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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 농촌과 도시 마을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로 굽이치는 생명평화

20주년 맞은 인드라망, 밝은누리 만난 이야기


인드라망, 밝은누리 만난 이야기를 <인드라망> 2018년 10월 호(통권 156호)와 <밝은누리> 2018년 10·11월 호(91호)에 함께 싣습니다(편집자 주).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전환의 기회가 올 것 같은데 한반도의 미래가 걸린 이 얘기를 먼저 해볼까요?


저는 분단체제를 지배하던 권세는 74년도에 이미 끝났다고 생각해요. 자주, 평화라는 통일 원칙이 이미 이때 확인된 거죠. 그 후 지금까지는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이해관계,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과 그 분단체제 속에서 아직 해방되지 못한 우리가 어떤 상태로 지배당하고 있는지 망각한 채 보냈던 세월이죠. 우리가 20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이 만들어낸 제국주의 전쟁, 식민지배, 생태파괴를 아직도 겪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통일돼서 좋다 정도의 인식은 서글픈 일이죠. 우리의 통일은 20세기 끝자락을 붙잡는 통일이 아니라, 21세기 새 문명을 여는 가치인 생명평화, 생태, 마을에 토대한 통일이 될 때, 인류에 새 희망을 증언하는 통일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밝은누리는 농촌과 도시가 서로 살리는 마을공동체를 일구어 왔는데, 이는 남북이 더불어 사는 것을 준비하고 훈련해온 과정이라 봐요. 전쟁 위기가 극심했던 작년 가을부터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 곳곳을 다니며 생명평화 순례를 하고 있어요. 생태나 생명평화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 삶에서 적용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한데 그게 마을이지 않을까. 나와 너, 함께 사는 훈련이 돼서, 남북이 같이 살고 더 나아가 동북아가 그렇게 살 수 있게 하는 거죠.


통일이란 주제를 조금 더 집중해 ‘비무장 영세중립화 된 통일’을 주제로 기도하고 있어요. 비무장이라는 주제는 핵무기를 수천 발씩 가지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는 제국이 선전하는 거짓 평화를 폭로하는 겁니다. 북핵 폐기와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시작으로 전 지구적인 반핵, 반전, 대량 살상 무기를 폐기하는 도덕적 압력을 추동하는 통일 운동이 되었으면 해요. 인류의 오만을 짊어지고 고난 받던 땅이 인류에 새 희망을 증언하는 땅으로 부활하는 겁니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강제적으로 갖고 있는데 전범 국가인 일본이 그걸 갖기에는 정치적 규제로는 적절하지만, 도덕적으로 적절치 않은 것 같아요. 하나 된 이 백성이 새로운 역할을 감당한다고 할 때, 생명평화를 주제로 생태와 마을이라는 구체성을 갖고 실천할 때 21세기의 새로운 도전, 방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도덕적 압력? 권위를 도덕적으로 획득하는 건데, 물질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남미의 코스타리카가 겪었던 경험이 중요해요. 남미가 내전도 많고,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때 코스타리카가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 비무장이었죠. 비무장이라는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중립을 선언하여 주변국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남미평화협정 체결을 주도한 사례가 중요합니다. 굉장히 작은 나라지만 코스타리카가 갖는 상징이나 힘은 대단해요. 우리 남북의 평화 문제도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이 함께하는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라는 틀에서 논의되게 될 텐데, 이는 이미 중립국 통일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자체가 통일된 국가의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논의되는 것이고, 그 중립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체제인 거죠.


또한 남북통일은 국가체제에 관한 새로운 논의를 일으키게 될 텐데, 우리가 경험한 중앙집권적 단일정치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해요. 남측의 국가연합이나 북측의 연방제는 둘 다 결국 중앙집권적 패러다임보다는 자치나 자립에 바탕 한 분권적인 형태를 말하죠. 지방차지 강화라는 것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이런 권력 분화를 적극적으로 밀고 가면,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와 권력을 나누고, 지방정부 또한 자체 내 더 작은 지방정부들과 권력을 나누는 거죠. 강원도에서는 강원도라는 중앙정부가 많은 산하 군들과 분점을 하는 겁니다. 군은 다시 면들과 이런 가치를 일관되게 가져가면 결국 새로운 국가패러다임이 전환해서 도달할 지점은 자치/자족하는 마을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마을 공화국인 거죠. 이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국가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력이 필요하죠. 물론 마을공화국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자치/자족하는 마을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야겠죠.


