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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 어린 '얼'을 느끼고 배우며
오늘 우리 삶을 다시 보게 한 생동 들살이


10월 7일 이른 아침, 강원도 홍천에서 전라도 남쪽 끝까지 가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광주, 해남, 진도의 여러 곳을 탐방했고, 만난 사람들마다 먼 길 왔다며 우리를 반겨주셨다. 긴 시간 차를 탔지만 피곤함보다는 설렘으로 지금 이 순간 돌아봐야 할 사회·역사 문제, 다시 되새김질하여 계승하면 좋을 우리 문화를 공부하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남도에 어린 얼, 굽이치는 물결 따라'라는 주제로 생동중학교 들살이를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진행했다.

내 것 네 것 하나 된 정신 어떻게?

10월 7일. 5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광주로 들어왔다. 학교에서 미리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광주 관련 자료들을 보았다. 기록관은 올해 개장한 곳으로 전국의 '5·18' 관련 자료들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다. 그 당시 군 자료, 당국의 발표문부터 급하게 써내려간 쪽글, 죽음을 무릅쓰고 찍은 사진의 편집되지 않은 필름본들이 있었다. 그 자료들을 살펴보니 당시의 모습이 조금 더 생생하게 그려졌다.

518 현장 증언자 홍인화 선생과 함께.


저녁에는, 5·18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현장에 계셨던 홍인화 선생님과 대화 시간을 가졌다. 학창시절 5·18시위에 나갔을 때, 발포 현장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로 강연이 시작되었다. 집단발포가 있던 날 도청에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왔고, 집에 돌아와보니 그때서야 자신의 몸이 피투성이인 것을 발견했단다. 도망치며 담을 넘고 넘어지며 입은 상처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두려움이 몰려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또 "내가 그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면"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런 저항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궁금했고, 그분들 덕분에 '오늘'이 있다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홍인화 선생님은 5·18 정신에서 특히 대동정신을 강조하셨다. 내 것과 네 것이 구분 없고,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며 열흘 동안 항쟁을 이어갔던 이야기는 모두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런데 '보상' 문제가 등장하며 오히려 5·18 정신이 훼손되어버렸다. 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보상의 주체가 되어 보상을 했다. 보상 기준의 객관성이 확보되지 못했고, 내부에서 '분열' 문제가 일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저 정도밖에 안 했는데도 보상을 받았는데, 그러면 나는…'이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보상문제로 '네'가 한 일과 '내'가 한 일을 구분 짓고 비교평가하게 되었다. 너와 내가 하나 되었던 대동정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계승될 수 있을까?

5·18은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홍인화 선생님 역시 그러셨단다. 원래 선생님 꿈은 현모양처였단다. 그런데 그 사건 후 눈을 뜨게 되고, 이후 사회운동을 하며 불의한 힘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단다. 그 여정에서 '고려인'을 알게 되셨다. 일제시기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을 전전한 이들.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우리 동포 중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았던 이들은 우리 국적을 얻지 못한다. 5·18 사건을 겪고, 그 사건을 기억하며 살아가다보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진도 강강술래 전수관.


강강술래의 재미에 빠지다

진도에 가서 우리는 강강술래를 배웠다. 강강술래는 우리 어머니들의 일상과 애환을 놀이화한 것이다.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라'로 잘 알려진 대문놀이를 비롯해 지와 밟기, 청어 엮기, 고사리 끊기, 덕석 몰기 등 전통놀이들이 강강술래 중간에 펼쳐진다. 밭에서 일하는 모습, 산에서 나물 캐는 모습, 바다에서 일하는 모습, 거지와 양반의 실랑이,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 보내고 기도하는 모습 등이 잘 담겨 있다.

이날 우리에게 강강술래를 가르쳐주신 할머니 선생님도 6살 때 마을 부녀자들이 강강술래하는 모습을 보고 강강술래 장인이 되신 분이다. 선생님은 강강술래에 얽힌 유래들을 말씀해주셨다. 그 중 "문지기 문지기 문 열어주소!" 하면, "열 새 없어 못 열겠네"라고 답하는 부분이 있는데, 흔히 '열쇠 없어' 못 연다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란다. 가난했던 시절, 밥을 굶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동냥을 하려면 부잣집에 가고, 부잣집에서는 문을 열어주면 밥 달라고 들어오는 거지들이 줄줄이 섰을 게 뻔하니 집주인은 문지기가 문을 열 수 없도록 쉴 새 없이 일을 시켰단다. 놀이에 전해 내려오는 뜻을 알고 움직이니 더 재미가 났다.

들살이 틈틈이, 학교로 돌아와서도 그때 배웠던 동작들을 수시로 연습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우리의 삶, 고민, 애환을 담아 그것을 놀이로 승화시켜 모두가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우리 전통음악의 힘인 듯하다. 그 재미를 만끽한 이 시간,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값진 배움이었다.


잊지 않고 산다는 것

진도 팽목항은 세월호사건이 일어난 지 500일이 넘었지만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아픔의 장소다. 10월 9일 아침, 팽목항에서 우리는 각자 침묵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보냈다. '왜 안개 속으로 세월호를 밀어 넣었는지, 왜 가만히 있으라 했는지, 왜 배는 급선회를 했는지, 왜 우릴 탈출하지 못하게 했는지, 왜 진상규명은 안 하려고 하는지?' 여전히 질문이 계속 꼬리를 문다. "바닷물을 다 퍼내서라도 세월호를 어머니들 가슴에 띄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많은 학생들이 5·18 사건과 세월호 사건이 연결된다고 이야기했다. 두 사건은 사실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두 현장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문구를 가장 많이 봤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 오늘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진도 팽목항을 걷는 학생들.


결국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위협하는 부당한 힘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 우리 현실의 부당한 힘 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삶을 눈여겨보고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 학생은 5·18을 돌아보며 "어떤 사건을 통해 개인이 각성하고 지역이 집단적으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이야기 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넘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 이 시대의 아픔을 깨닫고 함께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이 이번 여행을 통해 더 깊어진 듯하다.

이번 들살이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시간, 학생들은 슬픔과 분노, 무기력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 했다. '잊지 않고 살겠다'는 말의 의미를 더 잘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우린 더 충실한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한 학생의 나눔처럼, 그 과정에서 자기 “인생에서 삶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들살이 역시 공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산다”는 말을 내 삶에 어떻게 들일지 고민하며 지내게 될 것 같다.

해남 땅끝전망대.


박민수 | 밝은누리움터에서 학생들과 사회, 역사와 체육을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 계승해야 할 것들을 마음에 잘 담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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