 상상을 해봅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통일될 나라에 대한 상상을 했습니다. 두 분 다 정착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으로 외래어를 많이 쓰는 문화를 꼽았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끼는 것부터가 통일의 준비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 되자고 했는데 막상 하나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 문화, 의식 등의 매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혹스러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였다면 무엇이 하나였고,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한다면 무엇이 하나여야 하는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은 님과 현우 님과의 이야기 시간을 통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서로 만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일상에서, 작게 시작된 관계에서 먼저 하나 됨을 경험하며 통일의 꿈 꾸고 살겠습니다.
정도영 | 서울 인수동에서 마을 벗들과 함께 아이들 키우며 살고 있는 청년입니다.
그를 더 오래 더 자주 만나고 싶다
한 해 동안 기도순례 이어오며 우연처럼, 필연처럼 한 길 걷는 길벗들 많이 만났습니다. 이번 고성 기도순례에는 조선과 중국에서 건너온 청년들을 비롯해 여러 나라 젊은이들을 초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뜻 깊었습니다. 만주, 연해주, 중앙아시아, 일본 등으로 흩어진 겨레의 자취가 궁금했던 터라 재중동포 청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겨 반가웠습니다.
제가 만난 박동찬 님은 중국 랴오닝(요령) 성 심양(선양)에서 건너 온 스물세 살 청년입니다. 경북 의성 사람이었던 고조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0년 만주로 건너간 뒤로 5대에 걸쳐 백 년 가까이 조선족 중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국 국적을 얻어야 했지만 대대로 밀양 박씨 성을 쓰는 조선 사람임을 잊지 않았고, 이름에 담긴 명동촌의 이상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조선족 학교를 다니면서 겨레말 지키는 동아리를 꾸리기도 했고, 만주 일대에 흩어진 고조선과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눈시울 붉힌 가슴 뜨거운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나고 자란 조선족 중국인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떠나올 때 하나였던 조국이 해방된 뒤로 두 동강이 나버리고, 민족주의를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걸림돌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중국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80년대 개혁개방정책으로 들여온 시장경제체제와 92년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돈과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나 한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크게 늘었는데 이 때문에 공동체의 기반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원치 않는 타국살이하며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국가 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민족의식을 잃어가는 동포들의 현실이 안타까웠고, 여전한 편견과 혐오로 그들을 대하는 우리네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중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지내며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견디는 일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극소수 엘리트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공산당 입당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고작 열아홉 살 소년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고 중국 사회의 주류가 되는 길을 마다했다는 고백을 들으며 줏대 있게 사는 일에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이 선택으로 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도 합니다. 제 뜻과 상관없이 떠밀린 비주류의 운명이 이제 자기 이유를 가지고 걸어야 할 자기 길이 되었으니까요. 한국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평소 존경해왔던 문익환 목사님 뜻을 좇아 갈라지고 흩어진 겨레가 평화롭게 하나 되는 앞날을 위해 애쓰는 삶을, 그래서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가 끝날 때쯤 자신을 어떻게 불러 주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그저 자기 이름 세 글자면 충분하다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으며 국적과 조국이 어긋나버린 디아스포라 조선인의 고뇌를 느낍니다. 너는 어느 쪽이냐 다그치고, 구별 짓고, 차별하는 거대한 힘에 맞서 경계인의 자리를 선택한 그의 싸움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바라며 한 길 가는 동지로 그를 더 오래, 더 자주 만나고 싶습니다.
정대영 | 홍천 밝은누리움터에서 학생들과 겨레말과 말꽃 공부 즐겁게 합니다. 날마다, 달마다, 철마다 바뀌는 시골 풍경에 자주 설레고, 벅찹니다. 기쁘고 보람된 시골살이를 알맞게 담아낸 글도 많이 쓰고 싶습니다.
열심히 만나는 일, 그 이야기 전하는 일, 밝게 사는 일
차를 타고 5분만 가면 금강산이 또렷이 보이는 곳, 한반도 남쪽 동북 끝자락 고성에서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 온 분을 만났다. 이름은 이향. 당찬 꿈 가슴에 품고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스물둘 청년이었다. 향 님은 열일곱이 되던 해 남쪽으로 건너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삼남매 중 막내였던 향 님은 언니와 오빠에게 우선순위에 밀려 인민학교(초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장사를 하러 다녔다. 장사하며 느낀 현실은 막막했다.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하루살이 같은 삶이라고 느꼈다. 우연한 기회에 조선중앙티브이에서 남쪽의 시위대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띠 두른 사람, 노랗게 머리 물들인 사람 등등 다양한 모습인 것이 놀라웠는데 정부를 반대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혔다. 이 사건이 마음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2013년, 먼저 남쪽에 들어가 살고 있던 이모 따라 엄마와 산 넘고 물 건너 남한으로 왔다. 열심히 공부해 들어간 대학에서 당당히 새터민임을 밝혔는데 돌아오는 시선은 냉담했다. 차이는 당연한데 그게 차별이 되어 돌아오니 마음이 어려웠다. ‘새터민이니까’라는 이유로 배제되는 일이 많았다. 같은 일을 해도 새터민임을 밝힌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결과가 달랐다. 후회도 되고 씁쓸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살았다. 나중엔 눈물 글썽이며 미안했노라고 사과하신 교수님도 있었다.