아래로부터의 자발성과 새로운 상상력, 전환기에 느슨해진 시스템을 잘 활용해서 새로운 체계와 질서를 만든다. 혹시 마을공화국이라 했을 때 기초 단위를 어느 규모로 생각하는지요.


저희가 생각하는 도시에서의 마을 단위는 아이 데리고 밤에 마실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행정구역 단위로 접근하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이해관계나 목적의식 없이 실제 일상적 삶의 동선을 공유하는 관계망이죠. 서로 돕고 돌보는 생활문화를 통해 제도적 획일성이 최소화된 자치/자족하는 관계망입니다. 시골은 농사 짓는 터전을 고려할 때, 도시보다는 넓어야겠죠. 지금은 시골의 면 단위 정도로 생각을 해요.



이런 단위를 상정하는 까닭은 마을에서 소통과 호혜성일 텐데, 현재 형식적인 민주주의로는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힘들 듯해요. 실질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권리를 행사하고 가치나 법에 어긋나지 않게 공동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 형태의 민주주의, 대의제라는 틀은 한계가 명확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해할 때, 근대 민주주의가 서구의 실체적 개인주의를 토대로 형성되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론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으로 잘 작동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민의를 왜곡하고 왜곡과 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맥락에서 민본(民本)이나 자율이라는 개념을 잘 사용할 필요가 있어요. 자유는 몸의 개체성에 토대하기에 기운을 분산하는 작용을 하는 데 반해, 자율은 개체성에 토대하면서도 율이라는 어울림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유나 민주주의 못지않게 민본, 자율이라는 개념이 강화될 필요가 있죠.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해서 사람들이 의사를 표현하고 누군가가 방편적으로 대의를 하더라도 이를 검증하고 탄핵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자치 작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해요. 실질적으로 마을 단위에서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일정하고 안정적인 질서를 견지하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일반화 영역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보면 다양한 공동체들이 그런 실체적 개인주의에 토대한 형식 민주주의를 취하지 않고, 생명 존재 방식에 맞는 방법을 견지하려고 애쓴 경험들이 있습니다. 작더라도 그런 사례들이 연구되고 확산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어요.


저희는 의사 결정할 때 일반적으로 서로 의견을 나누고 나올 얘기가 다 나왔다 싶으면 계속 돌아가면서 얘기하지 않고 구속력 없는 결정을 해요. 예를 들어 의견이 6대 4라 하면 이쪽 의견에 있는 사람 중 대표가 상대방을 설득하는 시간을 갖고 다시 또 구속력 없는 확인을 한 번 더 해요. 재밌는 것은 여기서 마지막에 다른 의견으로 설득한 사람이 확인할 때 반대의 편을 들기도 하죠. 상호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토론은 자기주장을 강화하는 심리작용을 합니다. 더욱이 공개된 토론에서는 자기보호 본능까지 더해져 합리적 수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죠. 끝장 토론을 한다고 해도 의견이 모아지는 일이 거의 없는 이유입니다. 회의라는 틀에서 토론하고 결정하기 전에 일상 삶에서 깊은 신뢰관계를 축적해 가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풀뿌리운동,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운동들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의 형태로 법제화되는데 조심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자기 운동의 필요 속에서 법제화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프로젝트 사업이나 재정 지원사업 등을 위해 관에서 요구하는 법제적 틀을 갖추게 되는데 이런 걸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법제화되고 나면 그 구성원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는 어려워요.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호혜적 나눔이 오히려 규정된 조항들과 그 문화로 인해 제한당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협동조합이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는 협동조합이라는 법적 틀이 없어도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신뢰관계입니다. 마을이나 협동조합 운동이 초기에 활발했던 곳은 이미 그런 가치나 삶의 지향이 공유되어 상당한 신뢰관계가 축적된 곳들입니다. 굳이 그런 법적 틀이 없어도 이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계기가 되어 그런 틀을 입은 거죠.


