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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강 발원지 미약골에 가다
홍천청소년수련관 주최, 지역 탐사기행을 따라


지역 문화역사유적을 더듬어보며, 내가 사는 땅을 다시 보게 된다. 사진은 홍천청소년수련관 주최 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에 참가한 홍천 청소년들, 성인들.


"여기는 빛을 내는 암석이 많다고 서광동이예요. 서석 뜻이 상서로운 돌(瑞石)인데,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이라는 거죠. 실제로 예전에 제단으로 쓴 것 같은 바위가 있어요. … 저쪽은 제련소가 있던 터예요. 산 너머 '멍데이' 골짜기가 있는데 철이 많이 나와 '쇠판이'라고 불렀어요. 멍데이골에서 철을 캐내어 여기서 풍구질로 철을 녹였다고 해요. 지금도 개울 바닥에서 철조각이 나와요. … 이쪽이 '대월'이에요. 큰 달이 보인다고 해서요. 위쪽이 상대월, 아래쪽이 하대월 마을. 저기 옆으로 치마를 널어놓은 듯한 '치마바위'가 보이죠?"

구룡령로라 불리는 56번 국도를 따라 서석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길 좌우로 옛 지명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허림 선생 안내를 들으며 홍천 탐사를 나선 길이다. 홍천에서 나고 자란 허림 선생(55살)은 '홍천강 발원지를 찾다'는 주제로 탐사기행을 3년 동안 하고 지역언론에 글을 연재했는데, 그 글들을 묶어 홍천군에서 <홍천강 400리 물길을 따라>라는 1000쪽 가까운 책으로 펴냈다. 물줄기를 따라 집들도 생겨났으니, 홍천강을 이루는 무수한 실개천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작업은 곧 홍천에 형성된 마을의 원류와 변천사를 이해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7월 11일 홍천청소년수련관 주최 문화관광해설사 양성과정에 참가한 홍천 청소년들, 성인들과 같이 대절버스에 올랐다. 방학 맞은 고등학생들은 틈틈이 졸기도 하고 재잘재잘 수다 떨기도 하며 부담 없이 탐사에 임했고,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리며 그새 까먹었다고 시험 보듯 안타까워하는 성인도 있었다. 지난달에는 홍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구룡령부터 천연기념물 삼봉약수 등 내면 일대를 다녀왔고, 오늘은 홍천강 발원지인 미약골부터 서석면 동학농민혁명 위령탑, 내촌면 기미만세운동기념공원과 물걸리사지를 둘러본다.

동창리 기미만세공원.


풍암리 동학혁명 위령탑.


구전으로 전혀 내려온 이야기에서 실마리 찾다

지금은 강이든, 산이든, 다리든, 인간 편의에 따라 깎아내고 옮기고 넓히고 다 할 수 있지만, 우리네 옛 마을은 자연의 흐름과 인간 삶의 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돌 하나도 거기 그렇게 놓인 이유가 있고, 논두렁 수로마다 유래와 이름이 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민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구전이 역사를 바꾸기도 하지 않는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세월의 흔적을 더듬다보면, 이 땅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드디어 생곡리 미약골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숲이 울창한 미약골로 들어섰다. 수질 보전과 산림 훼손 방지를 위해 자연휴식년제로 2012년 5월말까지 15년 동안 출입을 막아놓았다고 한다. 홍천9경으로 소개되어 여행객들이 알음알음 찾는 곳이 되었다. 쭉쭉 뻗은 키 큰 나무들이 그늘지붕을 이루어 34도까지 오르는 초복더위에도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놀러온 사람들이 졸졸 흐르는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허림 선생은 물푸레나무, 가래나무, 신나무, 구릿대, 숯 굽던 터 따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입담을 풀어놓는다.

