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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 학생에서 정농 농부 되어

협동정신으로 마을 일구는 주형로

주형로 회장(사진 오른쪽에서 첫 번째)은 1979년 풀무학교를 졸업한 뒤 지역 농부가 되었다. 유기농과 씨름하다 94년 오리를 무논에 들여 벼가 잘 자라게 하는 오리농법을 처음 시도했고 이웃 농부들을 설득해가며 홍동땅을 일구어왔다.


40년 전 이 땅에 농약과 살충제 없는 농사를 선언한 농부들이 모여앉아 밤새 공부할 때, 어린 데 기특하다는 칭찬 들으며 어른들 말씀에 귀 기울이던 학생 주형로는 이제 정농회 9대 회장이라는 책임을 맡아 정농 운동을 이끌어온 스승들 뒤를 따르고 있다. 주형로 회장(56살)은 1979년 풀무학교를 졸업한 뒤 '학교 머슴'을 거쳐 '지역 농부'가 되었다. 유기농과 씨름하다 94년 오리를 무논에 들여 벼가 잘 자라게 하는 오리농법을 처음 시도했고 이웃 농부들을 설득해가며 홍동땅을 일구어왔다. 지금도 자신의 땀방울로 체득한 가치를 전파하고자 사방팔방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3월 27일 홍성에서 정농회 주형로 회장을 만났다.

정농회 사무국은 풀무전공부 갓골농업연구소 건물 1층에 자리해 있다. 2층은 올 2월 문을 연 씨앗도서관이다. 씨앗을 다국적기업의 상업적 개량형으로 사거나 종자은행에 보관만 하지 않고, 해마다 심고 받고 퍼뜨리도록, 농사짓는 누구나 빌려갈 수 있고 한해 뒤에 책임 있게 채종해서 반납하는 도서관이다. 이처럼 신선한 기획과 공간이 끊이지 않고 금세 가시화되는 마을을 배경으로 주형로 선생은 지치지 않고 놀 줄 아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밥 먹고 나오다 마주친, 모를 심어놓은 커다란 고무대야논 앞에서도 한바탕 말솜씨를 풀어놓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벼의 일생을 보며 배울 수 있는 고무대야논.


"똥을 뿌려놓고 열흘 정도 지나면, 똥이 발효돼서 나오는 에너지를 받아 미생물이 번식해요. 열이 꺼질 무렵 씨앗을 뿌려야 하는데 이게 기술이에요. 열이 막 오를 때 씨앗을 뿌리면 다 타죽으니까요." 어린 시절 집에서 그렇게 낸 귀한 고추모 뿌리 일부를 겨우 얻어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같이 심고 가꾸던 생명의 공간, 텃밭을 없앤 게 오늘 교육의 큰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충남도 지원을 받아, 아이들이 학교에서 매일 자기 고무대야논에서 자라는 벼의 일생을 보도록 해주는 학교농장 프로그램을 착안했다. "아이들이 알고 먹으니까 밥이 되게 맛있대요. 흙이 더럽다고 표현하던 아이들도 농촌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고 해요. 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요즘 아이들에게 자연에서 느끼는 것들을 생각나게끔 해줘야 해요."

우리 땅 곳곳에서 정농 운동을 펼쳐오고 있는 회원들이, 2014년 1월 주형로 회장을 세우고 특별히 맡겨준 임무, 과제가 있냐는 물으니, 그는 지금 정농회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시대에 맞게 주신 것 같다고 했다. 다음은 주형로 회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주형로 회장은 자연에서 인간이 먹을 것만 먹고 나머지는 되돌려주는 생명창조형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다.


- 정농회 초창기부터 청년회원으로 참여하셨는데, 산업화에 휩쓸려 다 도시로 떠나던 시절 농촌땅을 지키고 농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만남과 배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제가 공부를 잘 했으면, 오늘 저를 못 만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배구선수였어요. 출석 확인만 하고는 운동장에서 계속 배구대회 연습을 시켰어요. 그 때 공부를 놓쳤지요. 못한 게 아니라 놓친 거예요. 지금도 습관이 안 되어 책만 보면 눈이 아파요. 중학교에서 키가 안 커서 운동선수를 그만뒀어요. 아버지가 우리 누님들을 다 풀무학교로 보내셨는데, 누님들이 우리 학교 괜찮으니 너도 들어오라고 했죠. 저는 합격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스물다섯 명 뽑는 데 딱 스물다섯이 와서 제가 붙게 된 거예요.