요즘 국가와 지자체 단위에서 권장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운동들은 그런 법적 틀이 있어야 지원이 가능하거나 사회적 코드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뢰 관계를 충분히 갖지 못한 상태에서 법적 틀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지는 거죠. 그래서 의미 있게 지속되는 게 드문 겁니다. 관의 재정 지원과 언론의 관심이 있을 때, 잠깐 생명력을 갖지만 곧 연명하는 상태가 되는 거죠. 텃밭에서 나는 적은 생산물들을 모아 로컬푸드 시장에 파는 조합을 만드신 할머니들이 제 얘기를 듣고 웃으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맞아, 옛날에는 그냥 서로 나눠 먹었는데, 이제는 팔려고만 해. 오히려 인정이 없어졌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물론 적극 장려해야 할 운동이지만, 책임 있는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법제화하는 순간 관계의 깊이가 멈춘다. 무서운 말이네요. 불교에서는 삼의제(三議制)라고 해서 소수의견을 낸 사람에게 대중을 설득할 세 번의 기회를 줘요. 세 번을 해도 설득이 안 되면 소수의견을 낸 사람이 대중의 뜻에 따라야 하죠. 이렇게 해도 현실에선 신뢰관계가 돈독하지 않을 경우 형식적으로 되거나 갈등의 원인이 되는데 마음을 모으는 방법이 있는지요?


그 상황에서 대부분 자연스럽게 의견이 모아지는데 팽팽할 때가 있어요. 밝은누리 28년 동안 한두 번 있었는데 그럴 때는 의견을 낸 사람한테 일임을 해요. 의제를 제안한 사람이 학교를 만들 때 방과후만 하냐 대안학교를 만들 것인가? 대다수가 학교를 세우는 입장이지만, 소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끝까지 주장을 할 때 결정하기가 어렵잖아요. 이럴 때 ‘은사적인 의사결정’이라고 해서 그 의제를 준비하고 제출한 주체들에게 위임을 하는 겁니다. 평소 서로 간의 사귐에서 교육에 관한 은사, 판단력을 인정받은 이들이 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제안을 했는데, 대다수가 반대하는 이유가 없는 한 그 판단은 존중되는 게 마땅하죠. 모두 똑같은 한 표여야 한다거나 다수결로 하자는 것은 만연된 비합리적 문화입니다. 의견이 자연스럽게 모아지지 않을 때는 ‘목회적 판단’을 해요. 일임 받은 주체들은 그전까지는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노력을 했다면, 그렇게 일임 받은 후에는 전체를 책임지는 주체로서, 의제만이 아니라 각자의 의견을 갖고 있던 마음, 나아갈 기운을 모으는 책임을 갖고 판단하는 겁니다. 서로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죠.


공동체를 하다 보면 개체보존성이나 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왜 그것을 따라야 하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반대는 안 하지만 다른 분들도 내가 안 할 자유를 존중해 달라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실존적 문제라 쉽게 해결되지 않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런 문제는 갈등이 생긴 후 대처하는 건 어렵습니다. 갈등이나 이해관계 충돌이 발생하기 전 예방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건 함께 꾸준히 공부하고 일상적인 신뢰를 쌓아가는 겁니다. 그저 좋아하는 관념을 축적해가는 공부는 아집을 강화하는 기능을 합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자기를 객관화하는 공부가 중요합니다. 또한 관념을 삶으로 순환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책에 나온 관념을 그저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관념이 우리 삶을 어떻게 설명하고 추동하는지, 우리가 직면할 과제들을 예측할 때 그 관념이 어떤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되는지를 공부하는 겁니다. 이해관계 충돌 전에 함께 공부하면서 미리 갈등을 조율할 토대를 만들어 가는 거죠. 그리고 그 공부가 함께 어울려 사는 삶에 토대해야 더 정직한 공부가 되는 겁니다. 갈등에 대한 예방적 대처는 함께 공부하고 더불어 살며 신뢰를 축적해 가는 만큼 이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서로 가치가 합의된 상태인 것 같은데, 그래도 고집을 부리고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할까? 물론 한 인간이 소우주라 생각해요. 그러나 인간은 개체 생명으로서가 아니라 온 우주의 한 자락으로 나라는 것을 자각할 때 소우주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어요. 그 경계가 모호할 수 있는데, 그걸 점검하는 것은 내 생각과 욕망이 내 몸의 개체성에 국한될 때 그거는 다른 생명을 거부하는 욕망의 개체라고 생각해요. 열린 마음의 상태, 온 생명과 맞물릴 때 내 몸의 개체성을 넘어서 생명의 연결성을 인식한 그런 맥락에서 자기 정리를 해야 할 문제죠.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능력이나 수고가 인정된 상태에서 제안을 했고 많은 이들이 공감한 건데, 충분한 토론을 거치고 의견을 모은 후에도 계속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아집의 문제이고 몸의 개체성에 갇힌 거겠죠. 사전에 철학과 가치, 이런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미리 합의를 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왔을 때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어요.


