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빈집/빈마을에선 누구나 주인이자 손님
희년은행과 청년아카데미의 청년주거대안 탐사 프로젝트, 마을공동체와 공유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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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서울에 살면서 감당해야 할 주거비용은 대체 얼마나 될까? 주변 이들에게 물어보니,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으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교 앞에 사는 경우라면 월세 50만 원 이상 부담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산다면 따로 주거비가 들지는 않겠지만, 주거비 때문에 독립하지 못한다면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와 공유주택이라는 주제로 청년주거대안 사례를 찾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용산에 있는 ‘해방촌 빈집’이다. “월세 부담을 늘 안고 있고 계약이 끝난 후 어디에 살지 고민이 많아요. 주택문제를 대안적으로 풀어가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이런 관심으로 청년들 24명이 해방촌 빈집을 찾았다.
빈집은 2008년 2월 즈음 시작되었다. 초창기 세 사람은 거창한 목표를 세운 게 아니라 여행 다니면서 서로의 집에 초대받은 것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각자의 전세금을 모아보니 4천만 원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은행에서 8천만 원을 대출해 방 세 개짜리 가정집을 임대했다. 이들은 그곳을 ‘게스츠하우스(빈집)’라고 부르며 누구나 주인이자 손님인 곳을 만들고자 했다. 환대, 자치, 공유라는 가치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찾아간 해방촌 빈집은 이상을 현실로 10년째 살아내고 있었다. 이들은 적게 벌고 적게 쓰고 많이 놀자는 식이다. 해방촌 빈집에서는 실제로 월 22~25만 원으로 생활할 수 있다. 생활비를 최소화하니 최소비용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남은 에너지와 시간을 다양한 창조적 활동에 쏟았다. 전혀 다른 철학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간 것이다.
해방촌 빈집은 시작한 지 일 년여 만에 ‘빈마을’로 확장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빈집에 장기투숙자가 10여 명이 되자 더 이상 빈집이 빈집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빈집을 만들기로 했다. 은행에서 2천만 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두 번째 빈집은 전세가 아닌 월세로 임대했다. 적은 돈으로 새로운 생활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세 번째 집은 빈집의 가치를 공감하는 세 사람이 근처에 집을 얻으면서 시작됐다. 그 집도 빈집처럼 운영되었다. 네 번째 집의 경우 두 사람이 전세금을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사를 하게 되어 전세금을 빼줘야 하는 상황, 빈집의 다른 이가 이를 부담해줬다. 빈집은 빈집들로 확장되었는데, 이는 자본의 증식과 달리 철학의 공유를 통한 전염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빈집들은 서로 긴밀히 교류하고 서로 도우면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갔다.
공동체은행 ‘빈고’는 빈집들의 전세금을 서로 돌려막아주면서 생겨났다. 해방촌 빈집에서 누군가는 더 많은 전세금을 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차이에서 약간의 불편함이 생기는 것을 감지했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해결점은 공동체은행 빈고를 만들면서 빈집의 안정성과 함께 상징적이더라도 평등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찻집이자 생협 겸 도서관인 ‘빈가게’는 서로 어울리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다양한 동아리들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빈집 투숙자들끼리 즐겁게 사는 정도를 넘어서 지역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게 해준 것이 빈가게였다. 대안화폐 실험도 이어졌다. 바자회 수익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지역의 상인들을 돕고 교류하는 취지로 해방화폐가 시작되었다. 해방화폐 가맹점도 늘어났고 해방촌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데 한 몫을 해냈다.
해방촌 빈집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려주는 상임활동가 서원 님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초기에 시작했던 3명은 아직도 있나요?’, ‘대표는 누군가요?’, ‘어떤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나요?’ 서원 님 답변을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면 고정된 사람이 해방촌 빈집을 대표하지 않으며, 대표가 있다면 다수이고, 조직이 있다면 대단히 유연하고 유동적이고 복잡한 조직이 있을 것이다. 해방촌 빈집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공동체은행 빈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전혀 다른 철학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이라는 것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누군가 이야기했듯이 삶은 현실이다. 다양하고 창조적인 꿈을 꾸더라도 우리 두 발은 땅을 딛고 서있어야 한다. 해방촌 빈집의 자랑이었고 사랑방 같은 곳이었던 빈가게는 더 이상 없었다. 빈가게는 여러 부침을 겪다가 작년 3월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해방촌 빈집을 지지하는 성공회 용산 나눔의집에서 공간의 연속성을 보존해주고 있다. 서원 님은 다섯 명이 함께 운영하는 것이 빈가게의 큰 장점이면서 동시에 한계였다고 들려주었다. 빈가게는 창조적인 가능성을 실현했지만 사업으로서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공동체화폐인 해방화폐도 일종의 상품권 그 이상이 되지 못했고 현재 모두 회수한 상태라고 했다. 해방화폐는 한때 해방촌의 상점 60~70%가 가맹점으로 확대 운영되었으나 지엽적인 활용 수준에 그쳤고 회전되지 못하고 환전소에서 환전되곤 했었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갈 여건이 되지 못했던 것이 한계였다고 한다. 해방촌 빈집과 빈마을이 처한 보다 더 큰 위기는 해방촌 일대에 불고 있는 부동산 시세 폭등이었다. 용산 미군기지가 이전하고 공원이 조성된다면 엄청나게 요동칠 것이다. 해방촌 빈집에서도 이 문제에 조심스럽게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해방촌 빈집은 지속가능한 것인가? 서원 님은 유쾌한 목소리로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고 있고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새로운 지역에서 다른 가능성을 실현해가는 것도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무기력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서원 님은, 도시에 사는 걸 전제한다면 일정 정도의 무기력함을 감내해야 한다고, 그럼에도 대안의 길은 막혀있지 않고 열려있다고 답변했다. 공동체은행 빈고는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고 공유지 확대를 지향하는 ‘빈땅 프로젝트’를 추진해가고 있다. 최근 ‘빈땅 프로젝트’로 홍성의 땅을 샀고 거기에 집을 지어 모두가 주인이자 손님인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처한 상황과 무관하게 해방촌 빈집은 여전히 창조적 시도를 해가고 있는 것이다.
“해방촌 빈집 이야기 들으며, 단기투숙객, 장기투숙객이 특별한 규율과 약정 없이도 잘 어울려 생활하고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빈의 가치’를 지금까지 지속하게 하는 힘, 10년여 간 이 공동체를 이끌어온 강한 결속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최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생활의 터전을 잃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데, 해방촌에도 불어닥친 기획부동산을 잘 막아내고 극복해가길 바랍니다. 이미 10년여 간 보여준 빈집, 빈가게, 대안화폐, 빈마을, 빈고… 등이 자본에 의해 무기력한 이 사회에 울림을 준 소중한 실험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잘 헤쳐나가며 단단한 공동체로 새로운 실험들을 해나가길 응원합니다.” 탐방에 참여한 윤은주 님이 남긴 소감이다. 장기적 전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창조적 실험을 쉽게 재단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 지속되는 것만이 가치 있다, 가치 있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논리이다. 그러나 현재를 현재로서 경험하고 현실을 그 자체로 향유하는 것은 아무래도 낯선 것일 수도 있으나 우리들이 진정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해방촌 빈집은 하나의 고유명사라가기보다는 여전히 시도되고 있는 창조적 실험의 보통명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인곤 |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며 보람된 일이라 생각해 활동가로 지내고 있습니다. 활동가가 운동의 역사를 써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역사 연구자로도 훈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