성서수업 시간마다 성서를 읽고 와야 하는데, 어느 날 뒷동산으로 도망갔어요. 결강을 한 거지요. 두 시간 내내 자고는 기숙사에 갔더니 친구가 "교장선생님이 너 내일 사택으로 오래" 하는 거예요. 매를 맞겠구나 싶어 제일 두꺼운 내복을 입고 갔지요. 선생님이 제 손을 꼭 붙들고 기도를 해주시더라고요. 한참을 했는데 선생님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어요. 그리고는 성서에 책갈피 꽂아놓은 데를 하나씩 읽기 시작하셨어요. 제가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뒷동산으로 뛰어올라가서 엉엉 울었어요. 가방 속에 있는 책을 다 뿌려버리고 세 권을 다시 주워 담았어요. 성서, 제2외국어 일본어책, 세 번째는 농업책. 그 때 이후로 농업은 한 번도 백점을 놓쳐본 적이 없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 애농회 고다니 준이치 선생님이 원경선 선생님 초청으로 홍동에 강의하러 오셨어요. 분필가루 닦고 물 떠다 드리려고 갔다가 종일 강의를 듣게 되었어요. 고다니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일제 36년 동안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사죄하려고 한국 농민들에게 줄 게 있습니다. 한국 농민들이여, 일본의 농업을 뒤쫓지 마십시오" 하고는, 아와지시마 몽키센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농약 넣고 재배한 걸 원숭이들에게 줘본 거지요. 그래서 제가 졸업하고서 직접 일본 아와지시마를 다녀왔어요. 나도 주식인 쌀만큼은 농약 안 쓰는 세상을 만들자, 그런 생각을 거기서 갖게 되었지요.

고등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진정한 농사꾼이 되려면 삼년을 머슴을 살아라"고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콱 박혔어요. 그래서 저는 풀무학교를 5년 6개월 다녔어요. 3년은 고등학교 과정이고, 2년 6개월은 머슴으로. 졸업할 때 자기가 앞으로 뭐 하겠다는 걸 진로논문으로 쓰는데, 제 논문 제목이 '파인효소에 의한 벼 무농약재배'였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벼농사를 한 거예요. 정농회 2차 대회 때 제가 학생으로서 가입을 했어요. 당시에는 교실이 없으니까 풀무원농장 축사에서 소 안 키우는 데를 깨끗이 청소하고 볏짚 깔고 장판지 깔고 구공탄 넣고서 밤새 모임을 했어요. 저는 젊었기 때문에 주로 연탄 갈아주면서 어른들 말씀하시는 데 끼어서 듣는 게 정말 좋았어요. 그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까지 흐른 거죠.

오리농법으로 짓는 벼농사.


- 농사를 상품화 수단으로 삼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농사의 본래 가치를 따라 바른 농사를 짓겠다는 건데, 당시에 거센 압력에 부딪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정농회가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며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요?

그때 당시 정농회 표어가 "죽이느냐 살리느냐 인류를"이었어요. 그 옆에는 "간접살인도 살인이다" 이렇게 붙어있었어요. 먹을거리를 통해서 생명을 좀먹는 것도 살인이라고 본 거예요. 신앙으로 '아닌 건 아니다'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정신을 가지고 정농회가 시작되었어요. '통일벼'가 나오고 농업 현대화가 판을 치면서 농약을 제일 많이 쓸 때였어요. 약을 안 치면 수확량이 적을 거라고 보니까 정부 시책을 반대하는 농업이라고 찍혀서 어려움이 많이 따랐지요. 관에서 면서기가 나와서 논을 뒤집어엎어도 아무 말도 못했어요. 정농회 모임에 경찰들이 들어와서 사람들 이름을 다 적어가기도 했어요.

당시엔 기술이 없었어요. 농약 안 쓰고 비료 안 쓰고 퇴비 넣고 그냥 지으면 유기농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지금은 농법들이 많이 정립되었지만. 저도 지쳐서 포기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홍순명 선생님은 책을 읽다가 유용한 정보가 있으면 바로 밑줄 그어 제자 이름을 적고는 그렇게 제자들에게 하나씩 알려주셨어요. 그러면 그걸 받아서 노력하는 거지요. 저에게 오리농법을 알려주셔서 94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유기농 오리농법을 시도했어요. 그게 제 성장기가 되었어요. 농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서 각처에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양평, 울진, 강화, … 전국을 다니면서 오리농법을 전파했지요.