게으름 없이 공부를 할 필요가 있어요. 어떤 운동이나 사상, 종교, 철학운동도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을 공동의 신념체계로 만들어 내지 않고 유의미한 일을 할 수는 없었어요. 공부를 꾸준히 하는 게 주제고 과제인 것 같아요.



21세기 들어오면서 탈(post)자를 많이 붙였는데 탈종교, 탈이념, 탈국가…. 해체하는 힘들이 강해지다 보니 부정성이 강해진 것 같아요. 사람들이 기존에 가졌던 습관을 전환하는 과정을 거쳐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그걸 정화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 구조가 너무 약하다. 사람들이 적응하기도 전에 변화의 속도가 빠르니, 지치고 불안해지는 것 같아요. 호모데우스 시대를 예견하는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다시 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이 인류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 나눠 주세요.


저는 역사나 문제의 흐름을 직선으로 보지 않아요. 도의 길은 한번 가면 돌아오기 마련이죠. 지금 주로 인간이 극도로 신격화되어 가는 듯하지만, 인간이 내면에서부터 무너지는 현상이 같이 가고 있어요. 인간의 오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물질중심, 인공지능 사회가 되어도 샘물같이 생명의 고유한 힘은 남아 있을 겁니다. 사람은 흙과 생기로 만들어져 있어요.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사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오만은 더 큰 고통과 파국을 만들 뿐이죠. 아주 오래전에 사람의 고통에 주목해 해탈과 구원을 가르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 옛 성현들의 가르침은 이전이나 앞으로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종교와 철학은 근본에 있어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철학을 삶과 떼어내지 않고 삶을 추동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모두 ‘으뜸 가르침’(종교)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삶에 대한 가치와 기대는 사라지지 않고 도전하고 맞설 때 새로운 길은 열리겠죠.


생각은 지구적으로 하고 실천은 지역에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대안과 실천이 전체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생명다양성이라는 생명현상에 맞지도 않고, 결국 특수한 개체나 실천 모델이 전체를 지배하는 걸 용인하는 제국주의 지배논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이 해방된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그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부처님의 뜻이 이뤄지는 그 삶의 현장이 곧 정토인 거죠. 전체가 한꺼번에 변하는 거대한 전환은 시대의 흐름과 맞물리든지, 역사를 주관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 주체의 때와 맞물릴 때 일어나는 겁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때와 맞물릴 때 거대한 전환, 개벽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한 때가 있든 없든,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 뜻을 구현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걸 통해 전체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당장 할 수 있는 걸 방기하는 무책임함에 빠지거나 체제 논리에 종속될 위험이 있어요. 밝은누리로 사는 그 땅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땅이 되는 것이고, 인드라망으로 사는 곳이 곧 부처님의 정토라는 믿음인 거죠. 그냥 막연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 변혁과 혁명의 역사를 봐도 특정한 개체와 집단이 인위적으로 전체를 바꾸려 했을 때 나타난 황망함을 생각하면 이것이 훨씬 지혜로운 접근방법이 아닐까요. 이 지점에서 무위의 실천을 강조하는 노자의 지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 우리에게 사람다움을 잃게 하는 강력한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개벽은 가치와 문명의 전면적 대전환을 얘기하죠. 이전 시대의 가치는 대립, 갈등, 증오를 기본으로 하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진위선악(眞僞善惡)이라는 구도로 문명이 구성되어 있었어요. 위는 거짓이니 없어져야 하고 악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인 거죠. 그런데 실제 살아가며 풀어야 되는 삶의 문제는 이분법적으로 해결이 안 되죠. 예를 들면 치약을 중간에서 짜는 사람, 아래에서 짜는 사람이 만나면 아래에서 짜는 사람이 나중에 짜증을 내게 되는데 중간에서 짜는 사람이 악이냐, 그건 아니죠. 그게 거짓이냐, 아니죠. 후천시대를 이끄는 가치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진위선악이 지배하는 문명에서 밀렸던 가치죠. 아름다움은 어울림입니다. 중간에서 짜는 게 악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아래쪽에서 짜는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건 어울림이 아니죠. 아름답지 못한 겁니다. 그런 습관이 각자는 아무 문제 없지만, 어울리지 못하고 추함이 되는 겁니다. 어울림,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생명의 상향하는 충동 속에서 자기를 변화시켜 가는 겁니다. 틀리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불편과 짜증을 겪는 이를 위해 나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은 더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겁니다.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우리 문명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그것은 관계 맺고 있는 생명들에 대한 생명 감수성, 생태 감수성의 문제이죠. 생명/생태 감수성을 배울 수 있는 가장 기본 되는 터전이 가정과 마을이죠. 20세기에 죽임의 권세가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바로 마을을 깬 것이라 봐요. 마을이 깨지고 나면 가정도 자연스럽게 위기를 맞게 되죠. 가정과 마을이 깨진 것은 사람이 터한 근본 관계망, 안전망이 깨진 것이니 현대인은 근원에서 불안의 고통을 겪는 겁니다. 구조화된 불안은 욕망을 조작하는 자본의 작동과 맞물려 가장 지배하기 쉬운 상태를 만들게 되죠. 가정과 마을이 깨진 채 대중 소비사회에 노출된 현대인은 지배 권력에 무기력한 노예로 살게 되는 겁니다. 욕망을 조작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자본 권세에 대항하는 가장 기본 되는 실천이 마을을 회복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마을 속에서 가정을 보호하고, 마을에서 생명/생태 감수성을 몸에 들이는 것이 아름다운 문명을 만드는 길이죠. 먹고 입고 살고 놀고 일하는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 반생명 문화, 심지어는 생명의 재생산 자체(출산)가 거부되는 문화 속에서 가정과 마을을 회복하고 삶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함께 사는 것을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청년들은 함께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 맺기를 해본 경험이 없는 시대적 특성 같기도 한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요.


