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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살리는 한 몸으로
지도력 훈련과 마을공동체, 동북아 생명평화

70, 80년대 한국사회 노동운동, 민주운동, 통일운동은 대개 교회를 토대로 했다. 기독교농민회, 가톨릭농민회, 산업선교회, 민중교회들이 있었다. 90년대를 지나 소위 민주화가 되자, 제각각 전문단체들이 생겨 떠나가고 교회 올 일이 없어졌다. 기독운동을 하는 이들은 통일운동이냐, 기독통일운동이냐 정체성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신앙적 주체성을 명확하게 하는 것과 세상과 하나 되어서 고난 받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같이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철저하게 세상과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정체성이 명확한 사람이다. 자기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과 하나 되면 그 삶이 더 이상 재생산 되지 않는다.

생명의 존재방식은 재생산이다. 지도력 훈련은, 주체의 재생산이다. ‘삶’이라는 말을 풀어서 쓰면 ‘사람’이다. 동적으로 말하면 ‘살림’이다. 어린 아기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고 엄마아빠가 일방적으로 키우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아기가 엄마아빠를 살리고 있다. 지도력은 몸 됨에서 생각해야 한다. 개체의 지도력이 아니라 상호지도력, 간(間)주체성, 상호주체성, 그게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도력이다. 함께 더불어 살면서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이 발현되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 전체가 새로운 사람으로 말미암아 살기도 한다. 지도력 훈련이 없으면 종교는 기독교이지만, 똑같이 부동산을 섬기고 똑같이 학벌을 섬기게 된다. 생명평화의 가치를 자기 삶에 들여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몸 됨이다.

생명평화는 몸과 마음에서 시작한다. 생명과 평화는 굉장히 추상적인 말이기에, 평화운동가가 자기 몸과 마음을 생명평화와 연관시키지 못하면 자기 삶과 아무 상관없는 평화운동가가 될 수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는 조직 내에서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생명, 평화, 인권, 민주 같은 추상적 주제를 다룰수록 내 몸과 마음에서 어떻게 소통될 것인가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평화감수성이나 인권감수성이 있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보이고 갈등이 발생하기에 자기 내면의 평화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관권이다. 또한 인권을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이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면 자신에게 인권이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개혁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적치유와 사회선교는 다르지 않다. 내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면 수련이 필요하다.

1분 동안 마음과 몸을 집중해보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이 괴리되어 있다. 그런데 주로 마음 훈련만 한다. 몸을 수련하는 것과 마음을 닦는 것은 연결되어 있다. 수도와 영성수련 하는 곳을 가면, 공통적으로 침묵과 노동을 한다.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가장 일상적인 게 노동이다. 노동행위에 내 마음이 일치되는 것이 기도 훈련에 가장 좋다. 혹시 귀농을 한다면 먹고 살려고 환금작물을 농사짓는 귀농운동을 주의해야 한다. 오늘 청년과 청소년들이 노동착취 구조에 기반해서 돈으로 환원되는 노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노동에 대한 첫 경험은 영성수련이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이 하나님 창조질서와 소통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 거기에 사람과 사람,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기본관계가 마을이다. 마을은 일상적 삶의 기본 동선이다. 특별히 이동할 필요 없이 형성되는 삶의 장이다. 50~60년 전 우리 농촌마을에서는 기본적으로 두레라는 구조로 마을사람들이 조직화되어 있었다. 마을 하천 정비나 길 닦기처럼 공동의 필요를 위해 공동으로 노동하는 울력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일하고 내일은 너희 집에 가서 함께 일하는 품앗이를 했다. 품앗이와 울력과 두레가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의 조건이다.

나라를 잃었을 때 구국운동을 한 분들은, 마을을 세우는 것이 곧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총칼이나 로비를 써서 나라를 되찾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독립을 이룰 나라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꿈꾸며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21세기에는 생태라는 주제가 굉장히 중요한데, 생태의 기본은 순환이다. 구조적으로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쓰레기, 아무 쓸모없는 건 본래 생명 창조질서에는 없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쓰레기를 구조화한다.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갈 때 중요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자연으로 순환해 쓰레기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마을은 완벽한 생태마을이었다. 똥오줌, 밥상부산물을 생명순환시키는 일상을 살았던 민족은 다른 데서 찾기 어렵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삶의 구조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뚜렷하게 드러내는 게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노는 것, 식의주락 생활문화의 전환이다.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남과 북의 하나됨은 그 생명 자체의 과제다. 아주 어린아이들도 남과 북의 문제로 자기 삶이 규정돼왔다. 우리 청년들이 지금과 같이 갈라져 섬처럼 되어 있는 땅에서 청년실업문제를 직면하는 것과 유라시아까지 철도로 연결되는 땅에서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같을 수 없다. 분단문제를 가지고 장난치는 세력들 때문에 분단이 연장되고 있지만 더 이상 장난 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젊은 세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이 땅의 문제는 이 분단된 구조로는 불가능하다. 21세기 문명이 가야 할 방향은, 생명살림의 노동이 천시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도시마을과 농촌마을이 하나 되는 농도상생마을이다. 농을 중심으로 교육, 문화, 복지, 경제 모든 것을 재편하는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확장되는 것이 남과 북, 동북아의 생명평화이다.

2018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연수회에서 ‘지도력 훈련과 마을공동체, 동북아 생명평화’를 주제로 한 최철호 님 강의를 요약 발췌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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