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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임진강 따라 걷고 이야기 나누고 침묵하다 '평화와 화해의 순례'


5월 21일,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평화와 화해의 순례' 참가자들이 모였습니다. 임진강 따라 걸으며 평화를 염원하고 서로 사귀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다양한 옷차림만큼 다양한 종교, 나이, 사는 곳, 생각을 지닌 이들이 만났습니다. 참, 뜨거운 햇빛 가릴 모자나 수건 쓴 모습은 한결같았지요.

떼제공동체 신한열 수사님이, 잔디밭에 모여 앉은 순례자들에게 이번 순례 준비한 이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친구들, 청년아카데미 활동가, 떼제 모임 청년들, 지역교회 목사님들 … 여러 분들이 함께 순례 준비모임을 꾸리셨다고 합니다. 오늘 걸을 평화누리길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서로 대화하면서 걷다가 징이 '댕~' 하고 울리면 다함께 침묵하자, 순례하는 동안 가능한 손전화 쓰지 말자는 약속도 같이 나눴습니다.

나란히 걷는 이들과 이야기꽃

임진강 건너 민통선 안쪽에 있는 초평도는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나지막한 언덕에서 초평도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와 ‘떼제공동체 노래’로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짧고 쉬운 가사, 조용하고 단순한 가락으로 지은 노래들을 부르면서 고요한 생각에 잠길 수 있었습니다. 노랫말과 가락에 소박한 울림이 있어서 순례하는 내내 흥얼거리기도 했습니다. 잘 모르는 곡도 있었지만, 옆 사람들과 함께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다보니 금세 익힐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한 목소리로 노래한 덕에 옆에 있는 분과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생각보다 덥지 않았습니다. 논밭 두렁과 산 오솔길 걸으며 만나는 흙, 풀, 나무, 새, 들꽃, 다양한 생명들이 순례 행렬을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순례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란히 걷는 이들과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대구에서 오신 수녀님, 일산에서 오신 대학생 분, 용인에서 오신 목사님, 서울에서 오신 교사 분, 인천에서 오신 성공회 신부님 … 저 역시 여러 순례자들과 인사 나눴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기도 하고 수줍기도 했지만, 대화하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술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평화순례는 어떻게 오셨는지,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여쭤보기도 하고, 제가 일하는 직장에서 있던 일이나 친구들이랑 함께 사는 일상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마주한 이 손바닥에 그려준 화해와 용서.


임진강 건너 초평도가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민통선 안쪽에 있는 초평도는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사람 발길 닿지 않은 지 오래라 온갖 생명이 잘 지낸다는 소식 듣기도 했지만, 코앞에 있는데도 갈 수 없는 곳이란 사실이 괜스레 속상했습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 담아 기도한 뒤, 서로에게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상대방 손바닥에 十자를 그리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모르는 사이에도 서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두 손을 포개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당신을 용서하십니다" 말씀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아리랑노점’을 운영하는 김승근 님이 직접 배달해주신 도시락으로 점심밥상을 나눴습니다. 김승근 님은 일터에서 새터민 분들과 함께 일하고 계시는데 “새터민들이 당장 생계를 위한 일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고향에서 자립할 역량을 갖추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먼 일로만 느껴지는 통일을 전망하며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미 통일을 살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잔히 흐르는 임진강 너머 고즈넉한 초평도를 내내 바라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용기 내어 오해도 풀고

순례 도착지인 율곡습지공원에는 청보리가 가득했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율곡습지로 들어서는 순례자들 얼굴엔 밝은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 뚜벅뚜벅 걷다보니 어느새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날 맡은 일들 때문에 조금은 날카로워졌던 마음도 슬며시 풀렸습니다. 순례에 함께한 친구와 묵은 대화 나누며 어색했던 마음을 풀기도 했습니다. 서로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생긴 오해가 있었고, 이야기를 제 때 하지 못해 가졌던 서운함이 있었습니다. 하고 싶던 말을 전하고, 친구 이야기를 듣다보니 제가 잘못 생각하거나 오해했던 게 있단 걸 알았습니다. “네가 누군가에게 불편한 마음을 느끼는 건, 어쩌면 그만큼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 함께 사는 형에게 들은 말도 떠올랐습니다. 친구랑 충분히 이야기하며 화해하고 나니, 그동안 불편한 마음으로 지냈던 게 미안하기도 하고, 용기 내서 대화하기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순례길은 임진강 따라 계속 이어졌습니다. 말없이 걸으며 ‘댕~’ 울려 퍼지는 징소리가 만들어내는 침묵에 깊이 잠기기도 하고, 길가에 핀 찔레꽃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하루 동안 있던 사건을 돌아보며 ‘평화와 화해는 너와 내가 서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의 바람을 담아 색종이 바람개비도 만들었습니다.


순례 도착지인 율곡습지공원에는 청보리가 가득했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율곡습지로 들어서는 순례자들 얼굴엔 밝은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마지막 순례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두 한 자리에 둘러앉았습니다. 정지은 님이 바람개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순례자들은 네 명씩 모둠을 이뤄 바람개비를 만들었습니다. ‘평화순례에 온 이유, 평화를 가로막는 것, 평화를 함께 하고픈 이’를 각자 이야기하고, 바람개비에 적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질문에 ‘함께 사는 친구들과 북에 사는 친구들’이라고 썼습니다. 전에는 북녘에 사는 사람들이나 통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하는 막연한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군대 ‘정신교육’ 시간에 하는 말을 믿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말들이 왜 틀린지 정확하게 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청년아카데미에서 <전쟁과 사회>라는 책을 읽으며 한국전쟁 전후에 있던 사건들과 그 영향에 대해 공부한 후, 분단이 나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또, 한 인터넷언론에 실린 북한 기행문과 사진을 통해 국가나 이념이 아닌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통일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평화, 화해’ 하면 우리나라 분단 현실과 하나 된 땅에 대한 소망이 먼저 떠오르게 됐습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같은 모둠 순례자 분들에게 "전에는 통일이나 북녘 친구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감사하다"고 나눴습니다. 모둠 모임을 갈무리하면서, '순례자들이 한발, 한발 걸어 율곡습지에 도착했듯, 우리가 서로를 향해 한걸음씩 걸어가는 일상을 살면 평화와 화해는 어느새 올 거다'고 생각해봤습니다. 보리밭 너머 철책 바라보며 다함께 드린 기도를 마지막으로 '평화와 화해의 순례'를 마쳤습니다.

얼마 뒤, 순례 때 만났던 태호형이 제가 사는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배낭에 큼지막한 노란리본 달고 걷던 형답게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사왔습니다. "한번 인연이 됐을 때 만나야,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어 찾아왔다"는 형 이야기가 여러 의미로 다가옵니다. 형과 맛있는 떡볶이 만들어 먹고, 같이 사는 친구들이랑 함께 이야기 나누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국토순례 중인 태호형은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전북 익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출근 때문에 먼저 나온 저는 전철에서 '태호 형이 갈라진 반쪽 땅이 아닌, 남과 북 온 땅을 걸을 수 있는 날이 오게 해주세요' 기도하며 형을 배웅했습니다. 형이 했던 말처럼 우리는 다음 달에 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명연 | 기도-노동-공부가 하나라는 가르침을 몸과 마음에 들이려 힘쓰는 5년차 도시직장인입니다. 마을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게 새삼스레 더 즐거운 요즘입니다.

사진 유재홍 | 아름다운마을밥상에서 건강한 밥상을 차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으로 일상의 모습을 담는 것을 좋아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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