우리가 제국주의를 분석할 때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라든지, 해방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들이 저질러 놓은 상처 때문에 극심한 가난과 분쟁 속에 살고 있어요. 그 땅들의 전형적 특징이 뭐냐면 다 분리시켜서 지배를 했다는 거예요. 그게 그냥 제국주의나 정치적인 것만 아니라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과도 같다고 봐요. 개체분리와 분절을 통해 지배하는 대중 소비사회라는 굉장히 집단화되어 있는 틀과 철저하게 개별화시켜 버린 소비 주체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탈(post) 담론들에 대해 책임 있는 접근이 필요하죠. 20세기까지 과도한 집단주의 전체주의로 인류의 비극을 경험했기에 탈이라는 주제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한편 자본의 지배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도구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어요. 청년들과 관련된 운동들도 자각하지 못하면 그런 담론들에 노출되는 것이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어요. 청년이라는 세대를 과도하게 특화하게 될 때 오히려 고립을 자초하게 되지는 않을까. 누구하고도 연대하지 못하는 주체, 청년끼리도 영역별로 분절되어 소통이 안 되는 현상은 매우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전 시대의 지배는 눈에 보이는 방식이었다면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지배는 미시권력, 보이지 않는 권력, 내 스스로가 지배를 욕망하는 구조 속으로 선택해서 들어가는 거죠. 지배의 일상화와 지배하기 좋은 조건인 분절화/개별화의 논리가 내가 설정한 의제 속에 어떻게 유입되어서 들어오는가를 생각해야죠. 지배를 굉장히 싫어하는 듯하지만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정서를 가질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안정적인 지배 상태가 되죠. 지배자의 욕망을 나도 모르게 욕망하면서 지배를 당하는 형태, 내 삶에 미치는 힘을 매우 싫어하고 거부하는 정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지배자들이 안정적 지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논리를 따라 생각하는 현상도 있죠.


저희는 청년들과 청년운동도 하고 교육도 해요. 삼일학림은 고등대학 통합과정인데 17세부터 48세까지 현재 80명 정도가 있죠. 저는 1991년에, 청년일 때 공동체 운동을 했는데 그때 만난 청년들, 도시에서 청년연합운동이나 마을운동 하면서 만난 청년들, 지금 농촌과 학림에서 만나는 청년들, 도시에서 소통과 대안이라는 청년모임을 통해 만나는 직장인, 엔지오활동가 등 20대부터 40대를 두루 만나고 있어요. 이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는데 초기 그 모임 주제들이 지금 얘기한 것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어느 자리든지 그런 얘기를 하게 되는데 만나는 사람들이 지금 같이 토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지 안 그런지 이해와 관심 없이 늘 하는 말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쩌면 그런 상태가 뭔가에 지배당한 상태인 거죠. 그런 대화와 만남을 통해 신뢰를 쌓고 교제를 하다보면 본인이 굉장히 저항적인 청년이라고 착각했다는 걸 고백해요. 청년운동의 많은 말들이 오히려 지배의 분절화 전략에 갇혀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경우인 거죠.


