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넘어 자라는 어른과 아이들
나에게 말 걸어오는 존재와 정성껏 마주하기를 배운다
마을살이를 하면서 얻는 유익과 즐거움 중에 어린 생명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품앗이 시간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등·하원을 돕고 놀이터와 마을밥상에 함께 걸음해주고 집에 마실 오게 해서 놀기도 하는 품앗이 육아입니다. 퇴근시간이 늦어질 때, 들을 만한 강의가 있을 때, 필요한 배움과 공부에 시간을 내고자 할 때 마을의 어른들이 서로 부탁하고 들어주는 관계로 살아가며 아이들은 자연스레 함께 커갑니다.
여덟 살 서안이가 아침에 집을 나서며 빼먹지 않는 말이 있는데요. "엄마, 오늘은 OO삼촌이 데리러 오시지?"입니다. 일정 기간 요일마다 약속된 품앗이가 있기에 거의 기억하며 묻습니다. 알면서도 엄마에게 확인하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일정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낮 시간동안 점심밥상을 지키고 나머지는 제 할 일에 집중하며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고 나면 방과 후의 아이들을 데리러가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어린이집과 학교에 들러 아이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말은 "놀이터 가요!"인데요. 가끔은 제가 제안을 해서 산에 오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겐 더 많은 친구들이 모이는 놀이터가 단연 인기입니다.
방과 후 놀이터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동생들부터 초등고학년 아이들까지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장입니다. 놀이터 바닥의 모래는 그날 아이들의 상상력을 담아내는 재료가 되고, 해도해도 싫증나지 않는 잡기놀이의 무대가 되는 미끄럼틀과 이어지는 통로는 마법의 성이 되기도 합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면 낙엽을 모아다가 놀이를 만들고, 눈이 내린 후 맺힌 수정 고드름은 형님들이 따다가 어린 동생들 손에 쥐어주는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 오빠들과 여동생들이 한데 어울려 눈싸움을 하고 있네요. 이런 날은 동생이라고 봐주기 없어요.~
두 개로 한정된 그네를 타기 위해 아이들은 기다리고 나누는 것을 배우고, 놀이하다 다치고 넘어지는 친구가 있으면 위로하고 돕는 것을 배웁니다. 가끔은 아이들의 놀이 중간에 분쟁이나 울음이 터지는 경우가 있어 중재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화가 나서 흥분한 아이, 속상해서 눈물을 쏟는 아이를 달래주고 서로 사과의 말을 나누길 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아이들을 지켜봐주고 잔소리하며 지내다보니, 몇 시인지 물어보고 목마르면 물을 찾고 다치면 뛰어와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관계로 저도 함께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품앗이 할 때나 밥상에서 아이들과 만날 때 재미있는 소통방식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서로 문제를 내고 맞추면서 최근의 관심사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림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문제 맞추기 놀이는 가끔 오답을 통해서도 아이들 생각을 알 수 있고, 그림 역시 빈 종이에 화두를 던지듯 선 몇 개를 그려주면 아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완성하는 것을 보며 아이들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되는 흥미로운 시간입니다.
마음이 다른 것으로 분주하고 몸이 피곤하다고 느낄 때 "또 문제 내주세요!" "그림 그리기해요!" 하면 귀찮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 턱없이 쉽거나 하는 문제를 냈는데 너무 재밌고 엉뚱한 대답이 나오면 아이들이 참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우유를 생각하고 문제를 냈는데 네 살 이준이가 "두부!"하고 자신있게 대답한다거나, 다섯 살 해인이가 "우리집 피아노의 이름을 맞춰보세요! '고'자로 시작한답니다~" 해서 제가 열심히 상표이름을 생각했는데 "고장난 피아노!" 해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답니다. 전자피아노의 전원이 거의 꺼져 있는 상황을 두고 낸 문제였던 것입니다.
서로 다른 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만나는 곳이 마을밥상과 품앗이 장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날의 경험을 서로 잘 나누는 시간으로서의 식사와 놀이시간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요.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와 정성껏 마주하고, 호기심 가득 찬 눈빛으로 "~~ 해주세요" 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호응을 때에 맞게 해주면서 정체되었던 ‘나’라는 생명이 뒤섞어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가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있을 때 나올 수 없는 힘이 마을살이를 통해 경험되는 감사한 나날들입니다.
임재원 | 매일 인수마을 골목길을 오가며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고 있는 또 한명의 밥상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