통일에 대한 생각이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통일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남한 친구들은 통일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같은 새터민 친구 중에서도 통일에 앞장서기보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한다. 향 님은 가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니 자연스레 통일을 꿈꾸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전문 경영인이 되어 북으로 돌아가 여러 일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나누어 주었다.
이야기 들으며 ‘평화는 멀리 있지 않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일구면 되는구나’ 생각이 선명해졌다. 향 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시위의 풍경, 2008년 촛불시위의 장면에는 십 년 전의 내가 있었다. 그때야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에 행동한 것이었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으랴. 삶은 놀라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밝음은 어둠을 뚫는다고 할까.
향 님은 통일을 위해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통일에 관심 없는 이들을 만나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북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며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것처럼, 그들도 알게 되면 같은 마음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열심히 만나는 일, 그 이야기 전하는 일, 그리고 밝게 사는 일. 평화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이계진 | 북한산 자락 인수동에 살고 있는 3년차 직장인입니다.
몸 된 관계 힘입어 평화를 일구는 개척자
인도네시아는 섬이 많고, 바다가 가까우며, 숲이 우거진 나라다. 15여 년 전, 인도네시아를 갔을 때 느낀 사람들의 여유로움. 그것은 이 땅의 기운에서 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부쩍 잦은 지진, 쓰나미와 여러 섬을 한 국가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아픔을 겪은 땅이기도 하다. 잦은 재난과 나라 곳곳의 분쟁은 삶의 여유를 앗아가고,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실존 앞에서 체념하고 각박해져 갔다.
류복희 님은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자리한 아체에서 10여 년을 지냈다. ‘개척자들’ 공동체에 몸담고 있다가 이곳으로 파견을 받았다. 각자도생으로 몰아가는 인도네시아의 현실에서 평화는 더불어 사는 삶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경험한 복희 님은 마을공동체를 재건하고 회복시키는 활동을 했다. 재해와 내전으로 살 집이 드문 그곳에서 몸과 마음 나누며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마을회관을 함께 지었다. 이 공간을 거점으로 인근 여러 마을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했다. 교육이 마비된 상황이었기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갈등이 있는 마을 간에는 서로 왕래가 없는데, 어린이들은 이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교류 없던 마을 간에 만남의 물꼬도 트였다. 대립에 연연하지 않고 친구 되는 힘을 가진 어린이들에게 천국이 있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청소년 시기에 만난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이제는 그들이 중심이 되어 평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졸업과 취업,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지내고 있다. ‘3R’(Rumah Relawan Remaja, 청년자원봉사센터)라 이름 붙인 이 공동체는 초기 생성의 지혜를 바탕으로 아체의 소외된 곳곳에서 마을회관 격인 도서관을 세워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생활에 필요한 목공기술, 천 생리대 만들기 등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진과 쓰나미 발생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긴급재난 대응팀을 만들어 공무원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선도적으로 구호 활동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복희 님을 ‘사하자Sahaja’로 불렀다. ‘단순’, ‘소박’이라는 뜻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지내는 삶을 본 친구들이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고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복희 님은 작년에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왔고, ‘개척자들’ 공동체와 함께하면서 인도네시아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며 지내고 있다. 타지에서 오랜 기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공동체 덕분이라고 한다. 공동체로 살았던 경험과 공동체의 지지를 바탕으로 마을공동체를 일구었던 복희 님의 나눔을 들으며, 평화는 하늘과 땅, 사람이 어우러져 구체적 일상이 펼쳐지는 마을에서 이루어짐을 다시금 깨달았다. ‘생각은 지구적으로 하고, 행동은 지역적으로 하라’는 말처럼 지구 곳곳의 상황들 잘 살피고 헤아리면서 몸 닿는 곳에서 평화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갈 것을 마음 모았다.