의식의 안정적 지배를 공고히하는 것들이 스마트폰, 에스엔에스 같은 도구일 텐데 이에 대한 관점은 정리되어 있는지요?


에스엔에스라는 것이 나름 유용하고 혁명적인데, 굉장히 위험한 도구이죠. 철저하게 개별화, 분절화되어 있고 아무 책임 없이 말을 함부로 내뱉고 자기가 처참하게 당해 보기 전까지 의식조차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모든 게 게임처럼 되기 때문에 어떤 심리적 동요 없이도 매우 잔인한 표현을 쉽게 하는 거죠.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으면, 현실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전환이 잘 되기 어려워요. 저희는 에스엔에스 문화에 거리를 두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걸 잘 활용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이 만들어 내는 내밀한 지배전략에 맞설 수 있을까를 자주 토론합니다.


공부하고 나누고 이것이 답이네요. 얘기를 들으면서 도움도 많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밝은누리에서 하는 공부나 수행법 또는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하는 것들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기도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특정 종교 전통과 상관없이 여러 전통의 수행법을 각자에게 맞는 것을 찾아 하고 있어요. 기도는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 보고, 사람을 깊게 이해하고 자기를 비우고 근원적 생명의 힘과 하나 되기 위해 하는 것이죠. 밝은누리는 다양한 교회 전통에서 습득한 기도로 하는 방식도 있고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도 하고 있어요. 새해 설 명절에는 홍천에 모여 침묵하며 경전통독을 해요. 며칠 동안 함께 앉아서 경전을 통독합니다. 전 과정을 침묵으로 하고 읽는 사람만 읽을 때 말을 하죠. 자기 생각을 침묵 가운데 비우고 경전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를 온몸으로 받는 훈련인데 이게 상당히 맹목적 방식의 접근이라면, 동서양 고전 공부 또한 영성수련의 한 방법입니다. 그 경전, 철학책 저자의 의도가 뭐냐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보다는 그 경전에서 얘기하는 내용을 자기 삶을 성찰하는 자료로 가져가는 걸 중시해요. 읽기 어려운 철학책, 경전을 읽을 때 그 생각을 머릿속에 복사하려고 하지 말고 그 책에서 마음에 와 닿는 가르침에 머물러 생각하고 그 구절을 통해 저자를 만나는 방식으로 책 읽기를 해요. 세미나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비판적으로 토론하기도 하고, 자기가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분야를 연구해서 발표하고 토론하기도 해요. 풍력발전 엔지니어인데 자기 전문영역의 삶을 공동체의 삶과 연관해서 발표하는 거죠. 처음에는 막연해 하는데 나중에는 다양한 상상력이 나오고 자기 성찰이 이뤄져요. 더불어 사는 삶이 더 근원적 텍스트가 되는 거죠. ‘저 사람이 주로 이런 것을 다루면서 살고 있구나’, ‘이 삶과 철학이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하는 거죠. 그런 공부 자체가 수행이고, 마을에서 더불어 사는 것을 수행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가장 좋은 영성 수련이 공부와 더불어 사는 삶이라 생각해요.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동이죠. 근본이 되는 게 밭 생명을 키우는 것, 집에서 생명을 살리는 것. 자식농사라고 했는데 마을에서 마을 아이를 살리는 것과 밭에서 살리는 것을 같은 개념으로 봐요. 농사를 배울 때도 시작할 때도 바로 상품화하지 않고 처음에는 농사가 자기 수행과 기도가 되게 해요. 농사일을 처음 배울 때, 바로 팔기 위해 농사하지 않고 일정한 기간을 수행이 되는 노동에 집중하는 거죠. 농사 지어서 남는 것은 나누고 나눔을 받은 사람이 농사 짓는 사람을 책임진다는 의미에서 나눔을 중요시 해요. 농촌과 도시 간의 연대는 시장과 상품, 소비자와 생산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생각해요.


이런 각성과 실험이 사회적 실천과 연결되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도전을 하려면 각자의 자발성도 필요하지만 사회 제도적으로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요. 가장 핵심 고리로 기본소득을 많이 얘기하는데 또 다른 것이 있을까요?


