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호응할 수 있는 품이 넓어지다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보자기 놀이.
어린 시절 저는 소꿉놀이를 많이 하며 자랐습니다. 기왓장 조각을 갈아서 고춧가루라며 풀잎에 묻혀 김치를 담그고, 모래로 밥을 지어 상 차리며 엄마아빠 놀이를 하고 놀았습니다. 그 외에도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다방구 등 해질녘까지 바깥놀이를 하고도 아쉬워하며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을생활의 품앗이 장에서 아이들 놀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함께하는 놀이에 익숙한 아이들은 지금도 제 어린 시절과 많이 다르지 않은 놀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잡기놀이와 소꿉놀이, 무엇이든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매번 새로운 놀이를 만든다는 점에서 예전과 지금의 놀이가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집에서 품앗이의 장이 펼쳐질 때 아이들이 놀이에 즐겨 사용하는 두 가지 물건이 있는데요. 여러 색깔의 '보자기'와 다양한 종류의 '끈'입니다. 이 두 가지 물건으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옷에 신발까지 만들어 신고 서로를 보며 깔깔호호 웃곤 하지요.
얼마 전 열 살 지수와 아홉 살 서안이의 놀이풍경입니다. 여러 가지 보자기와 끈을 이용해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 수 있는 천막이 만들어졌습니다. 천장과 네 개의 면이 모두 가려지게 얼마나 그럴듯한 천막이 쳐졌는지 이어진 색색깔 끈들이 마치 거미줄 같았습니다. 보통 품앗이 끝날 시간이 다가오면 함께 정리하는데, 이 날은 동여맨 끈들을 풀다가 아이들이 지쳐버리더군요. 다음 날 마을밥상에서 만난 지수가 제게 다가와서는 "이모, 어제 천막놀이 할 때 제일 재밌었던 게 뭔 줄 아세요? 이준이가 자꾸 천막 속을 차지하고 누워버려서 나오게 하는 거였어요"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이준이가 누나들이 만든 천막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랬나봐요. 우리가 들어가서 놀려고 했는데 이준이가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나중엔 이준이 끌어내기가 더 재밌더라구요" 지수는 어제 상황이 떠오르는지 저를 보며 귀엽게 웃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결은 바람결이라고 할 만큼, 아이들 놀이를 보면 무궁무진한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품이 아닌 재조합 될 잠재력을 지닌 작은 물건들이 주변에 있으면 아이들은 어느새 그것들을 놀이로 끌어들입니다. 나무조각, 조개껍질, 돌멩이, 솔방울 등등. 아이들이 차리는 소꿉놀이 상에 올려지는 이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사리 손으로 매일 만지며 노는 장난감이 자연에서 온 것이면 아무래도 그 고운 성정을 아이들도 닮아가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요즘은 '일과 놀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도 하고 있습니다. 마을밥상에서 일하면서 아이들을 만날 때 틈틈이 시도하는 울력이 있는데요. 서너 살 아이들도 곧잘 빠져들곤 하는 '마늘까기'입니다. 저녁밥상에서 이 모습을 본 이모삼촌들은 "얘들아, 맵진 않니? 야무지게 잘도 까네" 한마디씩을 건넵니다. 아이들도 매일 자기 몸으로 들이는 밥상 음식에 마늘이 많이 쓰인다는 설명을 들어서인지 가끔은 부엌으로 와서 "마늘 까고 싶어요" 하고 먼저 말하기도 합니다. 일상생활과 놀이를 따로 생각하지 않고 연결 지을 수 있게 되면서 아이들과 호응할 수 있는 제 품도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도 "엄마, 나도 해보면 안 돼?"하고 묻는 아이에게 "뜨거워. 안 돼" "위험해" 때론 귀찮아서 아이들이 참여할 여지를 마련해주기 어려워하던 제가 감자 깎는 칼과 과일칼 정도는 내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부분인 것 같지만 요리시간이 단축되는 것도 경험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먹을 것을 함께 준비하는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누나들이 만든 천막에 들어가서 놀아요.
아이들을 '품앗이'로 함께 키우며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고 배움의 자리가 된다는 발견을 할 때가 있는데요. 정성껏 밥을 먹는 것의 중요성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님에도 어떤 날은 아이들의 몸 상태나 기분에 따라 유독 밥을 오래 먹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식사 태도가 바로 잡혀지지 않던 어느 날, 아이들에게 "얘들아, 너희가 지금 밥을 잘 먹는 데 필요한 게 뭐니?" 하니까 아이들이 "밥을 잘 먹을 수 있는 용기요. 그걸 그림으로 그려주세요"라고 합니다. 저는 속으로 '더 맛있는 반찬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달라구? 아이들은 아이들이구나'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천천히 밥을 먹던 아이들이 신기하게도 제가 그림을 다 그려갈 무렵 식사를 마쳤습니다. 대단한 그림이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며 자기들끼리 평도 곁들이더군요.
품앗이 시간에 부모처럼 일관성 있게 훈육하는 이모삼촌이 되어주는 것,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같은 이모삼촌이 되어주는 것, 모두 필요한 자세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라는 생명 앞에서 무뎌진 감정과 닫힌 감각들이 깨어나는 경험을 하며 내일의 마을생활이 더 설레고 기다려지는 나날입니다.
임재원 | 마을살이를 통해 어제와 다른 내일을 꿈꾸며 자라는 마을의 언니, 누나이자 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