- 정농회 모임에서 밤새 연탄 갈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어떤 공부들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신적인 부분,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로 나눴어요. 거기서 저도 미생물에 대해 공부하면서 다른 세상을 봤지요. 한 교실에 네 모둠으로 주제별로 모여서 밤을 꼴딱 샜어요. 새벽 신앙 강화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했는데, 새벽 네 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깐 눈 붙이고 와서 다시 신앙 강화 모임을 했어요. 그렇게 정농회 모임을 하고 나면 다들 몹시 좋아서 지치지 않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제자이면서 스승이었던 거죠. 이렇게 해봤더니 이렇게 되더라, 듣고 배우는 모둠별 토의를 많이 했지요. 당시에는 일본 고다니 선생님 외에는 특별한 선생님이 없었어요. 농법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었죠. 그 다음부터 오리농법, 우렁이농법, 쌀겨농법, 참게농법… 수많은 농법들이 나왔죠.

40년 역사 동안 해마다 1월이면 전국 각지 정농 회원들이 모여 지혜를 모으고 기도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사진은 올해 1월 19일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정농 40, 교육과 손잡다'라는 주제로 열린 연수회. (사진 제공 정농회)


- 정농회를 이끌어온 초기 지도력들이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있지만, 정농 운동의 재생산이란 측면에서 청년 농부들을 길러내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아무래도 적었지요. 신앙과 농업이 같이 가야 하는데, 젊은이들이 신앙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일본 애농회는 애농고등학교와 하나예요. 우리 생각은 풀무학교도 정농회와 하나가 되면 좋겠다는 거예요. 어른들이 계속 합치려고 했지만 이게 안 되더라구요. 큰 숙제 중에 하나가 이거에요. 풀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정농 농부를 키우는 학교를 다시 세우는 것보다는, 함께 가는 게 더 멋지다고 생각해요. 풀무전공부를 변화시켜보자는 거예요. 지금은 인문학 강좌가 너무 많고, 졸업해서 농업 이외 다른 분야 진출자들이 더 많아요. 풀무전공부가 진정한 농업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자는 거죠. 제가 숙제로 삼고 외치는 구호가 '이제 함께 교육과 농업을', '이제 함께 교회와 정농회가'예요. 그만큼 한국교회가 농업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거지요. 정농 운동을 교회 속에서 같이 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 정농회를 통해 바르게 농사짓는 생산자들을 길러내고 조직화하는 한편, 직거래나 생협에 대해 모색해온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워낙 농사에 대한 정당한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 시대에, 상품화와 판매, 소비에 대한 토론과 이견들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경실련하고 같이 경실련정농생협을 시작했어요. 생산은 정농회가 맡고, 판매는 경실련에서 하자고 했다가, 결별되었죠. 경영에 대한 전문가가 없고, 운동성도 부족했어요. 장사를 워낙 정직하게 해야 하니까, 잘 안 되었어요. 당시 경실련에서 서경석 목사가 그런 운동을 하려고 했는데, 성공은 못 시켰죠. 경실련은 빠져 나가고 정농생협이 지금도 작게 존재하고는 있어요.

풀무생협이 생기고 제가 풀무생협 부이사장도 했지만, 저는 겨레와 민족의 운동이라고 판단해 한겨레초록마을을 선택했어요. 풀무고등학교 때 한겨레신문사에 5만원씩 후원하는 학생 주주였어요. 한겨레초록마을, 이름이 얼마나 좋아요? 초록마을 초창기에 제가 생산자회장을 맡아 홍동에서 쌀을 다 대줬어요. 홍동에서 초록을 키워주고 초록이 우리를 키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겨레가 빠지고 다른 대기업으로 넘어간 거예요. 제 쌀이 지금도 거기로 나가고 있지만, 의미 없는 상업적인 유기농 프랜차이즈밖에 아닌 것 같아서 나하고 가끔 부딪혀요.