장철순 | 마을 친구들과 두 살 하늘이를 함께 육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 일깨워
‘메노나이트’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국가 권력의 고난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개혁을 밀고 간 철저한 종교개혁자들 중 ‘메노 시몬스’를 따랐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들은 현재 러시아와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져 공동체로 살고 있는데, 이들 사이를 서로 다른 언어와 생활 방식을 넘어 이어주는 정체성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 공동체, 평화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운동, 구호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을 꾸리고 있습니다. 타문화를 이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를 키우고자 세계 청년들과 교류하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잠브아, 프랭크, 한나는 이러한 문화교류 활동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잠브아와 프랭크는 경남 산청 민들레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한나는 남양주 동북아평화센터에서 영어강사와 찻집지기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미국 북서쪽에 길게 걸쳐 있는 로키 산맥 자락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며 살았고, 체육훈련을 전공했으며, 운동을 좋아합니다. 한나는 몸과 마음, 영혼이 다 연결되어 있고, 전쟁과 갈등을 통한 정신적 상처는 몸의 아픔으로 드러난다며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평화를 강조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달리기와 명상을 하고 있는데, 이날도 새벽에 일어나 해변을 10킬로미터 달리고 왔습니다.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자라온 프랭크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이 공동생활을 하는 민들레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아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다며 자신이 누린 한몸살이와 메노나이트의 평화사상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순례에 경이와 감사를 표하면서 이번 순례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남아프리카 잠비아에서 온 잠브아는 계속된 내란과 분쟁으로 지금껏 한 번도 평화를 맛보지 못했다 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잊기 위해 술과 마약에 의지해 살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잠비아는 기독교 국가라 하지만 오랜 전쟁과 총기 소지로 어두워지면 돌아다닐 수 없는 반면, 한국은 어디서나 안심하고 지낼 수 있고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놀랍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상에서 누리는 평화라 했습니다.
밤에 돌아다닐 수 없는 사정은 미국에서 온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당에 가방을 둔 채 화장실에 갈 수 있고,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촛불집회 때에도 범죄나 약탈 없이 질서를 지키는 한국 사회가 놀랍다는 이야기는, 공기같이 익숙해서 소중함을 잘 몰랐던 귀한 유산이구나 싶었습니다. 우리에게 뿌리박힌 평화 유전자, 즉 하늘을 공경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생명평화 고운울림 순례가 전하는 울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온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것임을 세 청년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전쟁과 미움이 사라지고, 서로를 믿으며 언제 어디서나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평화가 이 땅을 넘어 아프리카와 미국에도 자리 잡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승화 | 좋은 땅에 심긴 다양한 생명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강원도 여성 농민
차가운 바닷바람 무색하게 만든 따뜻한 만남
아프리카 대륙 서쪽, 라이베리아에서 온 에디슨 토(Edison De-Conti Toe)와 함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의 전쟁중단과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토는 어린 시절 발생한 내전을 피해 15년간 이웃나라 가나에서 난민으로 살았습니다. 2, 3년을 거리에서 지내고 난민캠프에서 지내던 그는 도움의 손길을 만나 안정을 찾습니다.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토는 단체를 만들어 교육운동을 하다가 전쟁 위기의 한반도에서 일하는 평화 운동가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마음으로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철원에 있는 국경선 평화학교 선생님으로, 활동가로 지내는 토는 매일 산에 올라 기도하고, 한반도 평화를 이룰 방법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교육합니다. 평화를 향한 기도와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은 남북과 북미의 관계 진전에서 보듯 우리의 애씀과 기원이 결과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 와서 평화를 위해 애쓰는 토에게 한국에 사는 우리가 라이베리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남과 북은 내전 이후에 외부의 힘으로 인한 분단을 겪었고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상황은 복잡해졌고, 그렇기에 일단 화해하고 하나 되어야 그런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토가 태어난 나라 라이베리아는 내전을 겪었고 내전을 일으켰던 장본인이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내전은 종식되었고, 평화적 정권 교체도 되었지만 가족, 친적을 죽인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피해자들의 고통은 깊어지고 곪아가고 있습니다. 라이베리아에 정의가 이루어져 내전을 일으킨 자들이 반성하고 죄 값을 치루어야 한다고 토는 답했습니다.
토를 처음 만난 고성의 겨울바람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얇은 잠바를 입고 있었습니다. 날이 춥다는 저의 인사말에 작년 겨울에 처음 경험하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몹시 추웠지만 올 겨울은 별로 춥지 않다고 웃으며 대답해 저도 따라 웃을 수 있었습니다. 북녘 땅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나서 상쾌하고 싱그러운 바람에 함께 웃으며 사진도 찍고 웃는 모습은 여느 젊은이처럼 해맑았고, 평화란 이렇게 한 마음이 되어 웃으며 사는 것이고, 너와 나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토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롭게 평화를 희망하게 되길 바랐습니다. 기도순례 노랫말을 더듬더듬 읽으며 함께 기도하는 토의 모습에서 차가운 바닷바람도 무색하게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밝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땅에, 한반도와 라이베리아에, 온누리에 평화가 오길 기도합니다.
조원호 | 온생명 살리는 밥 짓는 일, 즐겁게 하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