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를 부탁해, 그리고 못 다한 이야기
겨울계절학교 '철새와 함께 떠나는 평화여행'을 다녀와서

갈거야! 모두 함께 경의선 타고
평양 지나 신의주 저 넒은 광야로!
동두천에서 경원선을 타고 신탄리역에 내려 철원평야까지 밖에 못 갔지만, 어린이들에게는 경의선타고 시베리아 벌판까지 간 듯 신났습니다.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인수터전 7~10세의 어린이들,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 2013년 1월 28일부터 31일까지 겨울계절학교를 다녀왔습니다.
기차를 타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철원평야와 임진강변을 누비는 동안 어린이들은 '경의선 타고'와 함께 '하나'라는 제목의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는 조국은 둘이었네"로 시작하는, 조금 슬픈 곡조지만 희망찬 내용의 노래인데요. 그 노래가 주는 느낌처럼 멸종위기에 몰린 철새들이 가장 평화롭게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분단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은 어린이들에게 설명하기 늘 난감합니다.
노동당사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노동당사입니다. 노동당사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한번 이곳에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 만치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기도 하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될 수밖에 없는 분단 현실 너머 반쪽의 진실을 더듬어 찾아 어린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자라 어른이 될 즈음이면, 노동당사의 나머지 반쪽 이야기도 안내판에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소이산을 내려오며
노동당사 건너편에 그리 높지 않게 솟은 소이산은 철원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만큼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예전에 군부대가 쓰던 초소를 전망대로 꾸며놓고 걷는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린이들은 씩씩하게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면서 신나게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미끄러지기도 하고 넘어지면서도 깔깔대고 좋아합니다. 아예 미끄럼틀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망대 바로 아래는 미로처럼 땅굴을 파놓은 요새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곳이 다시는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야생동물보호사
"얘는 평생 나랑 같이 살아야 돼."
정성껏 고쳐주고 돌봐줬지만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독수리는 철원 야생동물보호사의 김수호 선생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어린이들도 여느 동물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립니다. 이곳에 사는 동물들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의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를 만나다
멀리서 망원경으로밖에 볼 수 없는 두루미와 독수리를 아주 가까이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픈 동물들이란 사실이 어린이들에게도 안타깝게 전해져옵니다. 강의를 진지하게 듣고, 질문도 열심히 한 것이 기특했는지 김수호 선생님은 어린이들을 떠나보내면서 "나중에 커서 야생동물 보호하는 사람이 돼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철원 양지리가 고향인 김수호 선생님이 얼마나 외롭게 이 일을 해왔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김수호 선생님 같은 분들의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눈 썰매
역시 어린이들에게 가장 신나는 겨울철 놀이터는 빙판과 눈썰매장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한탄강 고석정에서 눈싸움을 하고, 양지리 두루미펜션 뒷마당에서 눈썰매를 탔습니다. 돈 주고 타는 곳보다 몇 배나 신나고 재밌을 순 있는 건 자연의 품에 푹 들어가 있어서 일겁니다. 서로 부딪쳐 울다가도 금세 웃을 수 있는 어린이들처럼, 남과 북이 화해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임진강 빙매여울
임진강변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우리는 임진강 빙애여울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두루미 70여 마리를 만났습니다. 어린이들이 잔뜩 몰려왔어도 두루미들이 의식하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두루미를 만났습니다. 연천의 두루미들은 임진강 주변에서 쉬거나 잠을 자고 인근 율무밭에 떨어진 율무를 먹습니다.
'수몰되면 안 되는데'
임진강에 오면 ‘림진강’이란 제목의 북쪽 노래가 떠오릅니다. "림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 건만"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저절로 흘러나올 만큼 평화로운 곳이지만, 최근 군남홍수조절지(댐)가 완공되어 담수를 시작하면 몇 안 되는 두루미 서식지 중 하나가 수몰될 위험에 처한 곳입니다. 임진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철새들이지만, 남과 북의 사람들이 물을 무기삼아 서로 싸우면 두루미도 고통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녹슨 철마를 보며
경원선의 흔적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월정리역을 들렀습니다.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녹슬어 스러져가는 철마를 보며 신기해하고, 마지막 철길을 따라 우르르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함께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남북을 가르는 철망이 아무리 강고할지라도 이 아이들은 반드시 녹일 테니까요. 그날에는 두루미도, 독수리도, 남쪽도, 북쪽도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동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