국가적 차원에서 기본소득, 농민수당 같은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근데 현재의 토지 구조를 둔 상태에서는 어떤 형태의 사회복지도 불가능해요. 토지공개념이 제도화되고 자리 잡는 게 우선 필요해요. 어찌 보면 통일이라는 주제 앞에서 남한 사회의 반생명적 경제질서와 토지문화가 북한 사회까지 잠식해 가는 것은 비극의 확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때문에 그걸 예방하고 준비하는 맥락에서도 토지공개념은 꼭 필요하고 중요해요. 국가에 기본소득이라는 것을 요구한다고 했을 때 국가뿐 아니라 마을 단위에서 경제적 안전망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그것은 관계에서 시장성이라는 것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상품화되는 관계를 줄여갈 수 있을까? 작은 범위에서 시장과 상품 구조가 있다고 해도 전체 구조는 호혜와 선물, 나눔이라는 틀로 구성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겠죠. 밝은누리에서 창업을 하거나 내부의 경제적 틀을 만들 때 이런 점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요. 국가적 차원에서는 기본소득, 농민수당, 토지공개념이 시급하게 실행되면 좋겠지요.




개인, 사회, 국가가 상호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삶을 총체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기본 토대는 생명감수성을 키우는 마을공동체 회복인데요. 그런데 아이들과 청년들이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공동체에서 안 살 수도 있고,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있는데 공동체 구성원이 되고 있잖아요. 이럴 때 관계 맺기는 어떻게 하는지요.


일반적으로 청년과 학생들이 성인이 될 때 부모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독립 자체를 마을 단위에서 하자고 해요. 그저 가정 단위의 독립만 강조되면, 분절화되어서 아르바이트 시장에 내몰리고 더 일찍 자본에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나요. 혼삶, 혼밥으로 대표되는 현실은 자본의 지배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인 거죠. 그렇게 내몰린 현실에서는 노동의 참된 가치를 배울 수가 없어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게 필요하지만 궁극적 대안이 아니고 마을 안에서 삶의 안전망과 자치 자족하는 능력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죠. 밝은누리 청년들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더불어 사는 마을이라는 기본 관계망 속에서 주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돕고 있어요. 가정은 매우 중요한 단위지만, 한편 가족 이기주의는 가장 강력한 세속적 욕망이에요. ‘누가 내 부모고 형제고 자매냐,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부모 형제자매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 해탈, 구원을 고민한 사람들은 혈연에 기반한 삶의 조건에서 벗어날 것을 공통된 과제로 제시하고 있어요. 뜻을 공유하고 함께하는 게 새로운 가족이라는 문화를 갖고 있어요. 자기 부모 형제를 함께 사는 이들의 부모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하는 겸애가 중요한 거죠. 동북아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묵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주제이기도 해요.


밝은누리가 28년 되었다고 하셨는데 서로 관심 갖고 귀 기울이며 도반으로 함께하면 좋겠어요. 인드라망이 올해 20년이 되었는데 지혜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인드라망은 한국사회의 반생명 문화 속에서 생명평화의 가치가 중요하고 필요함을 알고 대중적으로 확산하고 공유하는 데 선각자로 살아온 공동체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존경하고 20년 된 것을 축하해요. 통일이라고 하는 또 다른 시대에 걸맞은 인드라망의 실천들이 있으리라 기대해요. 그 중심이 마을이겠죠. 생명평화 등 큰 관념일수록 자기 몸의 구체성에서 함께 구현이 안 되면 굉장히 공허해지죠. 생명평화 가치와 마을공동체를 동시에 잡고 계속 오셨으니까 마을공동체의 구체적인 실천들이 인드라망 운동을 통해 곳곳에 좀 더 풍성하고 내실 있게 나타나기 바라는 기대가 있어요.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사람이 참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아요. 생태라는 개념을 도시에서 생각을 했을 때는 흙, 나무 등 재료를 떠올렸는데 실제 자연과 벗하며 살면서 깨닫는 것은 생태적 삶을 잘 살려면 사람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람이라서 그런가 봐요. 사업으로서의 마을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정말 기본적 삶의 신뢰와 안전망이라는 것이 실제로 구체화될 때 거기서 큰 힘이 나오죠. 온갖 불안, 근심, 욕망 조작에 대항할 담대한 힘도 거기서 나오고요. 그래서 동북아 생명평화라는 새 문명을 담는 마을공동체가 인드라망 운동을 통해 풍성하게 드러나길 기대해요.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20주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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