낙엽송이 우거진 데마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1970년 전후로 국가의 대대적인 화전 정리사업이 시행되어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살던 화전민들에게 도심 단칸방 전세금 정도의 보상금을 주고 내보낸다. 쫓겨난 이들은 당시 한창 개발되던 경기도 안산지역으로도 많이 이주했고, 그런 연유로 지난해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탔던 세월호 유가족 중 강원 출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화전민들이 부치던 산에는 남은 주민들을 동원해 황폐화된 산림을 복원한다며 낙엽송을 심었다. 낙엽송은 일본 중부지방에서 자라는 일본잎갈나무인데, 박정희 정권시절 외래종인 낙엽송이 국토를 뒤덮어서 박정희나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이야기.

홍천강 발원지 미약골, 홍천강은 미약골 마당대기 늪 진펄에서 발원하여 400리 물길을 흘러 한강으로 간다.


'홍천강 발원지 미약골'이라 써있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으니, 홍천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마르지 않는 물이 솟아나는 샘터 같은 게 있을 듯하다. 남한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홍천군을 동서로 관통하는 홍천강은 청평에서 북한강으로 합수되고, 북한강은 남한강과 두물머리에서 만나 한강을 이룬다. 두물머리에 살았던 정약용 선생은 자기 호를 '열수(한강)'라고 지을 정도로 한강을 아꼈는데, 홍천강 옛 지명인 '녹효강'이 나오는 시도 많이 지었다고 한다. 남한강 발원지는 태백 검룡소인데, 오랜 동안 한강의 용천수로 알려져 있던 오대산자락 우통소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드린다고 한다. 그만큼 강마다 용천수가 중요한데, 홍천강은 그런 용천수가 없다고 한다.

홍천강 발원지를 찾아 미약골 원시림을 헤치며 ‘마당대기’에 올라 일대를 샅샅이 살펴보고, 또 오래 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은 허림 선생은, 마당대기 늪에서 물이 난다는 사실을 직접 찾아냈다. 그 때 남긴 기록 일부를 여기에 발췌한다.

"물줄기도 가늘다. 진펄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한참동안 숲을 헤쳐 나왔다. 낙엽송 숲에 이어 산버드나무, 신나무, 느릅나무, 물푸레나무들이 숲을 이룬 가운데 늪지식물인 산갈대, 줄풀, 관중 등이 듬성듬성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급하게 발을 들여넣었다 쿨럭 빠지고 말았다. 진펄, 늪이었다. (중략) 용천수가 솟는 것도 아니고 연못을 이른 것도 아닌 진펄. 조금은 허망했다. 그러나 물이 모여 진펄을 이루고 있다는 것. 거기서부터 400리를 흘러가는 홍천강 물길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홍천강 400리 물길 따라>

동학혁명 전적지에서 설명하는 허림 선생.


산자락 화전민 도시로 떠밀고 심은 낙엽송

가쁜 숨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발견한 시원의 현장을 다음 기회에 내 발과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시 버스에 올라 근대 역사유적지인 서석과 내촌으로 향했다. 서석 풍암리는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항전이 벌어진 곳이다. 1976년 새마을 정비사업 중 유골이 나와 조사하게 된 것, 이 일대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여럿 있던 것 등이 동학혁명 역사를 찾게 된 계기였다. 풍암리 전투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면서 자작고개 뿐 아니라 또다른 곳에서 유골이 묻혀 있을 거라고 한다. 역사란 아직도 발굴 진행형이지 않을까?

반면 내촌면 물걸리는 마을 곳곳에서 동창기미만세운동의 자취를 복원해놓으려 굉장히 힘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미만세공원 뒤쪽에 있는 물걸리사지. 출토된 석조상과 석탑들이 보물급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이름조차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탐방을 마치며, 우리가 사는 삶이 이 땅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하늘과 땅이 기억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

물걸리사지에 있는 유물들. 출토된 석조상과 석탑들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소란 | 지난 가을 홍천에 터잡고 여러 이웃들을 만나며 글 쓰며 지냅니다.


<아름다운마을>은 마을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농촌과 도시를 함께 살리는 마을공동체 이야기를 전합니다.


펴낸곳 |  생명평화연대 www.welife.org

문   의 |  033-436-0031 / maeul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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