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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역사 다시 볼 날 온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미래 내다보며 나눠진 역사 통합 고민해야"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역사'를 믿는 분이다. 민(民)이 한반도 민족사의 긴 여정 속에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해간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다시 역사의 변혁을 추동하고 있다. 평생 한국사와 한국교회사를 연구하고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온 이 원로사학자는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연수회 기조강연에서 공동체를 하는 사람들이 고민해야 한다며 민족공동체의 과제를 당부했다. 남북한 역사를 후대 사람들이 통합적으로 평가하게 될 날을 내다보며 통일사관으로 역사를 풀어가야 한다고 제시했다.


고려시대 '망이·망소이의 난'은 지배자 입장에서 천민의 난이지만, 신분해방, 민주화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역사입니다.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시대마다 재해석,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 역사를 볼 때 역사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 한국사의 주류사관이었던 유교적 역사관으로 인해 지배자에게 거슬리는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1894년 반상차별을 없애고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주라고 일어난 동학혁명은 인간평등을 외친 것입니다. 이후 동학도들은 반봉건뿐 아니라 반외세를 위해 싸웁니다. 우리 역사 전체에서 보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과거 지배층과 일제는 동학난이라고 했지만, 1960년대부터 국사학계에서 토론을 거쳐서 동학혁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민족주의 역사학이 일어나던 즈음에 먼저 활개를 친 것이 식민주의사관입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것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역사관입니다. 그 요점이 뭐냐? 첫째는 한국 역사가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타율성 이론입니다. 고대사부터 훑기 시작해서, 중국에서 와서 왕 노릇했다는 기자·위만을 주장하고 우리 조상 단군 역사를 지우려 했습니다. 고구려가 수·당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도 다루지 않고, 얼마나 외세의 침략을 받았냐만 부각합니다. 임진왜란도 완전히 실패한 걸로 가르쳤지만, 이순신 해전과 의병활동이 일본사람들 운신의 폭을 확 줄여놓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민족성 자체가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역사관을 주입했습니다. 일제 때 학교 다닌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의타적이고 사대주의적이어서 남의 나라에 복속되었다고 맨날 얘기합니다. 식민주의사관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둘째는 우리 역사가 정치적 변동은 있었지만 사회경제면에서는 발전이 없었다는 정체성 이론입니다. 후쿠다란 사람이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써서, 20세기 초의 한국이 8세기 후지와라시대와 같은 고대말 단계로, 일본보다 1200년 뒤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이나 서양은 내적인 진통과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 중세봉건사회로,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갈 수 있었지만, 조선은 자기 힘으로 못 가니까 결국 일본이 와서 조선을 근대화시켜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논리를 오늘 그대로 주장하는 집단이 바로 오늘날 뉴라이트입니다. 식민지통치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본사람도 아닌 한국에 있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연계된 복잡한 뭔가가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셋째는 과거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 같은 뿌리, 같은 지역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둘로 나눠져서 서로 다투고 했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입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건 본래 하나였던 그 상태로 환원시키는 쾌거다, 그러면서 침략을 호도하는 것이지요. 총독부를 통해서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를 강조하고 황국신민화정책으로 우리 역사, 우리 언어를 없애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건 민족말살정책입니다.

남북한 사학계가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문명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찾아 '고대조일관계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해방 이후에도 정체성 이론은 잘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학시대에 관한 연구를 철저히 했습니다. 17세기 후반부터 농업과 상업, 광업활동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보이고, 신분제사회가 붕괴되고 있는 모습을 밝혔습니다. 혈통, 신분과 상관없이 인민의 평등을 얘기하는 단계가 근대사회인데, 조선시대에 그런 싹이 보였습니다. 숙종 때 호적을 보면 노비가 42%, 양반이 6%, 나머지가 일반평민, 양민인데, 120년 지난 철종 때 노비는 1.7%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양반이 40%, 양민이 50% 넘었습니다. 호적을 고쳐나간 것입니다. 이걸 우리 자체 내에서 발전이 있었다고 해서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합니다.

해방 후의 역사학은 분단사학으로 치닫습니다. 민족사의 긴 여정에서 볼 때 이 시대 우리 민족에게는 대외적으로 자주적, 대내적으로 민주적, 민족 전체 입장에서 통일의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남북간에 있는 역사의 과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학의 단계로 나아가려면, 식민주의사학과 유교사학이 보였던 사대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사학의 과잉된 민족자주성 인식도 비판적으로 계승해야 합니다. 민족자주성의 기반을 왕이나 제후에 둘 것이 아니라 민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고려시대 몽고가 침략했을 때, 충주성에서 김윤후라는 장군이 노비문서를 전부 불사르고 "앞으로 너희는 노비가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워서 충주성을 지켰습니다. 민에 대한 자각, 민에 대한 권리부여가 호국, 나라의 자주성과 연관되는 걸 보여줍니다. 한말에도 일부 양반들이 의병의 지도자를 맡았지만 그걸 이끌었던 사람들은 다 일반 민중들입니다. 과거에는 왕후장상 몇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회적으로 더 평등한 관계로 나아가는 게 역사의 발전입니다. 역사가 발전한다는 신념을 가지면 역사의 발전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한국사에서 민, 인민은 지배층 존립을 위한 기반으로 역할을 하다가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오면 몽고침략 등 대외항쟁 주역으로 나서고 조선말기에 오면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사회를 개혁하는 주역으로, 인민이 역사의 주체로 점차 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분단극복과 민족통일을 위해 분단사학의 극복이 중요합니다. 제가 북쪽에 있는 혁명박물관에 가봤는데, 주로 김일성 활약을 다루고, 3·1운동과 임시정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민족통일의 역사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왜 다루지 않느냐고 요구해야 합니다. 이쪽에서도 김일성의 무장활동, 연안파활동을 연구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런 걸 공부하면 종북좌파로 몰아버리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남한 역사, 북한 역사를 통합적으로 풀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한쪽만 제껴놓고 우리 민족사라고 얘기할 순 없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제껴놓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후대 사람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대로 축적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시대에 가서 남·북한 역사를 통합적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북회담이 열리면 서로 팔이 안으로 굽지만, 100년 뒤에는 세계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이걸 따질 것입니다. 남북이 나눠져 있는 역사를 앞으로 어떻게 공평하게 쓸 수 있을 것인가 공동체를 하는 사람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민족통일의 관점을 갖고 고민해야 합니다. 혹시 이 가운데서 자극을 받아서 연구자들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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