제 꿈이 있다면 농촌교회와 도시교회가 직거래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거예요. 도시교회가 농촌교회에 가끔 돈 보내주는 게 아니라 정당하게 농산물을 사는 것이지요. 교회가 일요일에 말씀 중심으로 한다면, 수요일은 생활 중심으로 해서 교회 밖의 것을 아울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요일은 먹을거리도 나누고 아이들 교육이나 이웃과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뤄지는 것이죠. 앞으로는 농촌교회에 실질적인 농법을 컨설팅하고 몸으로 도와드리려고 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진짜 맛있는 쌀 종자를 거기 심어서 도시 교회와 엮어주고 싶어요. 정부가 열어주면 저는 북에 가서도 유기농업을 전해주는 운동을 할 거예요. 북한은 어차피 비료, 농약 아무것도 쓰지 않아요. 거기에다 미생물만 해주고, 북한에서 재배한 걸 남한이 사먹는 거지요. 당당하게 바꿔먹도록 하자는 거예요. 지금 방식은 도와주는 게 아니라 과시하기에요. 연료도 없는 나라에 트랙터, 콤바인을 왜 주나요? 리어카, 인력거가 더 낫지요.

문당리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농기구 '가래'. 세 사람이 힘 모아서 쓰는 가래를 일제가 못 쓰게 했다고 주형로 선생은 말한다.


저는 실천주의자에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머릿속에 있는 걸 남에게 주면 나도 모르게 다른 발상이 빈 공간을 얼른 채워줘요. 오리농법, 우렁이농법 이후에 제가 시도해보려는 게 '생명창조형 벼농사'예요. 인간이 먹을 것만 얻고 나머지는 되돌려주고 잘 보호하는 것이죠. 저렇게 커다란 소나무를 누가 가꾸고 거름 준 적이 없잖아요. 쌀도 거름을 주지 않는 대신, 알곡만 거두고 쌀겨와 왕겨는 돌려주는 거예요. 5년이 지나 6년째에 수확이 나는데 일반 이삭보다 1/3이 더 길게 자란다는 걸 일본 이나바 선생님이 연구했어요. 일본은 따오기나 뜸부기 황새, 작은 개천을 보존하기 위해서 벼농사를 짓는 것이죠. 뜸부기가 왜 사라졌냐면 농약 때문이거든요. 뜸부기, 황새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농사를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단지 쌀을 많이 내려는 목적으로 유기농에 접근하니까 인증이 판을 치고 상업적으로 가는 거죠.

- 정농을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유기농, 친환경농법이 점점 관행화되는 것에 대해 정농 내부에서도 반성이나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는지요?

어른들이 가신 뒤로 정농회도 정신적인 것들이 많이 쇠약해졌어요. 회원들도 예전에는 아주 고집스럽게 했지만, 상업적인 면도 많아졌지요. 그런 염려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약이 되는 농업을 하자고 주장해요. 하나님이 주실 때는 벼는 벼대로 약이고, 보리도 약이고, 다 약이 되지요. 인간의 욕심 때문에 본래의 약성을 다 잃어버린 거잖아요. 또 하나는 토종씨앗을 하자고 해요. 몬산토같은 종자회사에서 나온 종자들은 다비를 해야 하고 많은 걸 투입해야 되고, 병에 약하게 만들어져서 농약을 쳐야 하죠. 그래서 정농회 이사 중 한 분인 금창영 선생님이 토종씨앗 운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는 홍성에 씨앗도서관도 만들었습니다.

종자 주권을 위한 씨앗도서관이 올 2월 홍동마을에 개관했다. 풀무학교 학생들이 지역 농가들을 찾아가 받아 모은 씨앗들(사진 아래)과 씨앗 분류 카드(사진 위).


- 일년에 4만 명씩 사람들이 홍동을 방문한다고 하셨는데, 홍동에서 여러 협동조합들이 성공적으로 구현되는 걸 보고, 다른 곳에서 그 정신적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채 겉모양만 섣부르게 모방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지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이스라엘에 키부츠가 유명하잖아요. 그걸 만든 것은 탈무드 정신이거든요.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일등주의, 개인주의가 바뀌지 않은 채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면 무조건 실패라고 봐요. 그러나 여기 홍동에서 협동조합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풀무학교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풀무학교 교육방식이 곧 협동이기에 홍동은 해볼 수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의 한국적 모델이 될 수 있지요. 저에게는 풀무 신앙에 중요한데, 마을사람들이 다 같은 데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풀무학교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할 순 없으니까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교회를 안 가려고 하니까, 제가 맨날 목사님들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권하는 거죠.

정리 : 김희경 | 경기 양평에서 이웃들과 마을 교육과 밥상을 함께 나누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최소란 | 지난해 가을 강원 홍천으로 이사해 여러 이웃들을 만나고 그 만남을 글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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